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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니 햇살이 일찌감치 찾아와 맑고 따스한 미소를 뿌려주고 있었습니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땅을 박차고 튀어 나온다는 경칩이 며칠 전이었는데 역시나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온 절기의 순환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제 때 찾아왔습니다. 봄의 기운이 물씬하고 바람도 살랑살랑 부드러웠습니다.

나는 오늘도 내 어린 동행의 벗들을 반갑게 만나 저 ‘앵봉산’ 자락 아래 왕릉의 숲으로 역사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을 만나서 오늘 하루 또 ‘어떻게 재미난 역사여행을 할까’ 생각하니 언제나 그랬듯이 마음이 소년처럼 설렙니다.

나는 아이들과 반갑고 즐거운 인사와 눈빛을 나누며 자동차를 몰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자리 잡고 있는 ‘서쪽에 있는 다섯 개의 큰 무덤’-서오릉-에 도착했습니다.

서오릉은 조선왕조 묘역 중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곳으로 어린 시절 소풍 장소로 여러 차례 찾아왔던 곳이기도 했고,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 장소로 가끔 들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학창시절이나 어른이 돼서 찾아와 거닐었던 서오릉에 대한 기억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특별한 게 없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노릇입니다.

더듬어 보면, 아는 게 없어서였을 것이고, 별 관심이 없어서였을 것이고,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저 도시락 싸들고 찾아와 잔디밭에서 까먹고, 뛰어 놀다가 돌아갔던 기억만이 희미하게 떠오를 뿐입니다.

왕릉의 숲에 접어들어 얘기하며 걷고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밝다.
▲ 왕릉의 숲을 걷는 아이들 왕릉의 숲에 접어들어 얘기하며 걷고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밝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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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과 함께 서오릉으로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난 숲길을 따라 호젓하게 걸었습니다. 우리들은 묘역 입구에 있는 금천교를 건너며 신선한 숲의 공기로 몸을 소독했습니다. 오래 전 왕과 왕비를 만나기 위해선 정갈한 몸가짐, 마음가짐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지요. 금천교 밑의 묘 내수는 아직 그늘 아래 얼음이 풀리지 않은 채 겨울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었기에 하는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영조 임금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묻혀 있는 ‘수경원’에 도착했습니다. 앵봉산의 기슭 동쪽 낮은 곳에 햇살이 조금 모자란 듯이 비추는 무덤에는 조용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홍살문도 없이 초라한 봉분 주변을 옹색한 석물 몇이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자니 왠지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느껴졌습니다.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무덤
▲ 수경원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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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여자, 왕의 후궁(첩)으로 일생을 살았던 영빈 이씨의 생애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한 순간의 착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죽어서라도 남편의 곁에 누워 잠들고 싶었을 텐데, 홀로 외로이 쓸쓸하게 잠든 고독한 왕의 여인.

우리는 ‘수경원’에서 걸어 내려와 숙종의 정비(원비)인 인경왕후가 잠들어 있는 ‘익릉’으로 향했습니다. 익릉에 도착하니 앞서 보았던 영빈 이씨의 무덤과는 달리 무덤으로 들어서는 홍살문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명당임을 알 수 있는 배산(背山)의 자태와 양춘(陽春)을 듬뿍 받으며 자리 잡은 무덤의 용모가 돋보였습니다.

인경왕후의 익릉을 홍살문이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서 있는 모습
▲ '익릉'의 홍살문 인경왕후의 익릉을 홍살문이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서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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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왕후는 열 살 때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숙종이 즉위하자 그의 첫 번째 부인이 된 왕의 여자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애석하게도 천연두를 앓아 발병 8일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답니다. 중전이 되고서도 남편의 사랑을 제대로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녀의 한(恨)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숙종은 인경왕후의 무덤을 서오릉의 가장 높은 지대 위에 보란 듯이 마련해 주었던 모양입니다.

스무 살의 나이에 남편을 두고 세상을 떠나간 조강지처를 위해 숙종은 그 나름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려 비교적 기품 있고, 위엄 있는 무덤을 조성케 배려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떠나간 임은 돌아올 수 없는 법, 살아생전 뜨겁게 받지 못한 남편의 사랑을 어찌 죽어서 받을 수 있으리오?

나는 아이들과 나지막하게 경사진 익릉의 삼도를 바쁘지 않은 걸음으로 천천히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얼마를 다시 걸어 ‘순창원’을 지나고,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져 무리를 이룬 왕릉의 숲을 지났습니다. 그런데 몇 발짝 걸음을 옮기는 찰라 나는 이 숲에서 혼령들이 훨훨 자유로이 노니는 것 같은 환영을 감지했습니다. 그 숲에는 얼마동안 적막이 흘렀고, 나는 그 곳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잠시 후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숲의 고요를 깨뜨렸습니다. 나는 혼유의 숲이 주는 신비함과 신령스러움을 몸소 으스스하게 느끼며 덕종과 소혜왕후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경릉’으로 향했습니다.

덕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세조가 즉위한 지 3년만에 세상을 떠난 추존 왕입니다. 성종이 즉위하여 추존되기 전까지 덕종의 묘는 ‘대군묘제도’를 따랐기에 그 초라함은 측은하기까지 해 보입니다. 특히나 ‘동원이강능’-하나의 무덤 영역 안에 두 개의 무덤을 조성해 놓은 능-의 형식으로 조성된 무덤을 자세히 살펴보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원이강능인 경릉의 서쪽에 자리 잡은 덕종의 부인 '소혜왕후'의 무덤이 지아비인 덕종의 무덤보다 훨씬 격조와 품위있게 조성되어 있다.
▲ '경릉'의 서쪽 소혜왕후릉 동원이강능인 경릉의 서쪽에 자리 잡은 덕종의 부인 '소혜왕후'의 무덤이 지아비인 덕종의 무덤보다 훨씬 격조와 품위있게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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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능제’에 따르자면 동원이강의 무덤에서는 ‘서상제’-상전인 사람의 봉분이 서쪽에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의 형식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나, 어찌된 영문인지 경릉은 그와는 반대로 덕종의 무덤이 오른쪽(동쪽)에 있고, 소혜왕후의 무덤이 왼쪽(서쪽)에 있도록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덕종이 추존되기 전 대군묘 형식으로 있던 것을 추존된 이후에도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말했다는 소혜왕후의 입김이 작용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추존왕 덕종과는 달리 생전에 왕비로 책봉된 소혜왕후의 무덤은 우람한 석상과 봉분을 감싸고 있는 정성들인 난간석을 볼 수 있으니 보통 사람의 상식으론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이른바 ‘여성상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 입니다.

경릉을 오른쪽으로 끼고서 걸어가니 멀지 않은 곳 왼편에 ‘대빈묘’라는 표지 안내판이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숙종의 네 번째 부인이었던 장희빈(장옥정)의 묘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행색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살아생전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어느 날 갑자기 궁녀에서 희빈으로 책봉되고, 후사가 없었던 제2계비 인현왕후를 모함하여 폐비시켰던 간계한 여인 장희빈의 죽음이 드리워진 무덤을 보니 나도 몰래 ‘인생무상’이란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숙종의 네 번째 부인이었던 장희빈(장옥정)의 대빈묘 - 초라한 봉분 뒤로 바위를 뚫고 솟았다고 일컬어지는 소나무와 참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
▲ 대빈묘 숙종의 네 번째 부인이었던 장희빈(장옥정)의 대빈묘 - 초라한 봉분 뒤로 바위를 뚫고 솟았다고 일컬어지는 소나무와 참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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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그것으로 무소불위의 권력과 영화를 누리려 했던 야망의 여인 ‘장옥정’ 지금 그녀의 무덤은 남편이었던 숙종의 무덤(명릉)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외진 구석 한 곳에 쓸쓸한 모습으로 남아 아~! 옛날이여~!를 부르짖고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대빈묘의 뒤쪽에는 마치 바위를 뚫고 솟은 것처럼 소나무와 참나무가 바위 틈 사이로 몸을 내밀어 몇 그루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말하기 좋아하는 어떤 사람들은 장희빈의 기가 너무 드세어 무덤을 쓴 자리 뒤에 놓인 바위를 뚫고 나왔다고 한다니 쓴 웃음을 짓게 합니다.

나는 다시 대빈묘를 지나 북쪽의 작은 등성이 하나를 넘어 내리막으로 향했습니다. 내려가며 오른쪽 언덕을 쳐다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웅장하게 커 보이는 무덤의 언덕(강)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예전에는 미공개 지역으로 남아 있던 ‘홍릉’이 지금 바로 내 눈 앞 가까이에서 “어서 오시지요~!” 하고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가 홀로 잠들어 있어 남편의 옆 자리가 덩그러니 비어있는 '홍릉' 능상의 모습이 멀리 정자각 뒤로 보인다.
▲ 홍릉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가 홀로 잠들어 있어 남편의 옆 자리가 덩그러니 비어있는 '홍릉' 능상의 모습이 멀리 정자각 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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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조의 첫 번째 부인(원비)이었던 ‘정성왕후’가 홀로이 잠들어 있는 홍릉의 홍살문 옆에 서서 얼마동안 아무 말 없이 위를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서 나는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죽은자의 무덤이지만 남편도 없이 독수공방으로 봉분 속에 누워 오랜 세월 외로움을 참아왔을 그녀의 고독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관리인 아저씨의 허락을 받아 홍릉의 능침 뒷편으로 올라가서 정성왕후가 홀로 누워계신 무덤과 그 빈 자리를 바라다보았다.
▲ 남편의 옆자리가 덩그러니 비어있는 홍릉 관리인 아저씨의 허락을 받아 홍릉의 능침 뒷편으로 올라가서 정성왕후가 홀로 누워계신 무덤과 그 빈 자리를 바라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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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살아생전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정성왕후를 지금의 홍릉 자리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죽은 후 이 곳 자신의 첫 번째 부인 옆에 묻힐 것을 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홍릉에는 쌍릉의 무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정성왕후의 왼쪽(서쪽) 옆 자리에는 영조의 봉분자리도 미리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죽은자의 소망은 산자의 행동을 막을 수 없는 법이었나 봅니다. 영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손자 정조는 할아버지의 무덤을 동구릉의 ‘원릉’으로 옮겨 조성토록 하였고, 따라서 지금 홍릉의 정성왕후 옆 자리는 덩그러니 비어 있게 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나는 홍릉을 빠져나와 지금껏 걸어온 길을 되돌아 찬찬히 언덕을 올랐습니다. 아이들과 나는 서오릉 숲길에 난 흙을 밟고, 왕릉의 숲에서 살랑거리는 바람을 얼굴과 가슴에 향수처럼 발랐습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겨 서서히 정문이 있는 쪽으로 향했습니다.

서오릉의 정문을 나서니 가운데 주차장을 지나 조그만 협문이 나오고, 협문을 들어서니 저만치 앞에 숙종과 그의 여인네들이 함께 잠들어 있는 ‘명릉’이 보였습니다. 나는 홍살문을 지나 참도를 찬찬히 걸으며 숙종과 그의 곁에 누워 있는 왕의 여인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숙종과 그의 제1계비 인현왕후가 쌍릉으로 잠들어 있는 명릉, 그 뒤 약400보 동북쪽으로 제2계비 인원왕후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 명릉 숙종과 그의 제1계비 인현왕후가 쌍릉으로 잠들어 있는 명릉, 그 뒤 약400보 동북쪽으로 제2계비 인원왕후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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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잠든 무덤 바로 곁에는 그가 장희빈의 간계에 놀아나 폐위시켰다 복위한 인현왕후가 누워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아마도 예의바르고 덕성이 높아 자상한 국모로 추앙받았던 인현왕후에 대한 숙종의 미안함이 반영된 모양새가 아닐까 내 맘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쌍릉의 봉분에는 난간석이 마치 왕과 왕비가 두 손을 맞잡은 모양새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 느낌은 더욱 내게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한편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왼쪽, 어림잡아 약 백 여 미터 뒤쪽에는 남편에 대한 사랑에 목마르고,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 제2계비(셋째 부인) 인원왕후의 무덤이 애틋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죽어서라도 남편의 곁에 누워 잠들고 싶었던 인원왕후의 간절한 사랑이 오롯이 배어나는 참 안타까운 무덤의 사랑입니다.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는 죽어서도 남편의 곁에 누워 잠들고 싶다했다는데, 숙종과 인현왕후가 나란히 손잡고 누워있는 쌍릉 뒤에서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 인원왕후의 무덤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는 죽어서도 남편의 곁에 누워 잠들고 싶다했다는데, 숙종과 인현왕후가 나란히 손잡고 누워있는 쌍릉 뒤에서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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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인 인경왕후, 제1계비인 인현왕후 다음으로 서열에서 하위인 셋째부인 인원왕후는 죽어서도 차지할 수 없는 남편의 옆자리가 그리워 멀찍이 뒤에서라도 영원토록 바라보며 마음으로 ‘외사랑’을 하려 했었나 봅니다.

나는 오늘 서오릉 왕릉의 숲길을 거닐며 오래 전 왕과 왕의 여인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역사 속 왕의 여인들을 만나 그녀들의 애환과 토로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왕의 여자들인 그 여인네들의 영욕과 한과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며 이제 서오릉을 떠납니다. 왕의 여인들이여, 강령하소서~!

덧붙이는 글 | 지난 3월 8일 답사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서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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