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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하 수상허니, 말씀들이 먼저 알고 요동치더군. 어떤 이는 "땅을 사랑해서 땅을 샀다"라고 사랑이 물리적으로 변하면 땅이 되는 이치를 절절하게 토설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자신이 유방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자 남편이 축하선물로 오피스텔을 선물했다'라고 설레발을 치데. 그 말을 들으니 하도 얼척없어 '내가 죽으면 마누라가 축하선물로 지옥에 오피스텔 한 채 구입해주지 않을까'라는 기대 아닌 기대가 일더라니까.
 
이렇듯 거짓이 불쇼를 하는 세상에서 오로지 나 혼자 실제 있었던 이야기 한 자리를 털어놓으려니 참으로 어색하고 쑥스럽기 한량없네 그랴. 일제 강점기에서 홍도는 어떻게 혼자서 순정의 등불을 지켰을까잉.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몇 년 전 내가 계룡산에 있는 동학사라는 절의 승방을 지키는 녀석에게서 그늘을 샀던 이야기라네. 내가 그늘을 샀던 그날은 그늘에 낼름 욕심낼 만큼 햇볕이 뜨거웠던 날은 아니었지. 그럼에도, 내가 덜컥, 그늘을 샀던 것은 그늘 속에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너무나 우아하고 고고해 보였기 때문이라네. 고양이의 둘레엔 불상의 광배처럼 그늘까지 져 있었거든.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구워먹지도 삶아 먹지도 못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늘 따위를 구입하면 어떡하느냐고? 글쎄, 아무래도 그날 내 정신이 완전히 사이코 모드였나 보이. 그러나 단언하지만, 그날 고양이가 그늘을 둘러쓰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면 아마 자네도 틀림없이 그 그늘을 사고 말았을 거야. 고양이의 모습이 마치 수백 만원 짜리 밍크코트를 걸쳐입고 외출 나온 귀부인을 방불케 했다니까.
 
그날, 나는 동학사 삼성각 앞에 서 있었지. 가을 햇볕이 좀 따갑게 느껴지는 날씨였어. 좀 시원한 데 없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담 너머 승방 쪽마루에 고양이 한 마리가 얌전히 앉아 있더군. 쪽마루엔 직선광선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마루 중간엔 승방 건물 지붕이 만든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지. 아아, 강렬한 빛이 빚어낸 선명한 명암이 무척 고혹적이던지.  
 
난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고양이를 쥐나 잡아먹는 한심하고, 야비한 동물로만 알고 있었다네. 그러나 그날 난 처음으로 알게 되었지. 고양이라는 동물이 영물(靈物)이라는 것을.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존재양식이 있지만 어부지리라는 걸 존재의 양식으로 삼을 줄 아는 동물은 인간을 제외하곤 매우 드물지. 그런데 고양이가 바로 어부지리를 존재의 양식으로 삼는다는 걸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네. 밝음과 어둠의 중간에 존재하는 고양이. 은둔과 노출을 적당히 즐길 줄 아는 고양이. 그렇게 녀석에겐 그늘에 앉아 있으면서도 햇볕까지 자연스레 포섭하는 센스가 있더군. 내가 그동안 말로만 들었지 세상 어느 누구에게서도 확인하지 못 했던 중도(中道)의 형태를 거기서 처음 보았어.
 
그걸 바라본 순간, 내 가슴 속에선 저 그늘을 송두리째 구입해서 집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욕망이 회오리치더군. 황송하옵게도 '지름신'께서 친히 왕림하신 것이지.
 
난 슬금슬금 고양이에게로 다가가서 말을 걸었지.
 

"얘, 네가 가진 그늘이 참 고상해 보이는구나. 그거 어디서 난 거니?"

"아, 이거요? 별거 아녀요. 옆 방 스님에게 얻은 거랍니다. 이 계룡산은 골이 깊어서 이런 종류의 그늘은 아주 흔해 빠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답니다."

 

"그렇다면, 그 그늘을 내게 팔려무나. 얼마나 주면 되겠니?"

"까짓 거 아주 싸게 드리지요, 뭐. 그런데 아저씨, 그늘은 어떻게 팔아야지요? 필로 파나요, 마로 파나요? 그늘이란 걸 한 번도 팔아본 적이 없어서리."

 

"글쎄다. 나 역시 마찬가지란다. 그럼 우리 ㎡로 사고팔면 어떨까?"

 

녀석은 절집 고양이라서 그런지 꽤나 대범한 구석이 있더군. 내가 10㎡를 샀는데도 우수로 2㎡나 끼워줄 정도였으니까 말야.

 

"너, 나한테 그늘을 너무 많이 팔아서 앞으로 덥지 않겠니?" 

"괜찮아요. 전 스님들한테 또 얻으면 되거든요. 우리 스님들은 그늘이 있으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자꾸 내다버리라고 하시거든요."

 

"너네 스님들은 굉장한 분들이구나. 너도 들었는지 모르지만, 요즘 세간에선 남의 그늘을 훔쳐가는 도둑이 아주 많단다. 한 여름철엔 그늘에 대한 수요가 급증해서 일시적으로 투기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지."

 

그때였어. 그토록 순하고 붙임성 좋던 고양이가 버럭, 화를 내더군. 녀석이 "아저씨, 이제 그늘도 구입했으니 그만 가 보세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손사래까지 치더라니까. 아니, 저 녀석이 왜 갑자기 화를 낼까? 표변해버린 고양이의 태도에 한동안 어리둥절하더군. 그러나 크게 개의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보다는 맘먹고 구입한 그늘을 어떻게 집까지 안전하게 가지고 가느냐가 더 걱정이었거든.

 

집에 도착해서 차를 주차하고 나서 막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어. 어디선가 "아저씨, 아저씨!"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군. 뒤돌아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 내가 헛들었나. 그래서 다시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또 다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나를 부르는 건 사람이 아니라 길 건너 2층집 고양이였어.

 

"얘, 지금 네가 날 부른 거니?"

"맞아요. 그런데 아저씨. 왼쪽 손에 들고 있는 그 그늘, 어디서 샀어요?"

"이거 말이냐?  계룡산 동학사 승방 고양이에게서 샀단다. 귀한 거라면서 팔지 않으려는 걸 거의 뺏다시피 해서 사 왔단다."
 
난 일말의 과장까지 섞어가면서 제가 사온 그늘을 자랑했지. 그런데,  갑자기 건넛집 고양이가 킬킬거리면서 이렇게 말하더군.
 
"아저씨, 그거 제가 보니 장물이 분명하거든요. 얼마 전 제가 고양이경찰서에 볼일이 있어 갔다 온 일이 있답니다. 근데 거기서 그늘을 훔친 고양이에 대한 현상 사진과 도둑맞았다는 그늘 사진을 보았거든요. 세상이 어수선하니 참 희한한 도둑이 다 있다 싶어 유심히 봐뒀지요. 아저씨가 가진 그늘의 크기나 모양으로 봐서 그 고양이가 잃어버린 그늘이 틀림없어요. 듣자하니 그늘을 잃어버린 고양이는 정부 3청사 고양이라고 하더군요. 청사 수위 아저씨를 따라 동학사에 놀러 갔는데,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누군가 그 그늘을 훔쳐갔다고 하더군요."
"그래? 네 말이 참말이라면 참 난감하구나. 네 말대로 이 그늘이 장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몹시 난감해서 통사정이라도 하듯 건넛집 고양이를 쳐다보았지. 그랬더니 건넛집 고양이가 선심을 쓰듯 이렇게 말하더군.
 
"그거 이리 주세요. 제가 직접 고양이경찰서에다 갖다주고 범인을 알려줘 체포하도록 할게요."
"그렇게 헤주면 나로선 너무나 고맙지.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좋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구나. 내가 언제 둔산동 사료가게로 초대해서 근사하게 저녁 한 끼 사마."
 
"아저씨, 저녁 같은 것은 사지 않으셔도 좋고요. 다시는 실수로 이런 장물이나 사지 마세요. 사람들은 우리 고양이를 쥐나 잡아먹으며 사는 하등동물로 알지만 우린 사실 지능지수가 아주 높은 동물이랍니다. 이건 일급비밀인데요, 아저씨만 알고 계세요. 우리 고양이들은 지금 인간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서 꾸준히 자금을 모으고 있답니다. 돈이 없어 기본적인 사료마저 살 수 없다면 독립이란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얼마 후 고양이경찰서에 불려가서 장물 획득 경위에 대한 경위서를 쓰고 온긴 했지만, 고양이에게 속아서 훔친 그늘을 샀던 일은 그렇게 잘 마무리가 됐다네. 하지만, 하찮은 미물인 고양이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그 수치심 만큼은 영영 씻기 어려울 것 같네.
 
맹세코 그 그늘이 고양이가 훔쳐온 장물인 줄 알았다면, 그 그늘이 제아무리 멋있었다고 해도 절대 사지 않았을 거야. 자넨 내 말 믿지? 그러나 어쨌든 난 고양이에게 그늘을 샀고, 그 결과 본의 아니게 장물아비가 돼버린 거지.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잘못이 하나 둘이던가? 그러니까 내 말은 '자네도 언젠가 본의 아니게 장물아비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거든. 만약 그걸 부인한다면 자네는 삶이 가진 관계성을 부인하는 자가당착을 저지르는 셈이 되겠지.

이제 난 아무리 멋진 그늘을 보더라도 덜컥 사지 않는다네. 아니, 그늘뿐 아니라 생수 한 병을 사더라도 그렇네. 상대방이 그 물건을 누구로부터 매입했는지 매매계약서를 반드시 확인하고 나서 사게 되지.
 
누가 알겠나. 언젠가 내 인생에도 쨍, 하고 해뜰 날이 돌아와서 느닷없이 고위 공직에 부름이라도 받게 될는지. 그걸 상상할수록 그때 아무 생각없이 그늘을 샀던 일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네. 설마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발목이 잡혀 공직 취임을 위한 청문회에서 낙마하는 일은 없겠지? 안 그런거? 아따메, 어디 말 쪼가 해보소잉.

태그:#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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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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