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는 크지만 도둑이 든다 한들 짖기나 할까 싶게 온순한 데다가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게으른 개. 그러나 반드시 꺾어야 할 적의 빈 틈을 놓치지 않는 날카로움과 어금니를 꽂으면 절대 놓지 않는 집요함을 가진 개. 그래서 호랑이를 사냥하려면 반드시 데려가야 하는 풍산개. 십몇년 전 쯤, 엘지 트윈스가 최강의 팀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잠실야구장에는 김영직이라는, 바로 그 풍산개를 연상시키는 선수가 있었다.

또 하나의 명승부, 1994년 한국시리즈

1994년 엘지 트윈스의 우승 1994년 우승을 확정시킨 순간.

▲ 1994년 엘지 트윈스의 우승 1994년 우승을 확정시킨 순간. ⓒ 엘지 트윈스 홈페이지


정규리그에서 무려 11.5게임차나 벌어졌던 1-2위 팀 LG 트윈스와 태평양 돌핀스가 맞붙었던 1994년 한국시리즈는 예상을 깨고 출발부터 팽팽했다. 돌핀스 투수 김홍집이 예상 밖의 호투를 거듭하며 트윈스의 이상훈·차동철·김용수를 혼자 상대해 연장 11회 말까지 단 1실점으로 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141개째 던진 공이 생각지도 않았던 순간 대타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으로 이어지며 균형이 깨지자 승부의 추는 순식간에 한 쪽으로 쏠리고 말았다. 맥이 풀린 돌핀스 타선이 트윈스의 2차전 선발 정삼흠의 노련한 변화구에 단 3안타로 말리며 7-0 완봉패를 당했던 것이다. 

2패를 안은 채 인천 홈으로 밀려온 돌핀스가 내세운 선발투수는 정민태였다. 한국시리즈에서만 통산 6승을 기록한 역사상 최고의 투수 중의 한 명이지만, 프로 3년차였던 그 시점에서 그는 여전히 '미완의 대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15승쯤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데뷔했던 92년, 그는 단 1승만을 기록한 채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며 무대에서 사라졌었다. 그리고 두 해 만에 복귀했던 그 해 94년 역시 그의 정규리그 성적은 단 8승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로 그 경기, 한국시리즈 3차전은 야구팬들에게 왜 전문가들이 정민태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는지를 이해하게 했다. 

투구 동작을 시작하면 그의 팔은 마치 낚싯줄처럼 유연한 원을 그리며 온몸의 체중과 힘을 손끝에 집중시켰고,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처럼 기운이 응축된 공은 앞으로 성큼 내디뎌진 왼발을 따라 쭉 앞으로 끌려나오면서 마치 날카로운 채찍 꼬리처럼 타자의 빈틈으로 꽂혀졌다. 그 날 정민태의 투구는 마치 하나의 고전무용처럼 우아했고, 현장 프로듀서도 그 동작에 매료되었던 듯 TV 화면은 이닝이 바뀔 때마다 그 투구 동작을 느리게, 꼼꼼히, 재생해댔다.

5회까지 무안타, 무실점. 트윈스의 타자들은 순서를 정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가며 타석을 돌아 더그아웃으로 발자국을 찍어댔고, 분위기는 다시 나흘 전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이 터지기 전의 어느 시간으로 돌아간 듯 했다. 트윈스 쪽 더그아웃에는 침묵이 흘렀고, 돌핀스 쪽 더그아웃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1차전 7회 초 하득인의 적시타로 단 한 점을 올린 뒤 무려 17이닝만인 4회말 윤덕규·김경기·김동기·염경엽이 차례로 적시타를 때려내며 넉점을 선취한 것 역시 그런 흐름의 한 마디였다.

먼저 두 경기를 내주며 패색이 짙어졌음에도 인천 도원야구장 스탠드를 가득 메운 인천 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 날 정민태의 공은, 누가 보더라도 도저히 맞을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넉 점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구위였다. 그리고 그 경기를 잡는다면, 비록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눈물 흘리긴 했지만 1차전의 영웅 김홍집이 돌아와 재반격을 해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되었다.

톱타자 박준태 대신 '영감' 김영직

6회 초, 트윈스의 이광환 감독도 흐름을 바꾸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계산을 한 듯 했다. 그 해 유지현과 더불어 팀의 가장 이상적인 톱타자감으로 꼽혔던 박준태부터 시작되는 타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광환 감독은 서른 네 살의 왼손타자 김영직을 대타로 내세웠던 것이다.

고교생 시절 한국야구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센스와 기술, 빠른 발을 겸비했던 것이 박준태였다. 그래서 필요한 순간이면 안타가 아니라도 사사구를 골라내거나 기습번트를 대고라도 살아 나가줄 확률이 가장 높았던 것이 바로 박준태였다. 그런데 그와 상극일, 항상 느긋하고 느릿느릿해 '영감'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노장 타자 김영직을 선두타자로 내세운 용병술은 관중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흔히 생각하기에 굳이 김영직을 대타로 기용하려면 그 시점은 박준태가 출루한 직후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점 이전에 단 한 개의 안타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어지럽게 눈앞을 교란하는 강속구를 무시한 채 무언가를 기다리던 김영직의 배트는 몸 쪽으로 휘어져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제대로 받아쳐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만들어냈고, 트윈스 더그아웃에서는 오랜만에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경기 절반을 넘겨서야 터져 나온 첫 안타였지만, 뭔가 잔뜩 끌려가기만 하던 흐름이 멎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된 김영직  엘지 트윈스 2군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김영직.

▲ 지도자가 된 김영직 엘지 트윈스 2군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김영직. ⓒ 엘지 트윈스 홈페이지


김영직은 두 타자를 건너 김재현이 때린 우익수 쪽 타구를 단신의 돌핀스 우익수 김갑중이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흘려버리는 사이 홈을 밟아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고, 1차전의 실패를 의식한 듯 다소 이르게 올린 정명원이 서용빈에게 또다시 적시타를 허용하며 점수차는 순식간에 두 점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김영직은 다음 회인 7회에도 2사 2루에서 등장해 적시타를 때리며 또다시 한 점을 만회했고, 박종호와 유지현의 연속안타 때 홈을 밟아 동점을 만들어냈다(동점주자 김영직을 잡으려고 과욕을 부린 돌핀스 염경엽의 송구가 뒤로 빠진 사이 박종호가 홈으로 파고들어 5점째 역전 득점을 기록했다). 돌핀스로 마냥 끌려가던 흐름을 끊어놓은 것도, 그리고 다시 그 흐름을 트윈스 쪽으로 되돌린 것도 모두 김영직이었던 셈이다.

믿었던 '인천 소방서장' 정명원이 무너져내리자 돌핀스 마운드에서는 나흘 전 141구 완투패의 무리를 진정시키지 못한 김홍집이 자진 등판해 추가실점을 저지하는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식어버린 방망이는 끝내 재역전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두 번의 격렬한 저항이 모두 분쇄되어 버린 돌핀스는 이튿날 4차전마저 3-2로 내주며 허망하게 4연패로 그 해의 패권을 넘겨주고 만다.

그 순간, 김선진과 김영직이라는 무명의 대타들에게 걸려 넘어지며 우승 문턱에서 무너져내린 돌핀스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아마도 라이온즈였을 것이다. 1990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9회말 2대 1로 앞서있던 라이온즈의 에이스 김상엽으로부터 동점적시타를 뽑아내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가더니 연장 11회말에는 밀어내기 볼넷으로 끝내기 결승점을 만들어내며 ‘시리즈 4연승’의 발판을 만들었던 것 역시 김영직이었기 때문이다.

'전문대타'의 영역을 개척하다

김영직은 팀마다 세 명씩을 지명했던 1987년 1차 지명으로 MBC 청룡의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OB 베어스와 우선권을 다투느라 매겨졌던 순위에서 그는 두 팀의 1차 지명 6명 중 5번째일 뿐이었다(더구나 그 해에는 노찬엽을 제외하면, 서울권에서 마땅히 뽑을 만한 대형 신인선수가 없었다).

김영직은 고교와 대학, 실업 무대를 거치며 단 한 번도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는 선수였다. 그가 소속되었던 휘문고는 그 때까지 전성기를 맞이하지 못하고 있었고 영남대는 짧았던 전성기를 그나마 지나쳐 있었다. 그리고 그가 머물렀던 실업팀 상업은행도 강팀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속팀의 우승을 경험해본 적도 없었고, 어느 단기리그에서나마 개인상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나마 그가 프로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쓸 만한 타격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시절 그리 흔치 않았던 왼손 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발이 느렸고, 수비능력도 부실했으며, 그렇다고 '한 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굳이 말해 '장점'이라고 분류했던 타격능력도 대단한 교타자라 할 만큼의 정확성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장효조 급의 출루율을 기대할 수 있는 특별한 선구안도 없었다. 더구나 실업무대를 경유해오느라 스물일곱이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한 선수였기에 딱히 바라볼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별 수 없이 '대타'였다. 하루 건너 한번씩, 그것도 한 경기에 한 번, 혹은 많아야 두 번 쯤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거나 왼손 타자에게 약한 투수 앞에서 찬스가 생겼을 때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물론, 그를 기다리거나,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다. 세월은 흘러갔고, 그의 나이 서른이 된 1990년에는 팀의 이름이 '청룡'에서 '트윈스'로 바뀌어 있었다.

아마추어 무대를 평정하고 올라온 거물이 아닌 한, 신인 타자가 대타로서 간간히 출장기회를 잡으며 주전 자리를 넘보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비력을 결여한 것은 물론이고 공격력의 여러 면을 둘러봐도 아쉬운 점이 많았던 그에게 별다른 희망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대신, 이왕 걷던 길을 열심히 걸었다. 그는 굳이 '출장기회보장'과 '수비위치'를 고집하는 대신 아무 때고 '왼손 타자'를 필요로 하는 순간을 위해 컨디션을 조절했고, 주어진 기회에서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는 '지명타자'가 아닌 '전문대타'라는 영역의 존재를 각인시킨 거의 첫 번째 선수였다.

트윈스가 첫 우승을 했던 1990년, 그는 단 202타수에서 54개의 안타를 때려냈지만, 그것으로 만들어낸 타점이 무려 40개였다. 그리고 두 번째 우승을 했던 1994년에도 단 181타수에서 53안타, 그리고 40타점을 만들어냈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장점은 '타격능력'이 아니라 한 경기의 딱 한 순간에 집중하는 '집중력'이었던 셈이다. 

그 두 번의 우승을 이끌었던 것은 90년 김재박·김상훈·이광은과 94년 유지현·김재현·서용빈으로 대표되는 스타들(그리고 두 번 모두 한국시리즈 MVP를 독차지한 '노송' 김용수)이었다. 그러나 그 파란만장한 행로의 고비마다 매듭을 끊고 쐐기를 박은 김영직이라는 대타가 없었다면, 그 두 해 역시 우승의 한 치 앞에서 눈물을 씹었던 기억으로 바뀌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작은 조각 하나의 가치를 생각하다

선동열의 0점대 평균자책점과 이승엽의 56홈런을 목격하며 생각하는 것은 위대함이고 그에 대한 놀라움이다. 그러나 김영직을 보며 내가 생각하는 것은, 거대한 건물도 당당한 재목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기와를 업고 천정을 버티는 대들보나 기둥만이 아니라, 기둥과 대들보를 잇고 군데군데 한 치의 빈틈을 채우는 작은 나무조각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그가 알게 했다. 그는 가장 좋은 재목은 아니었지만, 손톱만큼 짧은 다리 밑에 고여 삐걱거리는 책상을 진정시키거나 딱 그만큼의 빈 틈을 채우기에 가장 적당한 나무조각이었던 셈이다.

'대타'라는 단어는 여전히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나를 위해 준비된 자리는 아니지만, 아쉬운대로 우겨넣기. 나중에 제대로 수습하기 전까지만 일단 메워넣기. 그래서 썩 내키는 것은 아니지만, 비굴한 마음으로나마 견뎌내기.

그러나 김영직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애초에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자리는 없다고. 세상에는 채워진 곳만큼이나 많은 빈틈이 있고, 빈틈에 가장 어울리는 것은 오히려 거대한 완성품이 아니라 딱 그 틈만큼의 몸집을 가진 조각이라고 말이다.

지도자가 된 김영직 (2) 지난 1월 26일, 엘지 트윈스 2군 선수들을 대상으로 소양교육을 하고 있는 김영직 2군 감독.

▲ 지도자가 된 김영직 (2) 지난 1월 26일, 엘지 트윈스 2군 선수들을 대상으로 소양교육을 하고 있는 김영직 2군 감독. ⓒ 엘지 트윈스 홈페이지


야구의 추억 김영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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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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