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8월 31일 광주에서는 4강권 진입을 놓고 4위 팀 해태 타이거즈와 5위 팀 삼성 라이온즈가 대격돌을 벌이고 있었다. 두 팀은 각각 11승과 14승을 올리고 있던 에이스 이대진과 김상엽을 선발등판시키며 맞불을 놓았다.

그러나 1회 초부터 해태의 야수들은 몸이 덜 풀린 듯 두 개의 실책을 저질렀고, 2사 주자 1, 3루 상황에서 선발투수 이대진이 마주한 것은 열아홉 살 신인 이승엽이었다. 한양대에 가등록까지 마쳤다가 '수능점수 미달'이라는 화제를 뿌리며 삼성에 안착한 거물급 신인이긴 했지만, 아직은 타격 훈련에 전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완의 유망주일 뿐이었다. 데뷔 첫 해의 막바지로 접어들던 그 날 이전까지 이승엽이 기록한 홈런은 아홉 개였다.

그러나 바로 이틀 전, 마무리로 나섰던 이대진은 9회에 이승엽에게 동점 투런 홈런을 허용하며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그 날, 이승엽은 당시의 타자들이 알고도 못 친다고 했던 이대진의 시속 147km짜리 직구를 그대로 때려 넘겨버렸고, 그것은 그 무렵 이미 최강팀 해태의 에이스로 우뚝 서있던 이대진에게도 당혹스런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투 스트라이크 노 볼. 완벽한 투수의 볼 카운트에서 이대진은 이틀 전과 똑같은 코스로 똑같은 직구를 찔러 넣었다. 과연 이틀 전의 그 홈런이 정말 너의 실력이 맞는지, 다시 한 번 증명해보라는 듯한 여유와 배짱이 묻어나는 승부였다. 그리고 단칼의 삼구삼진으로 이틀 전의 황망한 패배를 설욕하리라는 오기가 느껴지는 1구였다.

그러나 비록 숫자는 많지 않았어도 이미 그 해 이강철, 박철순, 윤학길, 정삼흠 등 각 팀의 에이스들로부터 홈런을 빼앗아왔던, 그리고 바로 두 해 뒤부터 홈런에 관한 각종 기록들을 새로이 만들어내게 되는 천재타자 이승엽은 거침없이 방망이를 돌렸고, 타구는 순식간에 오른쪽 외야석 중단에 꽂혀 버렸다.

에이스가 등판한 경기에서 1회 초 3실점. 그것도 실책 두 개와 묶인 점수인 데다가, 새파란 신인 타자와의 자존심 대결에서 당한 완벽한 굴욕. 더 이상 불쾌할 수 없는 출발이었다.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에이스'는 달랐다

16년차 선발투수, 이대진 앞으로도 별다른 대박을 꿈꿔볼 수 없는 서른 다섯 살짜리 이 투수가, 오로지 '야구하는 즐거움' 때문에 누구보다도 많은 훈련량을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소화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감동적이다

▲ 16년차 선발투수, 이대진 앞으로도 별다른 대박을 꿈꿔볼 수 없는 서른 다섯 살짜리 이 투수가, 오로지 '야구하는 즐거움' 때문에 누구보다도 많은 훈련량을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소화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감동적이다 ⓒ 기아 타이거즈


안타는커녕 단 한 개의 사사구도 허용하지 않고 9회말 2아웃까지 압도해가다가도 야수의 실책 하나 때문에 퍼펙트게임을 놓치고 허탈감에 빠지는 순간, 곧바로 연타 당하며 패전의 위기로 내몰리는 것이 투수다. 아무리 완벽한 구위를 가졌다 하더라도 심리적으로 삐끗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예민한 존재가 바로 투수인 것이다.

그러나 이대진은 달랐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의 야구는 다시 시작되었고, 멋진 초반 기습에 성공하며 돌파구를 열었다고 생각했던 삼성의 타자들은 더 이상 이대진의 공에 손을 대지 못했다.

이대진은 9회 초에 양준혁이 다시 한 개의 안타를 때려내기까지 단 한 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았고, 무려 11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승엽 역시, 두 번 입술 깨문 노련한 고수에게 더 이상의 흠집을 낼 수는 없었다. 3타수 1홈런, 2삼진.

경기 결과는 3-2, 이대진의 2피안타 완투패였다. 1회 말 곧바로 이종범의 안타에 이은 도루, 그리고 이건열과 박재용이 희생플라이와 적시타를 때려내며 곧바로 2점을 따라갔지만, 삼성의 김상엽 역시 4안타 7탈삼진으로 내달리며 끝내 혼자 경기를 마무리해냈던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한 차례씩 다운을 주고받고도 곧바로 일어서 꼿꼿하게 12라운드를 완주해내는, 독한 근성과 완벽한 기량을 가진 에이스들이 펼친 사상 최고의 투수전이었다.

김상엽은 그런 투수였고, 또 이대진은 그런 투수였다.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날카로운 창이었을 뿐만 아니라, 등 뒤가 무너질 때도 당황하지 않는 단단한 방패였다. 그리고 허깨비 같은 번민과 불운 앞에서 흔들리거나 무릎 꿇는 나약함을 알지 못하는 강한 사람들이었다.

에이스를 동원해도 이길 수 없는 팀, '해태 타이거즈'

이대진이 재학했던 1990년부터 1992년 사이, 광주 진흥고는 전국무대에서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봉황대기에서 32강과 16강에 한 번씩 올랐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대진이라는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질 기회가 없었지만, 그는 그 3년 동안 무려 21개의 홈런, 그 중에서도 장외홈런만 무려 14개를 때려냈을 만큼 걸출한 타자였다. 최소한 그의 경기를 지켜보아온 광주 지역의 야구인들은 그를 동갑내기 중에서도 부산고 진갑용의 수준을 넘어 신일고 강혁과 나란히 놓을 만하다고 평가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교 졸업 후 입단한 해태 타이거즈는 그에게 투수에 전념할 것을 요구했다. 비록 이듬해 126.1이닝을 던지며 0.78의 평균자책점으로 부활하기는 하지만 1992년에 선동열이 원인도 확실하지 않은 어깨 통증에 시달리며 32.2이닝밖에 던지지 못해 결국 포스트시즌에서 롯데 자이언츠에게 밀리자, 김응룡 감독은 마운드의 높이를 다시 한 번 다질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데뷔 첫 해인 1993년, 이대진은 17승의 다승왕 조계현과 11승의 마당쇠 송유석에 이어 김정수, 이강철, 마무리 선동열과 더불어 10승을 올리며 확실한 '차세대 에이스'로 기대에 부응했다.

그리고 1994년에는 방위 복무를 겸하며 7승, 시즌 중에 방위 복무를 마친 1995년에는 곧장 탈삼진왕에 오르며 14승으로 팀 내 최다승 투수가 됐고, 1996년에도 16승으로 에이스의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1997년에는 중간계투로만 20승을 올린 김현욱에 이어 선발투수 중 가장 많은 17승을 기록하며 투수부문 골든글러브를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강한 상대와 맞섰을 때 더욱 강해지는 모습으로 팬들에게 묘한 쾌감을 선사하는 선수였다. 사실 '에이스'라 불릴 만한 투수가 한둘이 아니었던 팀 타이거즈의 젊은 투수였던 탓에 종종 상대팀 에이스와 맞붙어야 하는 순번의 로테이션을 돌면서도 그는 대개 승리를 엮어냈고, 결국 다른 팀의 입장에서 해태 타이거즈는 '에이스를 동원해도 이길 수 없는 팀'이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그는, '무적 해태 타이거즈’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주역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동열의 막강한 존재감 때문에 두 번이나 다승왕에 올랐던 조계현에게 마저 '해태 타이거즈의 에이스'라는 칭호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던 그 시절, 이대진에게 붙여진 별명은 그냥 에이스도 아닌 '에이스 오브 에이스'였다.

10연속 탈삼진, 전설을 써내려가다

10연속타자 탈삼진 1998년 5월 14일, 이대진은 최강팀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10타자 연속 탈삼진을 빼앗아냈다. 그날은 이대진의 생일이기도 했다.

▲ 10연속타자 탈삼진 1998년 5월 14일, 이대진은 최강팀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10타자 연속 탈삼진을 빼앗아냈다. 그날은 이대진의 생일이기도 했다. ⓒ 한국야구위원회



1998년은 또 다른 의미에서 그의 절정기였다. 그 해 그는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하며 선동열의 후계자로 공인받기 시작했고, 무려 183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개인통산 두 번째 탈삼진왕에 올랐다. 그리고 그 해 5월 14일 현대와의 인천 원정경기에서 역사적인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 해 현대는 박재홍, 쿨바, 김경기로 이어지는 중심타선에 롯데로부터 데려온 최고의 선두타자 전준호, 해체 직전의 쌍방울에서 데려온 공수겸비형 포수 박경완, 그리고 이미 국내 최고의 유격수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3년차 고졸 유격수 박진만으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라인업을 보유한 우승팀이었다. 이숭용과 박종호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후보 신세로 내외야를 떠돌아야 하는 팀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강함은 이대진의 집중력을 높여주는 요소일 뿐이었다. 그 날 이대진은 1회 말 투아웃에서 만난 4번 타자 스콧 쿨바를 삼진으로 잡으며 '전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2회에는 김경기, 박경완, 이명수가, 3회에는 장정석, 박진만, 전준호가 하나같이 타석을 찍고 더그아웃으로 돌아 나왔고, 4회에도 역시 김광림, 이숭용, 그리고 다시 쿨바가 삼진으로 물러났다.

삼진의 행렬은 5회 말 선두타자로 나선 거포 김경기가 기습번트를 시도하다가 땅볼아웃처리 되고서야 끝이 났고, 그 뒤로도 하나 건너 하나씩 돌려세웠던 그 경기가 끝났을 때는 무려 16개의 삼진이 기록되고 있었다. 한 경기에서 기록될 수 있는 스물일곱 개의 아웃카운트 중 절반 이상을 투수 혼자서 만들어낸 셈이다.

이대진은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직구에 더해 커브와 반포크볼 같은 '떨어지는 변화구'를 다채롭게 구사하는 투수였다. 그래서 두 번 '탈삼진왕'에 오른 것을 비롯해 해마다 160이닝 이상을 던지면서 이닝 당 1개 안팎의 삼진을 잡아내는 투수였다.

부상과 함께 찾아온 내리막길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내리막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야속한 것은 아직 한참은 더 올라가야 한다고 믿었던 곳에서 만나는 낭떠러지 절벽이다. 그 해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다섯이었고, 이미 까마득히 높은 곳에 새겨진 선배 선동열의 업적들을 그가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 해 9월에 접어들며 뭔가가 삐걱거리는 듯 했던 그는 시즌 마지막 다섯 경기에서 승리 없이 4번의 패전만 기록하며 평균자책점을 1점 가까이 올려놓았고, 이듬해에는 단 3.2이닝만을 던지고는 주저앉아버렸다. 이미 1998년 시즌 초부터 어깨에 나타났던 심상치 않은 증상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이 화근이었다.

운동선수가 얻은 부상을 놓고 원인을 찾아 반성하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그 부상이 증명하는 그의 성실한 훈련과 헌신적인 플레이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대진은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해서 누구보다 집중력 있게 경기에 임하는 선수였고, 성실성과 헌신성이란, 현실 속에서는 종종 무리와 탈로 연결되기도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의 어깨는 근육과 인대와 관절을 막론하고 다 끊어져가는 새끼줄 같은 형편이었다. 그러나 재활훈련만으로 한 해를 거르고 2000년에 다시 105이닝을 던지며 8승 13세이브를 기록해 무난히 재기하는 듯 했지만, 그런 오기의 투혼이 대개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만다. 뒤돌아보며 후회하고 안타까워할 수는 있으되 누구도 쉽게 바보짓이었다고 비난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를 악무는 것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한계마저 지나버린 이대진은 결국 수술을 받아야 했고 2001년을 통째로 쉬어야 했지만, 회복은 생각처럼 순탄치 못했다. 그 사이 그라운드를 향한 조급한 마음은 몇 번이나 섣불리 마운드를 기웃거리게 하기도 했고, 2002년에는 타자로의 변신을 시도하게 하기도 했다. 그 사이 선동열과 이종범은 현해탄을 건넜고, 후배 김상진이 세상을 떴다. 이대진은 여전히 마운드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고, 타이거즈는 '해태'에서 '기아'로 넘겨졌다.

노란 종이비행기, 에이스의 귀환을 환영하다

에이스 오브 에이스 상대방의 강함은 이대진의 집중력을 높여주는 요소일 뿐이었다

▲ 에이스 오브 에이스 상대방의 강함은 이대진의 집중력을 높여주는 요소일 뿐이었다 ⓒ 기아 타이거즈


2007년 4월 7일, 잠실야구장. 시즌 개막 전마다 신문의 스포츠면 한 쪽에 오르던 '올해는 돌아온다'는 소식이 양치기소년의 거짓말처럼 대여섯 차례나 반복되었기에, 이제 이대진이라는 이름에서 점차 현실감이 사라져가던 무렵.

그 날의 경기에 타이거즈의 선발투수로 나선 것은 이대진이었다. 이제 해태가 아닌 기아의 유니폼을 입고, 못 본 사이 벌써 삼십 대 중반의 노장이 되어버린 그의 모습이 마운드 위에 나타났고, 경기가 시작되려던 순간 관중석에서 수천 개의 노란 비행기가 날았다. 돌아온 에이스에 대한 환영의 인사였다.

그날 이대진은 '에이스 오브 에이스'가 아니었다. 그의 공은 너무 밋밋했고, 상대한 LG의 타자들은 꽤 여러 번 그의 공을 정확히 맞혀냈다. 그의 경기를 지켜보는 것은 더 이상 시원하고 통쾌한 일이 아니라 가슴 졸이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6회가 끝나고 쓰러질 듯 무너질 듯 버텨가던 그가 물러났을 때, 3안타 3탈삼진 무실점으로 이끌어낸 승리가 남아있었다. 무려 4년만의 승리였다.

그 해 그는 그렇게 이 악물고 진땀 훔쳐가며 쓰러질 듯 무너질 듯 버텨내며 76.2이닝을 던졌고, 형편없이 무너져버린 팀타선의 역풍을 뚫고 7승을 올렸다. 그리고 올 해 역시 야속하게 허약한 타선과 수비진의 엄호 속에서 50이닝 이상을 던졌고, 두 번의 승리를 기록했다.

올 시즌 프로 16년차. 90년대 마운드의 전설. '왕조'라 불렸던 시대 전설적인 팀 타이거즈의 마지막 에이스. 그러나 그 이대진이 아직까지 한 번도 'FA대박'을 터뜨려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몇 해째 1억에도 못 미치는 연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별다른 대박을 꿈꿔볼 수 없는 서른다섯 살짜리 이 투수가, 오로지 '야구하는 즐거움' 때문에 누구보다도 많은 훈련량을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소화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감동적이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팬클럽', 그들의 마지막 꿈

팬들이 그동안 일구어온 우승의 모든 순간을 일일이 나누어 기억하지 못하는 유일한 팀. 그래서 오로지 십여 년째 '가을에 야구하자'고 부르짖거나 이제 고작 V2, V3 따위 꿈에 목을 매는 이들의 눈에는 도무지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타이거즈의 팬들에게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남아있다면, 아마 이런 것일 게다.

이대진의 선발승과 이종범의 선제안타로 엮어내는 한국시리즈 우승. 그래서 이제는 실수인 체 입버릇처럼 갖다 붙이는 '해태'의 추억에 웃으며 작별을 하고, 조금 깔끔한 기분으로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행진을 응원해볼 수 있을 그 어느 순간. 그리고 좀더 욕심을 내보자면, 끝내 못난 모습만 보이는 것이 미안해 눈물로 떼어냈던 '영원한 아기호랑이' 김상진의 배번 11번을 다시 달고 나선 이대진이 저 하늘 향해 우승컵 높이 들어 올리는 순간 말이다.

영원한 아기호랑이, 김상진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 완투승으로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우승을 확정지었던 김상진은 이제 없다. 거듭된 좌절 앞에서 이대진도 그의 배번 11번을 떼어놓아야 했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팬들은 이대진이 11번을 달고 우승컵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기를 꿈꾼다.

▲ 영원한 아기호랑이, 김상진 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 완투승으로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우승을 확정지었던 김상진은 이제 없다. 거듭된 좌절 앞에서 이대진도 그의 배번 11번을 떼어놓아야 했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팬들은 이대진이 11번을 달고 우승컵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기를 꿈꾼다. ⓒ 김상진 팬클럽 '천상비애'


덧붙이는 글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 <126, 팬과 함께 달리다>,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이상 풀로엮은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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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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