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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완화한 병의원을 인정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현재는 병의원이 건강보험에 강제로 가입되어 있어서 오는 환자들은 정부의 건강보험 제도를 통해 진료하게 되어 있는데, 이를 완화한다는 것은 건강보험에 적용받지 않는 환자들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10년 전 서울 압구정동에서 비만과 피부관리를 하는 병원에 잠시 취직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젊은 여자가 진료실에 왔는데 가뿐 숨을 내쉬며 불만부터 쏟아냈다.

 

“회사에서 몸살과 인후통이 심해서 병원을 찾아 나섰는데 500m도 넘게 걸어 겨우 내과 진료원을 찾았어요.”

 

그 환자는 운이 좋았다. 강남, 그것도 압구정동이 어떤 곳인가? 성형과 피부관리의 중심지에서 나처럼 뭘 모르고 일반 진료도 보는 곳을 찾았으니 말이다. 그곳 병원들은 귀찮아서 감기 같은 진료는 취급하지도 않는다. 하루 한 건만 진료해도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과로 병원들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현상이 서울의 압구정동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곳곳에서 벌어지게 됐다.

 

건강보험제를 뒤흔드는 것은 경부운하 이상의 '대형사고'

 

요즘처럼 정권 교체기에다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둔 시점에 언론은 온통 무슨 부처가 없어지느니, 어느 지역에서는 국회의원 후보들이 박빙의 승부를 하느니 하면서 정치 얘기로만 도배를 한다. 아니면 경부운하 건설이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내용보다도 건강보험제를 뒤흔드는 정책 하나가 어떤 영향을 줄지, 그리고 정치적인 사안이나 이명박 정부가 밀어붙이는 경부운하 이상의 '대형사고'란 것을 아는 국민들은 얼마나 될까? 그 중요성을 이해하는 지식인들은 또 얼마나 될까?

 

한 나라의 건강을 지키는 제도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내 몸에 들어온 병을 낫게 하는 보건의료제도는 공기와 같아서 잘 돌아갈 때는 그 중요성을 못 느낀다. 자, 생각해보라. 당신은 오늘 하루 몇 번이나 공기의 고마움을 느끼면서 살아가는가? 하지만 제도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금방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마치 공기가 단 1%만이라도 희박해지면 숨이 가쁜 것처럼….

 

이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구상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완화 방침은 지금 이명박 당선인의 의지로 봐서는 분명히 실행에 옮겨질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당선인의 철학이나 70년대 사고방식인 '무대뽀 정신'을 보면 응당 알 수가 있다. 한나라당이나 이명박 당선인의 명분은 이렇다.

 

첫째, 모든 사회 영역의 활동이 자유로워야 하며, 병의원도 예외는 아니다(자유시장주의).

 

둘째, 건강보험 적용되지 않는 병의원에는 보험공단에서 진료비를 지급하지 않아도 되니 재정 절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재정 절감).

 

셋째, 일부 병의원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진료를 하게 되면 병의원의 수입이 좋아지고, 국가의 세금 수입도 늘어날 수 있다(세수 증가).

 

넷째, 병의원이 특정한 진료내용을 중심으로 의학수준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고수익 구조를 만들며, 해외 수출이나 외자 획득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의료산업화 논리).

 

그들의 생각은 모두 맞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왜 의사들만 국가에서 이래라, 저래라 해야 하는가? 국가의 개입 없이 환자를 보겠다는 것을 말릴 명분은 없다. 그런 병의원에서 수입이 좋으면 세금도 많이 낼 테고, 잘 하면 해외에서도 진료 받으러 오거나 외국에 큰 돈 받고 팔수도 있을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건강보험제 '완화'로 시작하여 '무력화'로 끝날 것

 

그러나 그것은 정말 순진한 생각이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처사다. 이 정도 수준의 사고로 한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함부로 건든다는 것은 무책임하기도 하거니와 국민을 희롱하는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일부에 한해서 건강보험 강제계약제도를 없애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둑에 뚫린 작은 구멍과도 같아 전체 둑을 무너뜨릴 수 있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완화된 병의원은 수입이 좋은 특정 진료만 할 것이고, 여타 진료들도 보험 적용이 안 되니 비싼 진료비를 내야 한다. 아니면 특정 보험회사에 계약된 환자들에 한해서만 보험 적용을 할 수도 있다.

 

당연지정제를 안 하는 병의원들이 수입이 좋은 것처럼 보이면 다른 많은 병원들도 앞 다투어 당연지정제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나아가 건강보험 자체를 폐기하고, 국가와 건강보험 계약을 하든지, 민간보험회사와 계약을 하든지 자율적으로 정하자고 할 것이다. 이 정도까지는 그래도 봐줄만 하다. 병의원들이 쉽게 지금의 건강보험 제도에서 벗어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명박 당선인 측도 그래서 자신 있게 밀어붙이려나 보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이제 분위기는 점차 고조되어 상위 소득자들이 지금처럼 강제로 건강보험료를 내는 것을 문제 삼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제도에서는 자기처럼 한 달에 보험료로 100만원 내는 사람이나 5만원 내는 사람이나 진료 내용도 똑같고, 대접도 똑같다. 하지만 사보험으로 가입하면 대접은 확실히 달라진다. 그들은 건강보험료를 보이콧하거나 법적으로 문제 삼으면서 건강보험 자체를 무력화할 것이다.

 

의사협회가 당연지정제가 영업활동의 자유 등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을 냈으나, 2002년 헌법재판소에서 현재의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는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사회분위기를 타고 내용을 다소 바꿔서 문제를 다시 제기한다면 결정은 번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성문헌법의 나라에서 관습법도 적용하는 헌법재판소가 아닌가?

 

국가 건강보험 재정 악화로 국민 전체 건강 위협

 

그렇게 됐을 때 국가지정 건강보험 제도는 없어지고, 자율적인 계약관계제로 변할 것이다. 상위 소득자들은 민간보험에 가입해서 고급스럽고, 대형화된 병원으로 가서 진료받을 것이다. 서민들은 민간보험회사에서 받아주지도 않는다. 자주 아프기만 하고, 내는 보험료도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저렴한 보험료를 내는 국가 건강보험에 가입할 것이다. 똑같은 병에 똑같은 진료일 테지만 VIP로 대접받으며 진료 받는 것과 싼 맛에 진료를 받는 처지는 기분이 다르다.

 

문제는 그런 감정적인 것보다 국가의 건강 보험료 수입의 절반 가까이가 줄어들기 때문에 건강보험 재정이 약화된다는 거다. 당연히 국가 건강보험에 가입한 국민들에게는 지금보다 못한 보장성으로 진료를 하게 되어 진료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보험에 적용이 안 되는 항목들이 늘어나서 국민들은 항상 불만을 나타낼 수밖에 없게 된다.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에 있다.

 

하루 종일 공기를 마시면서도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는 여러분들이기에 위에서 늘어놓은 빅뱅과 같은 무서운 현실에 대한 얘기를 노파심에서 요약해본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완화 → 병의원에서 100% 일반진료 가능 → 보험 가입을 이중(국가/민간보험)으로 하다가 상위 소득자들 현재의 건강보험에서 이탈 → 국가건강보험과 민간 건강보험 가입 자율화 → 국가건강보험 재정 악화 → 보장성 약화로 국민들 건강을 보장하는 수준 저하

 

공기와도 같은 보건의료제도, 신중하게 결정해야

 

의사들이라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사업이란 것이 항상 그렇듯, 잘 된다고 우루루 몰렸다가도 경쟁하다보면 망할 수 있고, 민간보험회사에 얽매이면 소신진료는커녕 엄청난 간섭으로 진료 자체를 방해받을 수 있다. 이 모든 결과로 이익을 얻는 곳은 잘나가는 의원 몇 군데와 대형 병원, 민간보험업자들뿐이다.

 

결국 한나라당과 이명박 당선인 집단이 생각하는 자유시장, 의료산업화란 명목 아래 건강보험 제도를 필두로 한 보건의료 정책들의 변화는 누가 봐도 문제가 있다. 국가적 이익이니, 의사들의 수입 증대니 하는 것은 차라리 순진한 발상이다. 이 뒤를 따르는 잘못된 결과들을 우리는 절실히 느껴야 한다.

 

1%의 산소 부족은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결국 우리 신체에 영향을 주고, 수많은 질병과 죽음을 불어올 수 있다. 어떤가? 죽을 정도로 아파봐야 그제야 느낄 수 있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대안정책 웹사이트(www.epl.or.kr)에도 실렸습니다. 고병수 기자는 새사연 이사이며, 의사입니다.


태그:#건강보험 당연지정제, #이명박, #인수위, #보건의료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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