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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양상기 의병장... 순사에서 의병으로

부자 의병장 표지석 앞에 선 후손 양일룡씨
 부자 의병장 표지석 앞에 선 후손 양일룡씨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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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이 같은 일을 하거나 같은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아름답게 보인다. 

지난 봄 우리 동네 부자 농사꾼이 함께 옥수수 밭 모종에 흙을 덮어주는 것을 보고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카메라에 담고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글(기사)을 쓴 적이 있었다.

인류 역사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게다. 국난을 당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나라를 지키다가 목숨을 바친 모습은 가장 숭고한 나라사랑의 모습이요, 거룩한 희생이 아닐까?

나는 이번 호남 의병 전적지 순례 길에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을 만나게 되어 무척 기뻤다.

양상기(梁相基) 의병장은 1883년 10월 10일 광주군 서양면 니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이며, 호는 설죽(雪竹)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운 풍암정에서 병서를 읽고, 무예를 닦았다. 20대 초반 광주경찰서 순사가 되었다. 1908년 4월 23일, 아버지가 의병장인 것이 알려져 순사 직에서 면직되자 곧장 본격적인 대일 항쟁 의병의 길로 들어섰다.

1908년 5월에 거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된 양상기 부대의 규모는 최대 80여 명이었던 바, 주로 화승총으로 무장하였다. 이 부대의 편제는 도통장에 안판구(安判九), 후군장에 이문거(李文擧), 포군장에 안영숙(安永淑), 도선봉장에 조사윤(曺士允), 참모장에 유병기(劉秉基) 등이었다.

일제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집에 수록된 양상기(가운데) 의병장과 부하들.
 일제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집에 수록된 양상기(가운데) 의병장과 부하들.
ⓒ 양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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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기 의병부대는 구식군인이 참여한 평민부대로 김태원 의병장의 순국 뒤에는 그 부대원을 흡수 계승하였다. 양상기 의병부대는 ‘한국(韓國)의 복구(復舊)’를 주창하며, 군자금 모금, 밀고자 및 일진회원 처단, 일제 헌병분견소 습격 및 방화와 같은 활동을 펼쳤다.

1908년 11월에는 아버지 양진여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으로 2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광주수비대와 접전하여 크게 이겼으나, 이듬해인 1909년 4월 동복 서촌 전투에서 1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고, 그해 5월 담양 덕곡리 전투에서는 23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이는 무기의 열세도 있었지만 밀정들의 밀고로 일제 토벌대에게 기습을 당한 때문이었다.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 침략자와 싸우겠다

1909년 12월, 양상기 의병장은 남원 도통리에서 은거 중 일제 토벌대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 강도 방화 및 살인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다. 하지만 1910년 5월 17일 대구공소원은 다시 동일한 죄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선고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8월 1일, 아버지 양진여 의병장이 순국한 지  두 달 뒤, 똑같은 장소(대구감옥소)에서 아들 양상기 의병장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때 양상기 의병장 나이는 27세였다.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백마산에는 부자 의병장 양진여 양상기 묘소가 양지 바른편 기슭에 아래위로 모셔져 있다. 아래쪽 아들 양상기 무덤은 시신 없는 가묘(假墓)라고 했다.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처해진 뒤, 시신을 곧바로 수습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관보 제4750호(1910년 8월 6일) 내각고시제89호, 총리대신 이완용의 명의로 양상기의병장 교수형이 대구감옥에서 집행되었음을 싣고 있다.
후세에는 총리대신은 매국노로, 폭동 강도 방화범은 의병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 관보 관보 제4750호(1910년 8월 6일) 내각고시제89호, 총리대신 이완용의 명의로 양상기의병장 교수형이 대구감옥에서 집행되었음을 싣고 있다. 후세에는 총리대신은 매국노로, 폭동 강도 방화범은 의병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 양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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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의병장 순국으로 가족들이 풍비박산되고 쑥대밭이 된 집안에 누가 곧장 달려가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겠는가. 양상기 의병장이 취조과정에서 남긴 말씀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일제는 한국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인을 한국의 관리, 또는 거류민으로 속속 들여보내어, 끝내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여 한국을 탈취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인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한국에서 추방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일제가 귀순할 의사가 없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귀순할 뜻은 추호도 없으며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만일 내가 살아날 수 있다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 침략자와 싸우겠다.”


나는 부자 의병장 후손 양일룡씨를 2007년 11월 7일에 이어, 2007년 12월 8일 광주시내 한 찻집에서, 이튿날은 광주시 시민공원에서 두 차례 더 만났다. 내 생애 처음 듣는 부자 의병장 이야기를, 단 한 번 듣고 글을 쓴다는 게 선열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풍비박산이 된 집안의 수난사

- 집안의 수난사를 들려주십시오.
“간악한 왜정 35년간 나라 없는 세월을 지내면서 풍비박산이 된 집안이 어디 우리 집안뿐이겠습니까? 당시 민족혼을 지닌 백성들은 모두 겪었을 수난이지요. 양진여 의병장은 제 할아버님이십니다. 할아버님은 3남1녀를 두셨는데, 장남이 양상기 의병장이시고, 둘째는 필수(弼洙)로 고문 후유증에 후사 없이 26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셋째가 공수(空洙)로 제 생부이십니다.

다행히 생부는 5형제를 두셨는데 저는 장남입니다. 제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큰 아버님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할아버님 막내 동생 동골(東骨) 할아버님은 제 할아버님 의병부대에 호군장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3년 유배생활을 하였지요. 이런 쑥대밭이 된 집안을 추슬러 오신 분이 제 할머님(박순덕)이십니다. 생전 할머님 눈은 생고막을 까놓은 것처럼 새빨갰는데 왜놈에게 붙잡혀 가서 눈에 고춧가루를 넣은 고문 후유증 때문이었답니다. 제 할머님은 당신 남편과 큰아들이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겪었고, 둘째 아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고, 당신조차 몸이 성치 못한 채 집안을 꾸려 오셨으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지요.”

양상기 의병장 판결문
▲ 판결문 양상기 의병장 판결문
ⓒ 양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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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에 보니까 양상기 의병장은 후사는 없었지만 부인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저도 큰어머니를 뵙지는 못하고 할머니에게 듣기만 하였습니다. 큰아버님(양상기 의병장)이 왜놈들에게 붙잡혀 대구감옥소로 이송 갈 때 큰어머니 백씨가 지아비를 따라 영산포 나루까지 갔는데 그 길로 돌아오시지 않았답니다. 아마도 큰아버님이 자기는 죽을 테니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먼 곳에 가서 살라고 간곡하게 당부한 모양입니다.”

- 다른 후손들과는 달리 조상의 기록을 다 찾으셨습니다.
“어릴 때 할머님으로부터 할아버님과 큰아버님이 의병장으로 매우 훌륭한 분이라는 말씀을 몰래 듣고 자랐습니다. 두 분의 기록이 광주나 대구 어딘가에는 남아있으리라는 기대로 광주지방검찰청과 대구고등검찰청 등 관계기관 문서 창고를 뒤졌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혹시 지문이라도 찾을까 하여 치안국 지문 감식계까지 찾아갔지만 허사였습니다.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부산교도소를 찾아갔습니다.

마침내 1971년 6월 22일, 부산교도소 문서기록 관계자와 함께 문서고에 들어가 한 시간 남짓 뒤적인 끝에 두 분의 판결문을 찾았습니다. 제가 조상의 문서를 찾고자 나선 지 10여 년, 땅마지기도 날렸지만 그때의 기쁨은 말할 수도 없었지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지요.”

두 분 동상을 세우고 싶다

양일룡씨는 국가의 기록은 마땅히 공개돼야 하고, 더욱이 일제 강점하 기록은 광복된 정부가 솔선하여 찾아 그 공과를 발표하고, 그에 따라 표창 징계함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건만 우리 정부는 해방 이후 그러지 못한 잘못이 있다고 하시면서 문서를 찾아다닌 10여 년 세월을 회고하셨다.

후손이 눈이나 뜨고 열정을 가지면서 기록을 찾아 조상의 행적을 밝히면 포상이 되고, 그렇지 못한 후손의 조상은 그대로 영영 묻혀 넘어가는 잘못을 지적하셨다. 아마도 기록이 공개되면 조상의 매국 행위나 친일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 주류로 뿌리박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쓴 웃음을 지으셨다.

양일룡씨
 양일룡씨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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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 의병장 후손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제 나이 이제 여든입니다. 1987년 4월, 광복회 전남 광주 연합지부의 명의로 할아버님 아호를 딴 ‘서암로(瑞庵路)’ 지정 청원서를 제출하여 1992년 10월, 광주 서방 네거리에서 전대 네거리를 거쳐 동운고가까지를 ‘서암로’로 이름 짓게 되었습니다.

그 일대가 할아버님 출생지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기 전에 이 거리 어디에다가 두 분 동상을 세워 후세들에게 '나라사랑' 본보기로 삼게 하고 싶습니다. 또 하나는 의병이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을 저도 뼈저리게 실감하면서 살아왔습니다. 3대뿐 아니라 4대, 5대로 이어지는 현실입니다.

현행 보훈법에 따르면, 해방 전에 돌아가신 유공자의 후손 보훈 혜택이 손자 대까지이고, 해방 후에 돌아가신 분은 아들 대까지입니다. 하나의 잣대로 줄을 긋자 조상의 순국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후손도 여러 분 계십니다. 감히 청하기는 그렇습니다만 이를 한 대 더 완화하는 게 나라가 독립운동가를 예우하는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름없이 돌아가신 의병이나 독립투사 선열을 더 발굴하여, 그 어르신들의 신원을 풀어주는 정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순천대 홍영기 교수의 “한말 양진여 의병장의 생애와 의병활동”, 빛고을역사교사모임의 “양진여 양상기 부자 의병장 실기 ”, 국가보훈처의 “공훈록”등을 참고로 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다음 회는 함평 ‘심남일 의병장’편입니다.



태그:#의병장, #독립운동, #양진여, #양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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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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