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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짜리 아들 녀석이 학교에 다녀오더니 "응가, 응가" 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다. 영국 생활 딱 1년이 지나자마자 우리말보다 영어에 더 익숙해지는 바람에 걱정을 끼치던 아이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 녀석이 한국말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의문은 아들 녀석이 들고 온 과제물 노트를 보고 풀렸다. 당시 이 녀석은 다섯 살부터 1학년 입학이 가능한 영국 초등학교에서 입학 예비반(reception) 소속으로 알파벳과 기본적 문장구조를 배우고 있었다. 이날 이 반 아이들이 배운 영어 알파벳은 'ng'. 과제물 노트에는 'song'이나 'hang' 같은 용례들이 적혀있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바벨을 들고 있는 아이의 그림이 함께 실려 있었다. 그리고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흉내내 보세요'라는 설명이 실려 있었다. 물론 영어로. 이 설명을 보고 아들 녀석은 세 살짜리 동생이 화장실에 앉아 힘을 줄 때마다 엄마가 옆에서 내주던 한국말을 떠올린 것이다. '으응-가!'

 

영국 어린이들이 처음 배우는 알파벳은 '에이', '비', '씨'가 아니라 '아', '바', '카'다. 선생님이고 엄마고간에 각 알파벳의 이름보다 고유의 소리를 강조해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다보니 모음을 생략하고 자음만으로 아이들의 청각을 자극하는 방법을 택한다. '기역', '니은'은 몰라도 'ㄱ'과 'ㄴ'이 만들어내는 발음을 아주 짧게 끊어 '그', '느'하고 읽을 줄 알면 성공이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유치원에 다니는 둘째 아이는 집에 돌아와 이빨 썩을까봐 몰래 감춰놓은 비스킷을 찾아다니며 스타카토식 혼잣말을 한다. '브…이…스…쿠…이…트….'

  

이런 원리에 따르면 4살짜리 아이들에게 'v'라는 자음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아빠가 차를 몰고 갈 때 어떤 소리가 나는지 흉내내보라'고 하면 된다. '브으으으(Vvvv!)'라는 힌트와 함께. 이런 방식으로 아이들은 'very', 'drive' 같은 단어들을 어떻게 읽는지 배우기 시작한다.

 

'에이(A)'하면 '애플(Apple)'에다 '비이(B)'하면 '보이(Boy)'를 따라 읽으면서 배웠던 내 경험에 비추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영국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알파벳과 단어는 우선순위에서 일단 밀려난다.

 

영국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또 하나 눈에 띄었던 점은 언어 학습을 음악, 미술 등 다른 과목과 연계해 진행한다는 것이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초등학교의 저학년 교실에서 수업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이날 담임교사는 20여명 남짓한 학생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문장을 이야기하고 그 문장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주문했다. '꽃은 빨갛다(The flower is red)'라고 쓰고 자신이 좋아하는 빨간색 꽃을 그려보는 식이다. 물론 이 아이들은 'flower'나 'red'같은 단어들을 이제 막 배우는 단계에 있는 아이들이다. 미술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영어를 학습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날 수업이 미술시간인지 영어시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교사 1인당 학생 5명... "이래서 몰입교육 가능하구나"

 

영어 교육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내가 요즘 들어 대한민국을 들썩거리게 하고 있는 몰입교육이라는 걸 떠올려 본 건 이 장면에서였다. '한국에서도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 같은 것만 만약 영어로 가르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친 것이다.

 

대한민국의 영어 교육 현실을 혁명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대발견을 한 것처럼 아내에게 내 아이디어를 자랑했더니 아내는 콧방귀를 '흥'하고 날렸다. 아내는 영국에 오기 전 한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10년 넘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런 걸 한국에서는 '몰입교육'이라고 하는데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에서 이걸 당장 실시하는 데는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는 훈계만 들어야 했다. 

 

내가 이날 영국의 초등학교에서 본 것 중의 또 하나는 한 학급에 교사가 여러 명이라는 사실이다. 제대로 된 몰입교육을 하려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교사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교사의 질은 일단 제쳐놓고 우선 학생 수 20명 수준의 이 학급에는 담당 교사만 2명인데다 경우에 따라 한두 명의 보조교사가 추가로 참여하기도 한다. 결국 이렇게 되면 한 교사가 맡아서 가르치는 학생의 숫자는 5명을 넘지 않는 셈이다. 4개의 그룹으로 나눠진 학생들이 영어건 미술이건 해결하기 어려운 대목에 부딪히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이들 보조교사의 몫이다. 

 

이날 수업에는 마침 내가 공부하고 있는 대학에서 영어교육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한국인 학생 몇 명이 실습 차원에서 보조 교사로 참여했다. 이들 모두 한국의 초등학교 또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중 해외연수 기회를 얻어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현직 교사나 강사들이었다. 이들이 영국 초등학교 교실에서 느끼는 경험은 남다를 것 같아 몇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한국의 영어 교사들이 영국의 교실현장에 직접 참여하면서 느낀 것은 대략 이랬다.  

 

"한 학급 내에서도 각 그룹별로 목표치를 정해놓고 나름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요구될 뿐 한 학급 전체 학생들에게 일정한 기준을 충족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외국의 수준별, 그룹별 학습을 도입해 보기 위해 한국에서도 우리 반 학생들에게 그룹별 과제를 내주고 채점을 해보기도 했지만 30명 넘는 학생을 혼자서 관리하기에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말았다."

 

"교육부가 표방하고 있는 초등학교 영어교육의 목표는 '흥미와 자신감 유발'이다. 그렇다면 당장 빈칸 채워서 점수 잘 받는 아이보다는 외국인 교사에게 책 읽어달라고 떼쓰는 아이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

 

"아이들이 스펠링 몇 개 틀렸다고 해서 상처받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영어를 좋아해서 그 바다에 빠져있는 아이들이라면 스스로 헤엄쳐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이다."

 

"한국에선 30명 넘는 학생 관리로 수준별 학습 못했는데..."

 

그러나 내 눈에 비쳤던 것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몰입교육이고 수준별 교육이고를 떠나서 학부모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을 포함한 보조교사들이 광범위하게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국에서는 비단 수업뿐만이 아니라 견학이나 답사를 갈 때도 아이들의 안전을 생각해서 '학생 몇 명당 성인 한 명' 하는 식의 기준을 정해 부모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걸 보면 영국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아이들의 미래에 관한 한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가 함께 책임진다는 일종의 연대의식이 알게 모르게 숨어있는 것 같다.

 

이런 연대의식을 갖추는 일은 뒷전으로 한 채 청계천 복원에 공사기간을 맞추는 식으로 몰입교육을 도입하겠다는 발상이라면, 그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모른다.

 

내가 '몰입교육'의 취지에 찬성하면서도 '이명박식' 몰입교육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다. 어느 날 아침 <더 타임스>나 <가디언> 같은 영국 신문에서 '이명박식' 영어교육을 해외토픽이나 가십기사로 읽게 되는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할 것 같다.

 


태그:#영어몰입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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