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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 좋은 건어물도 값 싸고 구입할 수 있다
 품질 좋은 건어물도 값 싸고 구입할 수 있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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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이 최저 기온 영하 10도를 기록하던 지난 24일. 조금은 이르지만 대목물가의 영향을 받기 전에 보관이 가능한 제수를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며 팔을 잡아 끄시는 친정엄마를 모시고 동대문구 제기동 경동시장을 찾았습니다.

“여기가 참 오래된 시장이다. 너 낳기 전부터 여기서 장을 봤거든. 아마 6·25 전부터 있었을 거야. 수십 년 경동시장을 다녀서 그런지 멀어도 꼭 여기를 찾게 되더라."

경동시장은 6·25 이후인 1960년 초 서울 사람들의 생활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번창하게 된 재래시장입니다. 생성 초기에는 대부분의 상인들이 경기 북부와 강원도 일대의 농민들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직접 생산하거나 채취한 농산물과 채소, 임산물들을 이고 지고 상경해 역에서 가장 가까운 장터에서 팔고 다시 귀경을 하곤 했던 것이지요.

국내 최대 약령시로도 유명한 경동시장 각종 차와 약제를 구할 수 있다
 국내 최대 약령시로도 유명한 경동시장 각종 차와 약제를 구할 수 있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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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라도 타고 오는 사람은 돈 있는 사람이고 대부분은 기차 값이 아까워서 사흘씩 나흘씩 걸어서 오지.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남자들은 등에 지고…. 강원도 태백에 살던 우리 육촌 아저씨도 일년에 몇 번씩 은행을 팔러 오셨는데 은행 한 되를 지고 나흘, 닷새를 걸어와서 경동시장에서 그걸 파는 거야. 그래서 돈도 만들고, 애들 옷도 사고, 신발도 사서 또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걸어서 가시더라.”    

소매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그 시절의 경동시장은 그야말로 재래시장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상인들은 즉석에서 형성된 가격에 물건을 팔거나 필요한 다른 물건과 물물교환을 하는 형식이라 자연히 큰 마진을 얹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경동시장을 다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물건값이 가장 싼 시장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지요.

“시골사람들이야 논이고 밭이고 산이고 들에서 나는 것으로 자급자족을 하니까 나물이나 곡물 같은 것은 사먹을 일이 없지. 하지만 돈은 얼마나 귀한지 몰라. 그러니까 밤, 대추 팔아서 돈 사온다고 했지.”

영하 10도의 추운날. 김이 무럭 무럭 나는 옥수수는 행인의 발길을 잡는다
 영하 10도의 추운날. 김이 무럭 무럭 나는 옥수수는 행인의 발길을 잡는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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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여주에서 살았다는 엄마는 어린시절 경동시장으로 나물장사를 하러 가신 할머니를 따라갔던 추억을 들려주십니다.

“커다란 보퉁이에 말린 나물을 잔뜩 이고 여주에서 40리 길을 걸어갔지.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기도 하고 배고프면 주막에서 요기도 하고…. 그땐 강원도고 경기도고 서울로 가는 샛길마다 허름한 주막이 있었다. 요즘 같이 추운 겨울에 먼 길 걸어온 장사치들에게 군불 뜨끈하게 지핀 주막방이 최고였지. 커다란 방 하나에서 여러 명이 쓰러져 자고 아침이면 다시 짐을 이고 지고 길을 나서는 거야.”   

구수하게 이어지는 엄마의 경동시장 추억담을 듣다보니 장날 떡 팔러 간 엄마를 기다리던 남매가 호랑이에 쫓겨 ‘해님달님’이 되었다는 전래동화가 떠오릅니다. 지금 어린 시절 추억담을 들려주던 친정엄마의 어린 시절 역시, 콩이며 팥이며 머리에 이고 서울로 돈 사러 간 엄마를 기다리던 잠 못 들던 밤들이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장사 열기에 영하 10도 추위도 무색하다
 장사 열기에 영하 10도 추위도 무색하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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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특히 나물이 좋아. 강원도에서 바로 오는 거라 맛도 좋고 값도 싸고. 제수에 쓸 나물 좀 사고, 더덕이랑, 곶감도 좀 사자. 날이 추우니까 조기도 좀 사서 찬바람에 꾸득 꾸득 말렸다 쓰면 좋고….”

최저 기온이 영하 10도라지만 시장 골목을 휩쓸고 지나는 바람의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도 넘는 듯 매섭습니다. 생선을 다듬어 주는 생선장사 할머니의 빨갛게 언 손이 눈에 들어옵니다. 찬바람 속에서 언 생선을 만지니 얼마나 추울까요.

“할머니 안 추우세요? 너무 춥지요?”
“춥지 왜 안 추워? 그래도 올 설 대목에 장사만 잘 되면 이깟 추위쯤은 문제없다. 나 여기서 장사 수십년 했거든. 옛날 추위에 비하면 지금은 추운 것도 아녀. 지금은 이렇게 칸막이라도 있지. 옛날엔 찬바람 맞으면서 길바닥에 앉아서도 했는데 뭘.”

할머니가 담아주시는 생선을 받아 들고 골목어귀를 돌아서니 코가 떨어져 나갈 듯한 칼바람이 불어옵니다.

현대화의 바람을 타고 지붕을 얹긴했지만 골목을 지나는 바람은 매섭기만 하다
 현대화의 바람을 타고 지붕을 얹긴했지만 골목을 지나는 바람은 매섭기만 하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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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추워~. 엄마 얼렁 가요. 추워 죽겠어요. 짐도 무겁고….”
“춥긴…. 쯧쯧. 이 추위에 장사하시는 할머니들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저렇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뭐 느끼는 거 없어? 그저 니들은 자가용 타고 따뜻한 백화점이나 찾아다니면서 돈 쓰는 재미만 알지? 이런데 와서 보고 배워야 해. 그래서 일부러 널 데려온 거야. 좀 보고 배우라고.”

시집살이 오십년차 친정엄마의 명절은 언제나 성지 순례하듯 시장 순례로 시작합니다. 엄마는 그때마다 저 시장 골목에서 댕기머리 소녀였던 열 살 어린 시절과 만나고, 녹의홍상 새댁 시절을 만나고 한창 열심히 살던 삼사십대를 만나고 먼저 가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시겠지요.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신 엄마는 전처럼 무거운 짐을 들 수도 오래 걸을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백화점이나 마트를 외면하고 재래시장만을 고집하시는 이유를 저도 이제는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수용품뿐 아니라 화려한 폐백음식도 마련되어 있다
▲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폐백음식 제수용품뿐 아니라 화려한 폐백음식도 마련되어 있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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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재래시장이 물건값이 백화점이나 마트보다 20~30% 이상 저렴하고 신선도가 높다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진솔한 사람들이 있고, 억척스런 삶이 있으며 그 무엇보다도 진한 인생이 있습니다.

아무리 커다란 대형마트가 생기고 으리 번쩍한 백화점이 들어서도 허름하고 소박한 재래시장이 사라지지 것은 물건과 함께 삶도 추억도 인생의 교훈까지도 함께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 재래시장이라서가 아닐까요.

설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 설은 우리 부모님의 젊은 시절 고단했지만 행복했었던 삶을 간직하고 있는 재래시장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물건과 함께 우리가 잊고 있던 소중한 추억까지도 장바구니에 담아 오신다면 그보다 더 알찬 설 준비가 없을 것입니다.


태그:#설, #재래시장, #경동시장, #제수용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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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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