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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년 전에 새긴 천문도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612년 전에 새긴 천문도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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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군사적으로 강대한 나라였을 뿐만이 아니라 우수한 천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동방과 서방의 쌍삼성, 남방의 남두육성, 북방의 북두칠성 등은 고구려식 천문방위 관념을 나타내는 별자리. 하늘의 28개 별자리는 방위별로 7개씩 나뉘어 청룡·백호·주작·현무로 형상화되었는데, 이 사신(四神)이 고분벽화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도 고구려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또 별자리를 표시함에 밝은 별은 크게 새겼고 어두워질수록 크기를 작게 새기는 것은 우리나라의 천문도에만 볼 수 있는 독창적인 기법이다.

이처럼 고구려의 천문기법은 독자적인 우주관을 가지고 있으며 당대의 하늘에 대한 관찰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그려진 천문도들은 모두 이 고구려 것을 토대로 약간의 수정만 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 조선 초기의 천문도들로는 태조 4년(1395년) 검은 석판에 새긴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 숙종 13년(1687)에 새긴 보물 제837호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 박연이 그린 '혼천도' 등이 있다. 하지만 이 천문도들은 한자로만 쓰인 탓에 한자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를 한글판으로 번역해 그린 천문도가 나와 화제다. 국제천문연맹 천문학사위원회 위원장인 연세대 나일성 명예교수가 한글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그려 일반에 공개한 것. 무려 25년의 삶을 바친 역작이다.

25년의 역작, 한글판 '천상열차분야지도'와 '혼천도'

나일성 교수가 한글로 번역한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
▲ 한글판 천상열차분야지도 나일성 교수가 한글로 번역한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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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성 교수가 복원한박연이 그린 혼천도. 가운데 분홍빛 동그라미는 적도이며, 노랑빛은 황도, 넓게 흰빛으로 보이는 부분은 은하수다.
▲ 박연 혼천도 나일성 교수가 복원한박연이 그린 혼천도. 가운데 분홍빛 동그라미는 적도이며, 노랑빛은 황도, 넓게 흰빛으로 보이는 부분은 은하수다.
ⓒ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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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글판 천문도에서 옛 천문용어와 별자리 이름은 음을 따랐고, 해설문은 의역하였다. 당시 제작에 참여한 관상감 학자들의 이름 뒤에는 한자표기를 넣어서 그 후손들이 알아볼 수 있게 했다.

나일성 교수는 "우리 겨레의 귀중한 과학문화 유물을 널리 알리려고 한글로 번역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에 같이 복원판을 낸 박연의 혼천도는 우리나라에 없고,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흔히 사람들이 박연을 종묘악을 완성한 음악가라고만 알고 있지만 사실은 뛰어난 천문학자이기도 했다.

처음에 나 교수는 이 혼천도를 직접 보지 못하고 가로세로 15㎝ 정도의 작은 흑백사진으로만 접했다. 이 작은 사진의 별들은 동그라미로 그려져 있었는데 검정빛과 회색으로 다른 것들이 있어서 별들에 분명히 색깔이 있다는 확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동경대학 천문대 교수의 도움으로 직접 확인해 보니, 실제로 이 혼천도는 5가지 색깔로 되어 있었다. 나 교수는 대충 사생을 해온 뒤 색깔을 칠하고, 다시 가서 잘못된 데가 없나 맞춰보면서 한글판 혼천도를 완성했다고 한다.

한글판 박연 혼천도는 가로세로 164㎝ 크기. 이 작품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소중한 천문도를 영원히 잊었을 지도 모른다.

왼쪽은 각석 탁본, 오른쪽은 나일성 교수의 복원판.
▲ 천상열차분야지도 왼쪽은 각석 탁본, 오른쪽은 나일성 교수의 복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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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별자리를 보면 위에 있는 랑성(狼星, 이리별)을 호성(弧星, 활별)이 활 모양으로 쏘는 모양새로 별자리를 그렸다. 아래는 우리나라는 서귀포에서만 보인다는 노인성이 보인다.
▲ 랑성을 활로 쏘는 호성 가운데 별자리를 보면 위에 있는 랑성(狼星, 이리별)을 호성(弧星, 활별)이 활 모양으로 쏘는 모양새로 별자리를 그렸다. 아래는 우리나라는 서귀포에서만 보인다는 노인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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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년 전의 천문도, 한글 입고 다시 태어나다

이번 나 교수가 이뤄낸 공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닳아버린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탁본 형식으로 종이에 그려낸 것. 천상열차분야지도는는 612년 전에 검은 석판에 새긴 천문도다.

이 천문도가 발견된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일제식민통치 이후 아무도 각석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는데, 당시 창경궁의 명정 전 추녀 밑에서 이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이 풀밭에 내팽개쳐져 사람들의 발길에 이리저리 차이고 있는 것을 전상운 성신여대 명예교수가 알아본 것.

자칫하면 귀중한 문화재가 그대로 사라질 수도 있었던 아찔한 일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나,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새긴 글씨와 별들을 잘 알아볼 수 없다.

또 탁본들이 여럿 남아있지만 완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잘 보존된 것도 일부는 파손되고 남아있는 부분도 글자를 정확하게 해독하기 어렵다. 나 교수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기존의 탁본을 원본으로 종이에 그리는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보물 제837호인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도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있지만 바탕이 흰 대리석이어서 글자와 별이 뚜렷하지 않다. 또 돌의 재질이 묽은 대리석이어서 만지면 표면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것이 목격되고 있다.

전시된 나 교수의 천문도를 보던 독일인 김 에델트루트씨는 "나는 천문학을 전공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며 극찬했다. (그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했는데 1975년 한국에 왔고 현재 한국문학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있으며, 오정희의 <새> 번역으로 대산번역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리저리 차이던 국보... "이게 중국에 하사받은 거라고?"

나 교수는 설명 도중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귀띔해준다.

"서양 천문도에서는 별자리에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이나 동물 이름을 붙였다. 그렇지만 우리 천문도는 왕궁을 중심으로 직제와 직위를 별자리 이름으로 했다. 재미있는 것은 뒷간이나 창고 이름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하늘을 천문도로 담아냈다고 했다. 하지만 왕궁의 직제와 직위, 심지어 뒷간과 창고 이름을 별자리에 쓴 것을 보면 사실은 옛 사람 자신들의 생각을 하늘에 그려 넣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일성 교수가 중국인 전문 화가에게 의뢰하여 강서대묘 현무도를 유화로 그렸다.
▲ 강서대묘 현무도 복원그림(유화) 나일성 교수가 중국인 전문 화가에게 의뢰하여 강서대묘 현무도를 유화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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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1910~1930년대 연희전문학교에서 근무했던 루퍼스란 미국학자는 1936년 출간한 <한국 천문학>이란 책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언급했다. 그는 "동양의 천문관이 집약된 섬세하고도 정확한 천문도"라고 격찬했지만 "조선의 천문도는 중국 황제가 하사한 것"이라는 엉뚱한 주장을 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나 교수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는 중국의 별자리와는 별의 연결, 별자리의 형태에 차이가 있다"며 "위치가 다르거나 목록에 없는 별자리도 있다, 특히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중국의 별자리 그림과는 달리 실제 밝기에 따라 그 크기가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고 반박했다.

또한 "중국에서 이 커다란 바위, 더구나 옛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천문도를 몇천 리나 떨어진 조선에 갖다 줬을 까닭이 없다"고 말한다.

독일인 김에델트루트씨는 나일성 교수가 번역한 천문도를 극찬했다.
 독일인 김에델트루트씨는 나일성 교수가 번역한 천문도를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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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판 혼천도 설명을 하는 나일성 교수(왼쪽)
 한글판 혼천도 설명을 하는 나일성 교수(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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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교수는 앞으로 연세대 중앙도서관에 있는 '건상열차분야지도'를 복원하고 한글 번역을 해야 필생의 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천문도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 노교수가 천문도를 우리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많이 고민하며 일생을 바쳤음을 알았다.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 안에는 엄청난 내공이 쌓였음을 알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에 실린 천문도의 사진들은 저작권 문제 때문에 일부만 잘랐습니다. 양해바랍니다.
※ 공동취재 김슬옹 목원대 겸임교수

이 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나일성 , #천상열차분야지도, #혼천도, #한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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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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