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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면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은 식당 앞에 있는 감나무 입니다
 백운면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은 식당 앞에 있는 감나무 입니다
ⓒ 희망제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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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희망제작소 부설 간판문화연구소와 파주시 그리고 홍익대학교가 협력하여 마련한 간판디자인학교를 통해 지난 20년간 간판 제작 현장에서 오직 생계를 위해 간판을 만들었던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이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도시환경에서 간판이라는 광고 매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것이 시민들에게 주는 시각적 영향력도 역시 대단합니다. 이에 정부와 시민단체 등이 새로운 질서와 방향을 모색하고 있으며, 간판제작업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 변화에 대처하는 노력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마을조사단 앞에 있는 연립 유도간판
 마을조사단 앞에 있는 연립 유도간판
ⓒ 희망제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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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간판이란 것이 간판 제작자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하는 광고주의 수준을 벗어나기도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여 단기간에 도시를 정비하는 여러 지자체의 모습을 보면서 또 하나의 전시 행정 또는 예산의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간판 개선사업이 비교적 성공리에 진행되었다는 전북 진안군 백운면 원촌마을을 답사하려는 간판별동대 꽁무니를 따라간 것은 어쩌면 참고서 뒤에 숨겨진 답을 미리 훔쳐보려는 속셈이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희망제작소 버스에서 내리자 처음 눈에 띈 지주형 연립간판입니다.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아래로는 개울이 흐르는 환경에 비해 조형성이나 소재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족한 예산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설명에는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색채가 튀지 않으면서 시인성이 좋았으며 그 크기가 적당하다는 느낌입니다.

대광철물점
 대광철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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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건강원
 희망건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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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촌마을 간판 개선사업 현장 답사를 마치고 가장 아쉬웠던 점은 바로 이 사진과 같은 방법으로 간판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있었습니다. 물론 간판의 색상이나 구성은 다소 익살스러움이 있으면서 주변과 어울려서 좋았지만 안전성을 고려하지 않고 시공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고 원촌마을의 이미지가 마치 영화 세트장을 연상케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양철 지붕 위의 간판과 주변 경관이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원촌마을에 위와 같은 간판이 설치되기 전에는 원색적인 색채와 딱딱하고 굵은 고딕형 서체의 간판이 대다수였다는 설명을 듣고 보면 이 정도의 결과도 대단한 것이었다는 말이 수긍이 갑니다.

전깃줄에 수세미 넝쿨이 뻗어 오르고 수세미 하나 열려 있는 지붕 위 풍경이 정감 있습니다. 흑염소와 호박넝쿨의 이미지가 무겁지 않게 서있는 모습이 한가롭고 차라리 익살스럽습니다. 원촌마을의 간판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백운기름집
 백운기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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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판을 보는 눈은 제각각입니다. 이 마을을 답사하기 전에 이 간판은 간판이 아니라 환경을 어지럽히는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이 간판은 설치한 주인의 심성이 고스란히 엿보입니다. 간판을 지붕 위로 올려 달지 않고 처마 밑에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있는 모습이나 제법 고딕체를 흉내내어 칼질한 창문글씨가 정겹습니다. 저 간판을 달고 마을 사람들에게 참기름, 들기름, 콩기름 등을 짜주며 살아온 주인의 오늘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동행하신 간판문화연구소 최범 교수님은 저것이 문화재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합니다.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마을조사단 앞 백운약방 간판
 마을조사단 앞 백운약방 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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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깊어가는 오후 자홍색 홍시 익어가는 원촌마을에 들어서니 눈 멀리 산등성 흰구름 가볍습니다. 흐르는 물에 삽을 씻는 농부에게 간판이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만 하늘과 땅이 맛닿아 있는 지붕위에 아니 일러도 흰구름이 있건만 흰구름을 써 놓으니 그 글꼴이 순하고 주인의 인심 또한 그러하리라 짐작이 되니 웃음이 절로 납니다."

...원촌마을 흰구름 간판의 정취에 흠뻑 젖어 이와 같은 어수룩한 운율도 지어봅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을 우리네 삶의 방편으로 여기며 살아온 우리 조상의 지혜가 필요한 시대에 이와 같은 간판은 제격이라고 여겨집니다.

계남정미소 스위치
 계남정미소 스위치
ⓒ 희망제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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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탐방한 계남정미소(공동체박물관)에는 이발소간판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정미소 구석구석에는 지나간 시간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저 내려진 스위치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이 원촌마을에 간판을 새로 달고 제법 외지 손님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는 것이 원주민인 노인들에게 반가운 일일지 아니면 귀찮은 일일지 알 수 없지만 제아무리 간판을 멋지게 달아도 마을에 사람이 줄어드는 현실을 어쩌지 못한다면 이 내려진 스위치처럼 마을은 황량하게 시들어갈 것입니다. 이 스위치가 고개를 들고 힘차게 쌀을 찧는 제구실을 하는 때가 올지도 모를 거라는 가물거리는 기대가 있어서 원촌마을 노인들은 간판을 바꾸어달도록 허락했을지 모릅니다.

원색적이고 커다란 간판을 내리고 편안한 색채와 순한 글꼴의 간판으로 마을 모습을 변화시킨 것은 성공이라고 봅니다. 도시 간판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할지 연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 사업을 주도하신 관계자와 주민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태그:#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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