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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23일 오후 담화를 통해 이라크 주둔 자이툰부대의 파병 연장을 국회에 공식 요청했다. 정부는 파병 연장을 결정하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다고 밝혔다.

 

북핵 해결과 북미관계 개선, 그리고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이 논의 중인데, 이러한 논의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한미간의 긴밀한 공조가 절실"하고 이에 따라 파병 연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노 대통령은 "북핵문제가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비화될 수 있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한미공조의 유지가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파병 연장을 하지 않아 한미공조에 문제가 생기면, 북핵 문제가 다시 악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마땅한 구실을 찾기 힘들자, 거의 국민과 국회를 협박하는 수준까지 다다른 것이다.

 

이라크 자이툰 부대 파병... 정부 스스로 만든 '조공형 파병'

 

우선 이러한 담화 내용을 보고 우리의 안전을 위해 남(이라크)의 불행을 이용하려는 정부의 태도에 깊은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이나 9·11 테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석유를 위한 전쟁'이자,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패권주의 전쟁'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이러한 불법적이고도 위험천만한 전쟁을 지지하고 대규모의 파병까지 한 데 이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또 다시 파병 연장을 시도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구실을 달고 말이다. 과연 정부의 이런 태도가 국제사회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비춰지게 만드는지 걱정이 드는 것은 결코 필자만의 기우는 아닐 것이다. 

 

또한 정부가 마치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이 한국의 파병 덕분인 것처럼 여론을 오도하고, 파병 연장이 안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처럼 말하는 것 역시 큰 문제가 있다. 한국의 파병과 미국의 대북정책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는 것은 이미 지난 4년간의 경험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오히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수렁에 빠진 것이 대북정책을 바꾼 가장 중대한 요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에 힘입어 6자회담이 순항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노무현 정부의 '조공형 파병'에 보답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달성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대북정책을 바꾼 것이다.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부시 행정부가 북핵 해결이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계속 유지하는 한, 한국의 파병과 상관없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등한 한미관계' 강조하던 노무현 정부의 참얼굴은?

 

노 대통령의 이번 담화를 보면, 임기 내내 강조했던 '대등한 한미관계'가 얼마나 공허한 정치적 수사였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북핵 해결을 미국이 한국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인냥 말하고, '파병'이라는 조공을 통해 부시 행정부의 환심을 사겠다는 것만큼이나 사대주의적 발상을 찾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자이툰부대의 평화와 재건 활동은 우리의 에너지 공급원인 중동지역의 정세 안정에도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 역시 '눈 가리고 아옹하는 격'이다. 중동 정세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고 이에 따라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는 소식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파병 연장 구실을 찾기 힘들어 한 정부의 노고(?)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미국의 다수 여론과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중동 정세와 유가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국이 군사점령 정책의 종식과 정치외교적인 해법 모색에 있다. 한국이 미국의 진정한 우방이자 동맹국이라면, 미국이 잘못된 길로 계속 가지 않도록 설득하고 교정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노무현 정부가 이러한 용기를 보여줄 자신이 없었다면, 국민과의 약속을 강조하면서 파병 연장 불가 이유를 미국에게 설명했어야 했다. 그게 중간이라도 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핵 해결이 미국이 한국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인식은 이러한 중도적 선택마저도 스스로 내던지게 만들었다.

 

 

'우리 안의 미국주의'에서 깨어나야

 

정부와 보수언론의 협박성 홍보가 주효한 탓인지, 한국이 파병 영장을 하지 않으면 한미관계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여전히 팽배하다. 그러나 필자가 미국 워싱턴에 있었던 지난 1년동안(2006년 9월-2007년 9월), '우리 안의 미국'과 '실제로 존재하는 미국'은 다르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파병과 그 연장 여부는 미국의 큰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동맹국들의 전례를 보더라도 '자이툰 철군=한미동맹 균열'은 근거없는 공포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 프랑스, 캐나다 등 미국의 핵심적인 동맹국들은 파병은 고사하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 자체를 반대했다. 그런데 이들 나라와 미국과의 관계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는 않았다. 경제적으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한국보다 훨씬 높은 멕시코 역시 반전(反戰) 대열의 선두에 있었지만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불이익은 없었다.

 

하다 못해 '아시아의 부시 푸들'이라는 오명까지 얻었던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임기가 끝나기 전에 자위대를 철수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미일동맹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숭미(崇美)든, 공미(恐美)든 이제 '우리 안의 미국주의'에서 깨어나라는 것이 아닐까?


태그:#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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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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