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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까지 마쳤으면 한다. 다음주 월요일 아침엔 뉴욕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5개 실무그룹이 모두 가동돼 준비를 해온 만큼 토요일이나 일요일까지 (합의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되는 6자회담에 참석하고 있는 미국측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 국무차관보가 26일 저녁 베이징에 도착한 직후 한 말이다. 처음엔 의례적으로 회담에 임하는 의욕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힐 차관보의 '서두르는' 모습이 두드러지고 있다.

 

힐 차관보는 27일 개회식을 겸한 1시간 정도의 전체회의와 중국 주최 만찬이 끝난 뒤 호텔로 돌아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내일 아침에 위원회를 구성해서 합의문 초안을 작성, 오전 중에 회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대표단의 한 관계자는 28일 "초안을 회람하려면 의장국인 중국이 해야 하는데 중국이 오늘 하겠다는 얘기를 한번도 한 적이 없다"며 사실상 힐 차관보의 말을 부정했다.

 

상식적으로도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초안'부터 만들겠다는 그의 계획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이번 6자회담은 28일 북한 핵시설 불능화와 핵프로그램 목록 신고 등 '비핵화' 방안, 29일 이의 상응조치로 북한에 제공할 경제-에너지 지원 문제에 대한 논의가 예정돼 있어 합의문 초안은 빨라도 29일 오후에나 회람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한-미, '불능화 방법' 합의 수준 설명에 차이 

 

힐 차관보의 서두르는 모습은 주요 쟁점들에 대한 설명에서도 지나친 '낙관론'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핵시설 불능화 방법과 관련 27일 저녁 "기본적인 점에서는 북한과 거의 대부분 합의되어 있다"고 말했으나, 한국대표단이 전하는 상황은 이와 사뭇 다르다.

 

천영우 수석대표는 27일 저녁 브리핑에서 "북한이 하겠다고 하는 '불능화'와 '신고'의 수준은 여타 참가국들이 기대하는 수준과 여전히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당국자는 "우리는 '불능화'를 더 빨리, 많이 하기를 원하고 북한은 가급적 늦게, 적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라며 "이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 이번 회담의 과제"라고 설명했다.

 

힐 차관보는 28일 아침 기자들과 만나서는 "내가 어제 한 말은 영변에 기술팀이 방문했을 때 기술팀과 합의했다는 것"이라며 "6자회담에 보고하고 논의를 더 해야 한다"고 한발 물러서는듯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불능화 방법과 관련해서도 "우리는 더 원하고, 북한은 덜 원하고 있다"며 한국대표단과 같은 맥락의 설명으로 바뀌었다.

 

힐 차관보는 합의문 초안 회람문제에 대해서도 "중국이 오늘 돌리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던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문제는 이런 '서두는' 모습이 협상의 입지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 한 뼘의 국익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국가간 협상에서 먼저 '초조한' 모습을 보이는 쪽이 불리한 입장에 놓일 것은 뻔한 이치다.

 

북한 "미국이 대북적대시 정책 어떻게 바꾸려는지 종합 판단해 결정"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다. 북한 대표단의 분위기는 이렇게 합의를 서두르고 있는 힐 차관보의 '희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측 회담소식통은 28일 오전 기자와의 통화에서 "우리는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어떻게 바꾸려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이번 회담의 합의에 임하게 될 것"이라며 '느긋한' 자세를 보였다.

 

이 소식통은 최근 미국에서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 '북한-시리아 핵 거래설'과 조지 부시 대통령의 '야만정권' 발언 등을 상기시키면서 "이는 힐 차관보의 해명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핵시설 불능화와 목록신고 등 비핵화에 대한 기술적 방법론의 합의에 앞서 관계정상화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의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북한측 입장을 대변해온 재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도 27일 인터넷판 해설기사에서 "미국이 조선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스스로 바꾸지 않아도 그 무슨 대가를 주기만 하면 조선의 핵 포기를 달성할 수 있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면 9·19 공동성명 이행의 2단계는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내 강경파들 다시 준동, 힐 차관보 초조해졌나? 

 

이 같은 분위기와 과거의 전례로 볼 때 이번 회담이 힐 차관보의 기대대로 끝까지 순항할지는 아직 예단할 수 없다. 북한이 요구해온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와 대 적성국교역법 적용 배제 문제 등을 놓고 회담 중반에 파란이 일 가능성도 적지 않아 보인다.

 

이번 회담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10월2~4일) 직전에 열리고 있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 합의가 이뤄지느냐가 큰 관심이다. 한국대표단은 가급적 정상회담 전 합의문 발표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일정이 연장돼 정상회담과 동시에 진행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시사하고 있다.   

 

시간에 쫓기는 모습을 보일 경우 북한측의 협상전술에 말려들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힐 차관보의 서두르는 모습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북한-시리아 핵 커넥션' 의혹 제기 등 미국에서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다시 고개를 드는 조짐을 보이면서 힐 차관보가 초조해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회담장 주변에서는 돌고있다.    


태그:#6자회담, #남북정상회담, #힐, #조선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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