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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금성 가는 길. 회나무의 녹음이 푸르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자금성 가는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오전의 산업단지 시찰에서 우리를 태운 버스가 시간을 많이 소비했기 때문이다. 북경은 올림픽을 앞두고 시내와 시 외곽 할 것 없이 공사 중인 도로가 너무 많다. 이 때문에 공사 중인 도로를 여러 번 우회해서 돌아 나와야 했다.

자금성 입장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우리 일행의 안내인과 버스 기사가 애 달아 하며 서두르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우리 버스는 자금성 관광시 사람들이 많이 입장하는 천안문(天安門) 부근을 지나쳤다. 자금성 남쪽에 내리면 자금성 내부에 입장하기까지 더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자금성 입장 마감시간 10분 전, 우리 일행은 자금성 북쪽의 신무문(神武門) 앞에서 황급히 내렸다. 정차 금지 구역에 불법 정차를 한 우리 버스는 황급히 자금성 남쪽으로 달아났다. 불법정차 단속이 심한 이 곳에서, 다행히 교통경찰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신무문 북쪽에는 지금의 북해(베이하이, 北海)를 판 흙을 쌓아 만든 징산공원(경산공원 景山公園)이 자금성을 내려 보고 있었다. 자금성 성벽 둘레에는 외적으로부터 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해자에 물이 출렁거리고 있다.

자금성(紫禁城)은 북두성(北斗星) 북쪽의 천자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1407년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가 북경으로 수도를 천도한 1406년부터 백만 명이 넘는 백성을 동원하여 건립을 시작해 1420년에 완성하였다. 이 자금성은 그 후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쳐 무려 5세기 동안 24명의 황제가 살면서 중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도 이 성은 당시 제국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박물관이 된 이 궁궐은 과거에 800채의 건물이 가득 들어차 있던, 하늘 아래 최대의 집이었다. 우리 일행은 자금성 북문인 신무문을 통해 9m에 이르는 성벽을 통과했다. 과거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이 궁궐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물밀듯이 들어가고 있다. 이 큰 궁궐을 짧은 시간 내에 완벽하게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좌우대칭인 성의 중심 건물을 따라 남북 961m의 거대한 길을 종단하려고 한다.

기이하게 생긴 태호석을 이용하여 만든 인공산이다.
▲ 퇴수산 기이하게 생긴 태호석을 이용하여 만든 인공산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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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금성의 북문으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자금성 내정 뒤의 어화원(御花園)을 먼저 만났다. 어화원의 정원 배치도 일사불란하게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바위 무더기들을 인공적으로 모아 만든 언덕 두이슈산(퇴수산,堆秀山) 위에 어경정(御景亭)이라는 정자가 자리를 잡고 있다. 기이하게 생긴 태호석을 이용하여 만든 산인데, 너무 인공의 흔적이 역력해서 그리 큰 감흥은 주지 못한다.

하지만 어화원은 자금성 내의 유일한 녹지이기 때문에 강렬한 햇볕을 피할 곳이 있어서 좋다. 나는 여행 안내인의 설명을 듣는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잠시 정원의 연못과 수석을 감상해 보았다. 수 십 그루에 달하는 측백나무가 가지를 꼬아가며 하늘로 올라간 모습이 기묘하다.

중국 역사여행의 일번지답게 이곳 자금성은 수많은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특히 빨간 깃발을 앞세운 중국 단체 관광객들이 쉴 틈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요즘은 중국인들도 소득 수준이 높아져서 중국 내지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이 자금성은 중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다. 자금성 같이 세계에서 가장 큰 궁궐이 아니라면 이 많은 관광객들을 수용하지도 못할 것 같다.

황후가 잠을 자던 침궁이다.
▲ 곤녕궁 황후가 잠을 자던 침궁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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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원을 나오니 자금성의 내정(內廷)이고, 명대 이후 황후의 침궁이었던 곤녕궁(쿤닝꿍,坤寧宮)이 나온다. 곤녕궁은 이름 그대로 땅이 평안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품고 있다. 그러나 건물 안에 살던 여인들의 삶은 이 건물의 이름과는 전혀 딴 판이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농민군이 북경의 외성을 점령하고 자금성에 침입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이에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는 자신의 자살 하루 전에 황후와 후비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명령했다. 몸을 피할 곳도 없던 명나라 마지막 황후, 주씨는 이곳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참 못난 황제였다. 자신을 의지해 살던 여인들에게 죽을 것을 명하고 산 위에 올라가 목을 매어 자살했으니 말이다. 자신의 여인들이 피신할 시간도 있었을 것인데, 숭정제는 자신의 자식들만을 피신시켰다. 한 남자에 의지해 살던 여인들은 그 남자의 권세가 사라지자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농민 반란군을 이끌던 이자성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와 황후에 대한 예를 최대한 갖춰 장례를 치러 주었다. 반란군이 타도하려던 황제와 황후에게 예를 갖춘 것은 농민반란군도 예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치적 제스처이거나, 저항하지 못하고 자결한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자금성을 점령한 청나라는 곤녕궁을 청나라 황제의 혼례식장으로 이용하였다. 전 왕조의 마지막 황후가 자살을 한 곳에서 새로운 왕조가 계속 혼례식을 올렸던 것이다. 만약 명나라 황후 주씨의 혼령이 곤령궁에서 이 혼례식을 계속 지켜봐야 했다면 얼마나 괴로웠을까?

황후의 집무실이자 황제와 황후의 음양이 조화하는 곳이었다.
▲ 교태전 황후의 집무실이자 황제와 황후의 음양이 조화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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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의 침실인 곤녕궁과 황제의 침실인 건청궁 사이에 교태전(쟈오타이디엔, 交泰殿)이 있다. '태(泰)'는 주역의 8괘중 음양의 조화를 뜻하는 글자이다. 서울 경복궁에 있는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과 이름이 동일하다. 조선은 궁궐 전각의 이름까지 명나라 자금성의 것을 차용했으니, 이만한 사대주의도 없다.

교태전 내부 편액의 '무위(無爲)'라는 글씨는 청나라의 강력한 군주였던 강희제(康熙帝)의 친필이다. 인간 사회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강제로 막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사회가 스스로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황제가 이만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당시 청나라가 부국강병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후가 자는 방 안에서 '무위'가 이루어졌을 리는 만무하다.

이 황후의 침전에 한 번씩 들르는 남자가 있었다. 그 황제는 택일을 받아 아기를 생산하기 좋은 길일에만 이 황후의 방에 와서 합방을 하였다. 이 교태전에서의 섹스는 대를 잇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던 섹스였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황제도 자신의 성욕에 따라 황후에게 성은을 베풀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중국 현지 관광객들의 어깨 너머로 교태전 내부를 겨우 살펴볼 수 있었다. 이 교태전 내부는 황후의 공식 집무실이기도 하였다. 황후가 주관하는 행사들이 이 교태전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황제가 업무를 수행하던 외조의 중화전과 같이 한 가운데에 황후의 보좌가 놓여있고, 건물 외부의 모습도 중화전과 같이 정사각형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다.

황제의 집무실이자 황제가 주관하는 많은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 건청궁 황제의 집무실이자 황제가 주관하는 많은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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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태전을 돌아 나오니 자금성 내정(內廷)의 내삼전 중 가장 큰 기와건물이 자금성의 중심축 선상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건축물이 이렇게 거대한 것은 이곳이 황제가 잠을 자던 건청궁(乾淸宮)이기 때문이다. 이 건천궁은 황제의 집무실 겸 외국사신 접견장소 뿐만 아니라 황실의 연회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나는 홀로 건청궁의 사진을 찍다가 여행 동료들이 안내인의 설명을 듣는 곳으로 돌아왔다. 안내인은 건청궁 내부의 편액에 적힌 '정대광명(正大光明)'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청나라 황제들은 이 편액 뒤에 황위 계승자들의 이름을 숨겨 놓았다고 한다. 공식으로 황위 계승자를 적은 서류 외에도 이 편액 뒤에 그 이름을 숨겨 놓아 황위를 놓고 일어날 분쟁을 막았던 것이다.

중국의 중심에 자리한 궁궐, 자금성에는 이렇게 불신의 역사가 녹아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건축물의 규모에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지만, 이 안에는 황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온갖 권무술수와 여인들의 암투 그리고 역사적 패자의 죽음이 녹아 있다.

사람이 살지 않은 거대한 집의 건물 내부는 휑하기만 하다. 자금성 안에서 천하를 호령하며 불신의 역사 속에 살던 그 사람들은 이제 현세를 떠나고 없다. 황제와 황후가 잠을 자고 정사를 논하던 거대한 기와 건축물들만이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받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자금성, #어화원, #곤녕궁, #교태전, #건청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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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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