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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사무실에서 기사를 작성하는 중...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 차예지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맺다

정말 '우발적인' 지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기자를 꿈꿔본 적이 없었던 내게 <오마이뉴스> 인턴기자 모집 공고는 큰 끌림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겠어?'란 생각에 애써 외면했지만 주변의 격려로 한 번 지원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오마이뉴스의 문을 두드렸다.

생전 어디 내본 적도 없는 자기소개서를 쓰고 취재기획이란 것을 만들었다. 부담 없이 지원한 터라 면접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정말 운 좋게 면접을 보게 된 후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고 그 열패감과 당혹스러움으로 방바닥을 굴렀다.

첫날 오마이뉴스 사무실에 한데 모인 12명의 6기 인턴 기자들. 정말 한 명 한 명 여간내기가 아닌 듯싶다. 그중에는 얼굴보다 기사로 친숙한 사람도 두어 명 있었다. 내가 여기 어떻게 뽑힌 것일까? 뭘 보고 나를 뽑았을까? 이 궁금증은 2주간의 교육이 끝난 후 면담을 통해 알게 되었다. "너는 시민기자 경력도 있고 해서 좋은 점수를 받았는데… 자기소개서가 많이 부족했다."

동기 중에 나보다 기사를 잘 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훨씬 많이 쓴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었던 점은 12명의 인턴 중에서 오마이뉴스와 가장 오래된 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2000년 초겨울, 동네 아이들이 횡단보도 옆에 설치된 교통신호 제어기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기사로 올린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렇게 쓴 기사가 사회면 톱에 오르자 신기하고 기쁜 마음이 가득했는데 틈날 때마다 기사를 써서 생나무가 되기도 하고 잉걸이 되기도 하는 것을 지켜보니 글쓰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 모 언론사 기자와 이야기를 하던 중 "OO일보 정도 들어오려면 SKY(서울, 고려, 연세대)는 돼야지. 여자는 이화여대 정도? 한양대나 성균관대만 돼도 괜찮고"란 말에 기자의 꿈을 접고 말았다. 그때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서울 안의 한 대학에 합격한 상태였지만 수능 점수로 따지자면 소위 명문이라는 학교에 많이 모자랐다. 학벌이 신분을 좌우한다는 그리 놀랄 것도 없는 말에 너무나 쉽게 체념한 것이다.

기자의 세계에 발을 담그다

다른 언론사 인턴들은 선배 기자들과 함께 현장을 누빈다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리는데 우리는 좁은 회의실에서 각종 기사의 제목과 부제 그리고 리드를 찾아내고 있다. 물론 유익한 교육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현장에서 취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교육 받는 시간이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교육 초기에 '네가 여태 가지고 있던 것을 비운 만큼 새로운 것을 채울 것이다'란 말을 듣는 순간 이것은 '내 이야기구나' 싶었다. 이걸 해내지 못하면 힘든 생활이 될 것이라 했는데 그 말은 내게 예언이 되어 다가왔다.

취재기획을 할 때는 알량한 틀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고, 현장에 나가 취재를 해도 조금씩 초점이 어긋나서 돌아와 기사를 쓰려면 재료가 부족하고, 완벽한 재료가 있어도 글쓰기가 부족해 글이 엉망이 되어 혼나기 일쑤였다. 정말 미치고 팔짝팔짝 뛸 노릇이었다.

군대에서 독하다 못해 징그러운 놈이란 소리를 들으며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었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며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놈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나도 다른 동기들처럼 좋은 기획 내고 기사도 잘 쓰고 싶은데 마음과 손가락이 따로 놀았다. 흡사 ABS 없는 차의 핸들이 잠긴 것처럼 내 머리도 그렇게 잠겨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불쑥 찾아들었다. 하지만 현장의 감동을 느끼고 그 감동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기자의 매력이 날 붙잡았다.

▲ 인턴 생활 중 가장 잘 찍었다고 자부(?)하는 사진. 앞으로도 바른 세상을 보는 창이 되고 싶다.
ⓒ 박상익

현장의 뜨거움에 가슴을 데다

이번 인턴 생활을 했던 6주 동안 정말 굵직한 사건들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시사저널 사태부터 이랜드 파업, 아프가니스탄 피랍까지. 현장을 함께 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기자로서 현장을 중계한다는 긴장과 함께 그 자리에 힘을 보탠다는 생각으로 현장에 들어섰다. 기자는 항상 냉정하게 현장의 한 발 뒤에서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데 여기서부터 나는 결격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편집권을 지키려다 결국 회사와의 결별을 택한 시사저널 기자들이 길 위에 눈물을 뿌리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대 자본에 맞서 싸우다 개처럼 끌려나갈 때 아무런 힘도 보탤 수 없다는 것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 사실이었기에 전달하는 자와 연대하는 자의 어중간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런 굵직한 사건들 사이에서 기억나는 일들이 있다. 이랜드 문제가 한창일 때 한 건의 보도자료가 건네졌다. 타워크레인 노동자들이 전국에서 점거 농성을 벌였다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마포로 신촌으로 대림으로 그날은 왜 그리도 날이 뜨겁던지… 곳곳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고충을 토로했다.

하루종일 고공에서 쉬지도 못해 방광염에 걸린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펌프카 기사를 했던 작은아버지가 생각났다. 특수고용직, 현장계약직, 파견근로 등 건설현장은 비정규직의 백화점이라던 건설노조 간부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기사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여러모로 민폐만 끼치고 내게도 그 무엇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이날 이후로 담배가 부쩍 늘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피랍자 가족들이 모여 있던 한민족복지재단에서 여러 상근기자들과 이야기하며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 함께 현장을 지키며 명함도 교환하니 정말 내가 기자가 된 것 같아 으쓱한 기분도 들고 세상의 누구보다 가장 빨리 소식을 알고 있다는 것이 나를 들뜨게 했다.

▲ 피랍자가족 대표 차성민씨의 브리핑을 녹음했다(가장 오른쪽) 저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사수'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오마이뉴스 인턴은...

많이 비운 만큼 많이 채울 수 있다는 말. 맞는 말이었지만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대가는 6주 동안 호되게 치렀다. 다른 동기들은 쭉쭉 뻗어나가는데 나는 6주가 끝나고 나서야 이제 제대로 된 출발선에 선 자격을 얻었을까. 아직도 내 안의 아집과 겉멋을 완전히 비우지 못했다. 하지만 비우는 방법을 터득했기에 앞으로는 조금 더 편안하고 바른 마음으로 세상을 배울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오마이뉴스 인턴은 세상을 바르게 보는 프레임이다.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사고의 틀이라는 프레임을 바르게 잡아주는 거푸집이다. 기사를 쓰는 지금, 내 옆에는 YTN이 쉴새 없이 뉴스를 토해내고 있고 책상엔 시사주간지와 일간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과거에는 무슨 일이 있는지 대충 수박 겉핥기식으로 훑었다면 이제는 이 신문이 어떤 사건을 어떻게 풀어냈는가까지 살펴보게 된다. 이는 오마이뉴스가 아니었다면 생각도 못했을 일이다. 언론과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의 혁명. 그 틀을 만들어 준 곳이 오마이뉴스다. 이제 그 틀 안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나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못난 헛똑똑이를 여기까지 데려와 준 6기 인턴 11명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다. 길을 가는 세 명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던가. 6주 동안 만났던 모든 이들이 나의 선생님이었다. 비록 불성실한 제자지만 앞으로도 세상을 느끼는 배움은 멈추고 싶지 않다. 이 소중한 인연이 언제까지나 이어졌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박상익 기자는 오마이뉴스 6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오마이뉴스,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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