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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한-베 평화캠프'가 지난 7월 5일부터 12박 13일 동안 진행됐다. 이 평화캠프는 한국과 베트남 청년들이 베트남 중부의 시골 마을에 들어가 함께 일하고, 함께 자면서 양국의 어두웠던 과거를 돌아보며 진정한 평화를 향한 실천을 모색하는 자리다. 다음 기사는 한-베 평화캠프를 마무리하며 기획취재단 김효성 기자가 베트남에서 보내온 세번째 글이다. <편집자주>
▲ 소리없이 죽어간 영혼들을 위해 향을 사르는 모습
ⓒ 굳윌 레탄동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울고 있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이라야 고작 보름 남짓. 그런데 어찌 이리도 슬플 수 있을까? 2시간 앞으로 다가온 헤어짐. 우리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12박13일동안 진행되었던 2007 한-베 평화캠프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한국친구들은 2시간 뒤 비행기를 타고 정든 베트남을 떠나야 하는 상황. 마지막으로 준비한 송별회에서 친남매처럼 가까워진 두 사람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베트남 참가자인 리(22·호치민 인문사회대학교 한국학과 3학년)와 한국 참가자인 김명진(18)씨.

명진이는 출발 전부터 고민이 많던 친구였다. 평소 말을 꺼리는 성격이었던 탓이다. 그런 명진이가 캠프에서 리를 만난 후 수다쟁이로 바뀌었다. 유독 리에게 자신의 고민을 쏟아낸 것이다. 친누나처럼 명진이의 말을 멋지게 받아주는 리의 모습. 나라와 언어는 달랐지만 그들만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는 친구도 없었다.

"원래 제가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해서 말이 별로 없었는데, 베트남 친구들을 만나서 말이 많아져서 행복했어요."

무엇이 두 사람을 이리도 가깝게 하고, 명진이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학살지 80여곳 답사...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 삽 하나 꽂아 넣는 일도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정성만은 가득했다.
ⓒ 굳윌 레탄동
두 나라 청년들은 12박13일동안 '평화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로 한국군 민간인 학살지역을 방문했다. 중부 꽝남성의 유이탄 마을에서는 위령비로 가는 길을 만들고, 고엽제 피해자 가족의 집짓기에 일손을 보탰다. 그 외에도 호치민 전쟁 박물관, 꽝응아이의 선미학살(미라이학살)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전쟁과 민간인 학살은 더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임을 깨달았다.

7월 16일 호치민 외곽의 한 전통 가옥에서 참가자들은 캠프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민간인 학살을 오랫동안 다뤄오신 구수정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12박13일간의 캠프를 총괄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먼저 구수정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제가 처음에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 접한 것은 베트남 정치국에서 1980년대에 작성한 '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라는 문서를 본 것입니다. 내용이 너무 끔찍해서 제가 직접 위령비를 보고, 학살 현장을 찾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당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기 위해 베트남을 방문했던 '나와우리' 활동가들과 만나 조사를 시작했어요. 나와우리에서 먼저 답사를 떠났지요. 그런데 어느날 전화가 와서 '언니, 이거 진짜야'라는 말을 들었답니다. 그 후 저는 80여곳의 민간인 학살 지역을 방문했고, 수치로는 9000여명이 희생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숫자에 참가자들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45일 동안 중부 지방의 학살 지역을 방문했어요. 제가 1975년 종전 이후, 처음으로 그 마을들을 방문한 한국인이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저는 자기 가족 중에 누가 죽었으며, 어떻게 죽었는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에요. 하루에 마을 세 곳을 들어갔는데, 열흘 정도 돌아다녔더니 저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

▲ 올해 캠프는 참가자들이 서로 평화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부족했다고 아쉬워했다.
ⓒ 굳윌 레탄동
구수정 선생님은 99년부터 <한겨레21>을 통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세상에 알렸다. 취재과정에서 겪었던 일들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들었음이 분명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서 제가 인삼차를 한 포씩 드렸는데, 별로 품질이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이 인삼차를 어떻게 쓰냐면, 허리가 아프면 허리에 붙이고 머리가 아프면 머리에 붙이는 거예요. 그러면서 만병통치약처럼 모든 병이 싹 나았다고 했습니다."

옹기종기 앉아있는 참가자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그래서 나중에 좀 더 품질좋은 인삼차를 드렸답니다. 당연히 더 좋아하시겠지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에 갔을 때, 그 인삼차를 도로 주시는 거예요. 예전 것만 못하다 하시면서 말에요. 그래서 저는 알게 되었지요. 처음 마을에 들어갔을 때, 이 사람들이 나에게 이야기하면서 30년간 담아두던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졌구나. 그래서 질 안 좋은 인삼차도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구나 하고 말에요. 결국은 이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생존자 할머니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일입니다."

참가자들의 머릿속에 마을 사람들과 울고 웃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또한 생존자 할머니를 만나 뵙고 이야기를 들었던 일들도 스쳐갔다. 이 모든 일들이 뜻깊은 일이 되었다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해진다.

'슬픔'과 '책임' 넘어 '교류'로 이어가고 싶어

구수정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고, 캠프에 대해서 32명 모두가 각자의 생각을 밝혀나가기 시작했다. 오현욱(25·동국대 한의학과 3학년)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3가지 단어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첫번째는 '슬픔'입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얼굴은 우리와는 달리 대부분 밝고 표정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냈던 유이탄 마을 사람들에게서 그런 밝은 모습 이면에 있는 슬픔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책임'입니다. 캠프가 끝나서 조금 후련하기도 하지만, 느끼고 알게 된 만큼 한국에 가서 무언가를 실천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세 번째는 '교류'입니다. 한국 친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 친구들과도 많이 친해졌습니다. 언어의 벽 때문에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인터넷 등 다른 수단으로 계속 소통하고 싶습니다."

캠프 기간 내내, 참가자들의 건강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열성적이었던 오현욱씨였다. 감기 몸살에 걸려 앓아누운 친구들을 보살피고 약을 주는 일도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날도 감기 몸살에 걸린 기자를 보고, 멀리까지 나가서 약을 가지고 온 천상 한의사였다.

▲ 두 나라 청년들이 함께 흘린 땀방울만큼 값진 것이 있을까?
ⓒ 굳윌 레탄동
보통 한국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환경에서 자란 친구의 생각은 어떨까? 미국 국적인 김성균(17)씨는 현재 한국에서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다. 게다가 캠프 참가자 중에 가장 나이가 어렸다.

"외국에 간다면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를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여기 와보니까 내 생각이 틀린 걸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같이 우리보다 더 잘 사는 나라로 가면 게을러지는데 이렇게 베트남에서도 유이탄 같은 시골에 있다 보니까 하루하루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간인 학살을 얘기하자면, 교과서에 나온 것처럼 한국은 늘 강대국에 당하기만 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베트남에 와서 보니 그것과는 굉장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번 평화캠프가 나중에 커서 큰 경험과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성균이는 단체 생활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으니, 단체 생활의 경험이 보통 한국 친구보다 적음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유이탄 마을에서 같은 집에 묵었던 사람들은 성균이의 지나치게 개인적인 모습에 조금 화가 나기도 했었다고 한다. 유이탄 마을에서 나올 때, 오현욱씨는 이렇게 말했었다.

"처음에는 성균이의 까다로운 행동에 많이 화가 났었습니다. 하지만 마을에서 지내는 시간동안 많이 발전해 나가는 모습에, 이를 치켜본 형, 누나들의 마음을 뿌듯하게 했어요."

마음의 장벽 넘어 더 많은 소통 이뤄지길...

▲ 2007 한-베 평화캠프는 베트남 주요 일간지 '뚜오이쩨'에 실리는 등 현지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사진은 현지 기자와 인터뷰하는 모습
ⓒ 굳윌 레탄동
베트남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나라다. 그래서 북부와 남부의 문화적 기질이 상당히 다르다. 게다가, 통일 전에는 두 나라로 싸운 경험이 있었기에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하다. 그렇다면 북부 지방에서 온 친구의 의견을 어떨까? 멀리 하노이에서 온 응우옌 지엠 흐엉(22·하노이외국어대학교 한국학과 3학년)이 말했다.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 평화캠프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저는 자원봉사나 사회활동 성격이 강한 프로그램인 줄 알고 있어서 친구들과 소통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또한 북부와 남부의 문화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캠프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하게 해 준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집을 떠난 것도 처음이었고 꽝남성·호이안·냐짱을 간 것도 처음이었어요.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준 모든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요. 앞으로 이런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평화캠프에서 아쉬운 부분은 없었을까? '나와우리'와 함께 이번 캠프를 진행한 베트남 시민단체 굳윌(대표 레탄동)의 운영위원인 뚜옌(24)이 말했다.

"지나간 시간동안 저는 인상적인 기억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한국과 베트남 친구들 사이에 열정과 소통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유이탄 마을에서 각자 묶었던 집의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이 부족해서 모두들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캠프는 언어적인 문제로, 혹은 문화적인 기질 차이로 베트남과 한국 친구들 간의 소통이 부족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평화를 모색하는 고민은 많지 않았다는 지적이었다. 또한 베트남 참가자들과 마을 청년들과도 약간의 벽이 있었다. 이 점은 다양한 프로그램의 적절한 배치로 내년 캠프 때 보완되어야 할 사항이다.

부끄러운 과거, 반성과 이해로 넘어야

▲ 유이탄 마을 청년들의 환한 웃음 속에서 평화와 화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 굳윌 레탄동
마지막으로 캠프를 준비하고 진행하는데 가장 큰 공을 들인 김정우 나와우리 사무국장이 말을 전했다.

"캠프가 끝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노랗네요. 준비하느라 애쓴 친구들에게 고맙고, 이 늦은 시간까지 자기의 느낌을 나누어 줘서 모든 친구들에게 고맙습니다. 이제는 조금 떨어져서 나와우리와 캠프를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것보다 하나를 깊이 아는 것이 보람 있는 듯합니다. 이번 캠프를 통해서 함께 한다는 의미를 앞으로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늦은 밤 11시, 한국 참가자들이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12박13일 일정을 모두 끝맺는 순간이었다. 밖에 남아있던 베트남 친구들은 손을 흔들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평화를 위해서 함께 고민하고 땀 흘렸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매년 한국의 젊은이들이 베트남 땅을 찾아 우리가 남긴 부끄러운 흔적들을 본다.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의 눈을 빌어 우리가 저지른 것이 진실로 잘못된 일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다른 이의 슬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있는 이상 우리 사회의 미래는 밝다. 또 한국 친구들의 반성하는 모습을 통해 어두운 학살의 과거를 이해하는 베트남 친구들이 있는 이상 양국의 평화는 지속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기획취재단 기사입니다.


태그:#2007 한베 평화캠프, #굳윌, #나와우리, #베트남,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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