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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9일 오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보복폭행과 관련한 조사를 받기 위해 남대문경찰서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저는 고등학교에서 '법과사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7차 교육과정이 시작된 2002년 도입되어 처음 가르치기 시작한 법 분야 과목입니다.

이전에는 사회과목에 포함되어 일부 이론적인 내용만 교과서에 있었으나, '법과사회'라는 독립 교과목이 신설되면서 체계적인 법 교육이 고등학교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교과의 목적은 "법치주의를 실현하고 당면한 법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적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민주 시민을 기르는 데 있다"고 제시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기능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법과사회' 교과목이 도입된 초창기에 많은 사회과 선생님들이 맡기를 꺼려하고 가르치기 힘들어 하였습니다. 법이란 것이 사회 교과 내에서도 전문적인 영역이라 좀 힘들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스스로 나서서 이 과목을 맡겠다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분야를 가르치고 싶은 교육적 열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개인의 체험이 많이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목사님 '빽'으로 나온 고물상 우리 아버지

▲ 제 아버지는 소형트럭을 몰고 다니면서 고물을 수집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계십니다. 사진은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 있는 폐자원 재활용업체 미래산업 작업장(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제 아버지는 소형트럭을 몰고 다니시면서 고물을 수집하는 직업에 종사하십니다. 아버지가 고생하시며 번 돈으로 편한 대학생활을 누리고 있던 어느 날, 아버지가 경찰서에 붙들려 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새벽 3시에 트럭을 끌고나가 남이 버린 쓰레기 틈에서 고물을 수집하시던 아버지가 그만 절도사건 현장을 지나는 바람에 의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매번 무혐의로 풀려나오시긴 했지만, 잊을만하면 경찰서를 들락거릴 일이 한두 차례 생기곤 하였습니다. 부랴부랴 경찰서로 달려갔더니 형사는 혐의가 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아버지를 풀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온갖 잡범들 틈에 앉아계신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마음이 결코 좋을 리 없었습니다.

후에 알았지만 단지 의심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꼼짝없이 하룻밤을 경찰서 유치장에 계실 뻔하였는데,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난 것이 이른 바 '빽'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물상을 하는 아버지를 가장으로 둔 집안에 무슨 변변한 '빽'이 있었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제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그 경찰서 경목으로 활동하고 계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목사님께 전화를 넣었더니 알아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그 '빽'으로 밤에 한차례 더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은 이후에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그나마 하찮은(?) '빽'으로 하룻밤 유치장 신세를 지는 것만은 면했던 것입니다.

제가 남들이 담당하기 꺼려하는 과목을 맡겠다고 자청한 것은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지식을 가르쳐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변한 탓도 있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그렇게 당한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몰라도 법이 힘없는 소시민을 위하여 여러 가지 장치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아버지는 몰랐습니다, 저도 정말 몰랐습니다

'법과사회'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형사사건 피의자가 되었을 때 '묵비권'이라는 것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형사 피의자가 된 사람들은 형사나 검사보다 법적 지식에서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어지간하면 침묵을 지키는 것이 어설프게 스스로 변호하는 것보다 낫다고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겨레>에 한 현직 검사가 이런 이야기를 기고했다가 사표를 쓴 일도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 검사의 이야기는 법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피의자의 권리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수업시간에 이것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시사 문제가 터졌습니다. 바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입니다. 김승연 회장은 3명의 변호인을 대동하고 밤샘조사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것도 이미 두 차례의 출두요구서를 무시하고 있다가 체포영장을 발부한다고 하니 마지못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경찰서에 출두한 것입니다.

저는 이 사례를 통해 형사 사건 피의자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모두 설명할 작정입니다. 김승연 회장은 이 모든 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다 누렸습니다.

▲ 4월 29일 오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보복폭행과 관련한 조사를 받기 위해 남대문경찰서에 소환된 직후 경찰들이 경찰서 주변을 에워싸며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먼저 '임의 동행 거부'입니다.

김승연 회장의 사례는 서두에 언급한 저희 아버지와 비교하면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출두요구서도 없이 '임의동행'으로 끌려가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재벌그룹 회장은 출두요구서를 몇 차례 발부받고서, 그것도 체포영장을 발부하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자기를 변호해 줄 검사 출신 변호사를 셋이나 대동하고 나타났습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는 경찰이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줄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에게는 신체의 자유가 있습니다. 따라서 영장이 없는 상태이고 현행범도 아닌 바에야, 수사에는 협조한다 하더라도 잠을 집에 와서 잘 권리는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고물상을 하시는 아버지도, 명색이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자식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묵비권', 즉 '진술 거부권' 행사입니다.

김승연 회장은 어지간한 것은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합니다.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니 김 회장의 차남은 자신의 휴대폰 전화번호도 모르고, 심지어 그날 같이 있었던 친한 친구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쯤 되면 사람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피의자의 권리입니다. 만에 하나, 혐의가 무죄일 경우 김승연 회장과 차남이 여론몰이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김승연 회장, 인권 누린 것엔 불만 없습니다만

제 아버지는 스스로 변호한답시고 그날 있었던 일을 죄다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버려져 있는 고철덩어리를 주워 담은 것을 이야기했더니 경찰은 그걸 트집 잡았습니다. 돈이 되는 물건인데 함부로 주워 담았으니 '점유이탈물 횡령죄'에 해당된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니 자백하면 이 죄는 눈감아주겠다고 아버지를 회유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다른 것은 몰라도 정직을 신조로 삼아오신 분이라 "그것이 죄가 된다면 달게 받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사실 남이 필요 없어서 버린 물건이라 애초에 죄가 될 성질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낭패스런 경찰의 얼굴 표정이 지금도 상상이 갈 정도입니다.

2003년 8월 한총련 학생들이 미8군 영평종합사격훈련장 안에서 성조기를 불태우며 불법시위를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 한총련 학생들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하자 <조선일보>는 이를 상당히 못마땅해 하는 칼럼을 실은 바 있습니다. 아마도 <조선일보>는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는 헌법 조항을 잘 모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지막으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입니다. '진술거부권'과 '임의동행 거부'가 소극적인 자기 보호라면,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적극적인 자기 보호입니다.

김승연 회장은 진술하면서 하나하나 변호사의 눈치를 봤다고 합니다. 특히 가장 형벌이 큰 청계산 사건의 경우 끝까지 변호사를 쳐다보며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합니다. 김 회장의 변호사는 자신이 받는 연봉 이상의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을 것입니다.

제 아버지야 애초에 돈이 없으니 변호사 도움을 받을 형편도 안 되었지만,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례는 허다할 것입니다.

북한 노동당 입당 문제로 구속된 송두율 교수의 경우 검찰 조사 과정에서 변호인 입회를 거부당한 일이 있습니다. 대법원 결정으로 우여곡절 끝에 변호인 입회가 성사되긴 했지만, 이번 김승연 회장의 경우엔 아주 자연스럽게 변호인 입회가 허용되었습니다. 선례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재벌 회장이 특급 대우를 받았다는 의심을 지우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 지난 2003년 10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송두율 교수가 구속 수감되었다. 수갑을 찬 송두율 교수가 수사관들에 이끌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기 위해 승용차로 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우리 아버지도, 한총련도, '빨갱이'도 누려야 합니다

이쯤 되면 모두들 아실 것입니다. 김승연 회장은 피의자로서 누릴 모든 권리를 100% 무제한 누렸습니다. 그래도 보수 언론들은 대그룹 재벌 총수가 받는 인권침해가 못내 못마땅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아일보>는 5월 2일자 2면에 청와대가 이 사건에 대하여 부적절한 언급을 하고 구체적인 피의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커다랗게 실었습니다. 아마도 철저히 수사하라는 청와대의 지시가 경찰 수사에 대한 부적절한 외압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경우에 따라선 그렇게 될 수 있기도 합니다. 가끔 노동자의 파업이나 한총련 대학생들의 불법 시위가 있을 때, 대통령이 철저히 수사해서 불법행위가 있으면 법대로 처벌하라고 지시할 때에도 저는 그런 혐의를 느끼기는 합니다.

그러나 경찰의 초동수사 미비로 대부분의 증거 자료가 소실되어 수사가 어려움을 겪을 지경까지 왔다면, 대통령이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이를 비판하고 나선 것입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가 만인에게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건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던 사안을 이 사안에만 강조한다면 그것 역시 법적인 태도에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중앙일보>는 '김종혁의 시시각각'이라는 기명칼럼에서 청와대 지시로 경찰의 태도가 180도 바뀐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경찰이 예단해서 수사한다는 비판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 지적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식 수사를 하고 있다는 비판은 경찰이 충분히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중앙일보>가 언제부터 피의자 인권을 보호해 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건 진실 아직 모른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고등학교 '법과사회' 교과서 표지.
ⓒ 교학사
제가 가르치는 '법과사회' 교과서의 표지에는 서울 세종로 변호사회관 앞에 서 있다는 '법의 여신상'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법의 여신상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쥐고 있습니다. 천으로 눈을 가리는 것은 공평무사함을, 저울은 권리 다툼을 공평하게 해결하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임의동행 거부'도 '진술거부권'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도, 김승연 회장에게만 있어선 안 됩니다. 고물상을 하시는 제 아버지에게도, 불법 시위를 하는 한총련 학생에게도, 북한공산집단을 좋아하는 '빨갱이'에게도 인정되어야 할 인권입니다.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데, 저 역시 눈을 가리고 저울의 잣대로만 바라볼 생각입니다. 저는 아직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모른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아직 신문기사만 보아서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 수는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김승연 회장에게도 인권이 있고, 김 회장은 법정에서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무죄 추정을 받아야 할 한 명의 피의자에 불과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 근래 화제가 된 형사 사건 피의자로서 김승연 회장만큼 피의자로서 모든 권리를 인정받은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형사 사건으로 화제가 되는 사건들이 어지간하면 죄다 시국사건이거나 천인이 공노할 살인사건일 경우가 많아서 피의자 인권이 언론에 언급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 헌법상 보장되어 있는 피의자의 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마 이 생각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리 어긋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김승연 회장이 모든 권리를 향유하는 데 커다란 불만이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원칙이 앞으로 다른 사건에서도 꾸준히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오늘도 제 아버지와 김승연 회장 사건의 사례를 비교하면서, 법이 나아갈 방향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자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쓰는 데, 김두식 경북대 교수가 쓰신 <헌법의 풍경>이란 책을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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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고등어 사전(메디치미디어)>, <나의 권리를 말한다(뜨인돌)>, <세상을 보는 경제(인포더북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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