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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염산은 붉은 사암으로 되어있어 한낮이 아니어도 달구어진 불판 같다.
ⓒ 조수영
오공이가 파초선으로 불을 끈 화염산

@BRI@투루판 시내에서 벗어나 베제크릭 천불동(柏孜克里克千佛洞)으로 가는 길에서 화염산(火焰山)을 만났다. 화염산은 흔히 생각하는 원뿔모양의 산이 아니라 길게 병풍처럼 이어진 작은 산맥의 모양이었다. 약 500m정도 높이의 산이 길게 이어져 있다.

붉은 사암으로 되어 있어 한낮이 아니어도 달구어진 불판 같다. 산 표면에는 풍화침식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 세로로 쭈글쭈글, 크고 작은 무늬가 있다. 태양열에 의해 달구어진 지표면의 아지랑이라도 어른거리면 마치 산 전체가 불에 싸여 이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화염산이라 이름 붙여졌다.

열기에 이글거릴 때 화염산의 온도는 평균 60℃를 넘기 때문에 아직 아무도 이 산을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약 40년 전 이곳 투루판의 기온이 48.5℃에 달해 중국에서 가장 높은 기온으로 기록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화염산 지면의 온도는 무려 82.3℃에 이르렀다고 한다.

▲ 화염산. 산 표면에는 풍화침식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 세로로 쭈글쭈글, 크고 작은 무늬가 있다.
ⓒ 조수영
화염산이 뜨거운 이유는

이렇게 화염산의 온도가 높은 것은 산의 모양이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마치 태양열을 모으기 위한 열판처럼 태양을 향해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화염산은 최고봉의 높이가 850m에 불과하지만 해수면보다 낮은 투루판 분지에서는 대단히 높게 보인다.

화염산은 소설 <서유기>에도 등장하는데 불타는 화염산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삼장법사 일행은 그 불을 끌 수 있는 파초선을 얻기 위해 철선 공주와 한판승부를 벌인다. 결국 파초선을 빌려 49번의 부채질을 함으로서 불씨를 끄고 비가 내리게 해 무사히 화염산을 건넌다.

▲ 천불동 입구에 있는 손오공상. 소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파초선으로 화염산의 불을 껐다.
ⓒ 조수영
소설의 주인공이 된 삼장법사는 실제로 7세기경 이곳을 지나 인도로 갔었다. 묘하게 빛나는 화염산의 붉은 빛을 한참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정상에서부터 지그재그로 이어진 길이 보였다. 얼마 전부터 관광객에게 개방된 총 450m의 미끄럼대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리프트 모양의 것이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뜨거운 미끄럼을 어떻게 타고 내려올지 궁금하기만 하다.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남은 것이 없는 베제크릭 천불동

화염산을 지나 베제크릭 천불동으로 향했다. 베제크릭이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이다. 아름답게 장식된 집을 찾아 무르툭 계곡으로 들어선다. 양쪽으로 붉은 화염산 절벽에 싸여 있는 협곡의 오른쪽에는 천산의 눈 녹은 물이 황토와 함께 흐르고 있다. 가는 길에는 천불동을 재현해 놓은 마을이 있었는데 아쉽지만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손오공 일행의 상이 있는 천불동의 입구 광장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협곡 절벽의 중턱을 따라 석굴이 구축되어 있다. 붉은 화염산과 무르툭 강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 무르툭 계곡과 베제클릭 천불동
ⓒ 조수영
여러 층으로 빽빽이 들어선 것이 마치 벌집 같다. 절벽에 굴을 파고 입구에 문을 만든 다른 석굴에 비해 이곳은 둥근 돔 형식으로 지붕을 만들어 장식을 했다. 그래서 굴이라 부르지 않고 장식된 집이라 했나보다.

이곳은 6세기 국씨 고창국 시대부터 13세기 원나라 때까지 성지역할을 하여 불교 관련 벽화가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특히 위구르인들이 투루판을 지배했던 9-12세기에 가장 번영하였다.

당시 석굴 중에는 가운데에 주로 예불공간인 중당이 놓이고, 이를 회랑이 둘러싼 구조인 것이 많다. 중앙의 천장은 둥근 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펜으로 그린 그림처럼 섬세한 선으로 묘사한 중국 미술의 영향을 받은 그림과 명암과 양감을 강조하는 위구르 및 서역양식의 그림이 있었다.

▲ 원래 82개의 석굴은 지금은 42개만 남아있고 그나마 6개만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사진은 6개 중의 하나.
ⓒ 조수영
▲ 이슬람 교도들은 벽화를 긁고, 심지어 눈알을 파내어 벼렸다.
ⓒ 조수영
▲ 벽화를 잔인하게 뜯어간 흔적. 칼과 톱을 이용하여 독일, 일본 등으로 싹쓸이 해 갔다.
ⓒ 조수영
서양의 탐험대가 싹쓸이 해 간 벽화들

그러나 위구르인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후 이슬람 세력들이 들어와 벽화를 칼로 긁고 또 파괴했으며, 심지어는 눈알을 파내어 버렸다. 이들은 종교상 모든 형태를 부정했기 때문에 이란과 파키스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불상과 많은 유적들을 파괴했다.

게다가 1898년 러시아학자 클레멘츠가 석굴을 발견한 이래, 20세기에 이르러 독일 고고학자 르콕과 그륀베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네 차례 조사하며 위구르인 공양도, 사천왕도 같은 수백 상자 분량의 벽화조각들을 칼과 톱으로 무자비하게 떼어갔다.

이런 식으로 가져간 벽화들은 동굴 하나를 거의 완벽하게 옮겨 놓은 듯했다. 그러나 이 벽화들은 베를린 박물관에 있다가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뒤이어 일본 승려 오타니 탐험대와 아스타나 고분을 발굴한 영국의 스타인도 들러 남아있는 유물들을 하이에나처럼 쓸어갔다. 도둑들은 벽화의 외곽 둘레에 깊은 칼자국을 낸 뒤 뒤로 톱을 집어넣어서 벽에서 떼어냈다. 석굴들은 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벽에는 아직도 약탈의 잔인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석굴의 수도 원래 82개였다고 하나 지금은 42개만 남아있고 그나마 6개만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뜯겨진 부분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부분의 색채는 세월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뚜렷했다.

제33굴의 뒷벽에는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는 그림이 있는데 아랫부분은 없어지고 윗부분만 남았다. ‘각국사절도’라 불리며 그림의 왼쪽에는 보살과 호법신들이, 우측에는 각국에서 온 사절단이 있다. 동서 문화교류가 왕성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각 민족의 얼굴 생김새와 표정, 풍속 등이 잘 나타나 이곳의 상징적 벽화로 입장권에도 그려져 있었다.

천불도를 베제크릭에 돌려주자!

▲ 제 33굴의 각국사절도
ⓒ 조수영
뜯어간 유물은 현재 독일의 베를린박물관, 인도 뉴델리박물관, 러시아 박물관, 일본의 동경박물관 등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다.

숱하게 털린 투루판 보물들의 상당수는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물려받은 것인데 보통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한다. 20세기 초 실크로드를 답사했던 일본 승려 오타니와 그의 탐험대가 1902년부터 1914년까지 3차례 조사 끝에 수집한 유물들 중 일부다.

오타니는 탐험 뒤 재정난에 시달리자 구하라라는 상인에게 유물 일부를 팔았고, 구하라가 1916년 이를 다시 총독부에 기증해 오늘날에 이른다. 베제크릭과 토욕구 등에서 가져온 석굴 벽화 조각들과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생활유물들이 주종이다.

베제크릭 15굴에서 절취해온 공양보살상의 경우 가장 아름다운 서역 보살상으로 손꼽힌다. 또한 아스타나 고분 출토품 중에는 무덤 천정에 붙였던 중국 신화의 창조신 복희와 여와의 삼베 그림이 있는데 채색이나 구도 등이 뛰어난 걸작이다.

하지만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는 투루판 유물들 또한 반달리즘의 악몽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유물들 대부분은 오타니 탐험대가 마치 보물찾기하듯 털어온 것들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술적으론 중요한 자료일지 모르겠지만 벽화가 그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때 다시 생명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왕오천축국전>을 되돌려주지 않는 프랑스를 탓하기 전에….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 무모한 도굴꾼들과 파괴자들에 의해 뜯기고 찢기어 텅 빈 헛간처럼 변한 현실 앞에서 허탈감과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고창고성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천불도의 단편
ⓒ 조수영

▲ 무르툭 계곡과 베제클릭 천불동 전경
ⓒ 조수영

태그:#베제크릭, #천불동, #무르툭, #각국사절도, #천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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