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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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에 걸려든 적군이 오히려 포위공격을 하던 아군을 섬멸시키는 상황이라면, 더 이상 싸움을 계속하기는 힘들어진다. 이쪽이 더 이상 해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투수에게라면, 유인구에 쉽게 방망이를 휘둘러주는 타자만큼 고마운 것은 없다. 그래서 스트라이크존을 보는 눈이 심판보다도 정밀했다는 장효조보다는, 차라리 가끔 한 방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저 우직하게 들이대는 이만수와 맞설 때 홀가분해진다는 것이 투수들의 마음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에서, 분명히 스트라이크 존에서 반개쯤 빼놓은 유인구마저 때려내 안타를 만드는 타자만큼 투수의 가슴을 허탈하고 답답하게 만드는 존재 또한 없다. 그런 타자라면, 스트라이크 비슷한 공을 던지며 타자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손이 닿지 않는 구석을 찾아 도망 다니는 것 말고는 투수가 해볼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강돈이 그런 타자였다. 그는 공이 방망이가 닿는 곳으로만 들어와 준다면 주저 없이 휘둘렀고, 또 그것을 거짓말처럼 안타로 연결했다. 그래서 세 번이나 거푸 헛방망이질을 하고 돌아서는 일도 종종 있었고, 사사구로 편하게 걸어 나가는 일이 거의 없어 출루율이 타율과 큰 차이를 보이지 못하는 타자였다. 그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선구안을 가지고 두 번이나 최다 안타왕에 오른 강타자이기도 했다.

방망이 닿는 곳으로 공 들어오면 주저 없이 휘둘러

사실 안타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선구안만이 아니다. 그것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적극성이고,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방망이질이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흘려보내는 공은 무조건 볼'이었을 만큼 선구안이 정확했다는, 그리고 '원하는 공이 들어올 때까지 열 개고 스무 개고 끊어 낼' 능력이 있었다는 80년대 초반의 장효조쯤 되지 못할 바에야,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좋은 안타를 만들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만 헛스윙을 하면 그대로 아웃이라는 부담 때문에, 맞히더라도 제대로 방망이에 힘을 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초구부터 노리며 세 번 헛스윙 할 각오로 달려드는 이강돈에게는 적어도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타격기술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공이든 '끝까지 보고 때리는' 집중력이었다. 흔히 말하듯 공도 둥글고 방망이도 둥글다. 게다가 변화구든 직구든, 끊임없이 회전하고 흔들리고 궤적을 바꾸어가며 날아드는 공과 반대편에서 타자가 머릿속에 예상해둔 진로대로 돌려 긋는 방망이가 정확히 마주칠 확률은 극히 낮다.

그래서 공이 방망이에 맞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고 궤도와 가격을 조절하는 방망이질이 아니라면 좋은 안타는 안 나온다.

이강돈은 머릿속에 입력한대로 도박하는 심정으로 냅다 방망이를 휘두르는 타자가 아니었다. 그는 어림없는 한쪽 구석으로 파고드는 공이라도 끝까지 보면서 마지막 순간에 힘을 모아 때려내는 기본기에 충실한 타자였다.

그래서 그는 해마다 꾸준히 50개에서 80개 가까운 삼진을 당했다. 그것도 튄 공 같은 말도 안 되는 폭투성 공에도 무수히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그러나 비록 출루율과 타율은 최고 수준에 이르지 못했지만 해마다 백 수십 개의 안타를 때려내는 선수였다.

프로야구 역사상 두 번째로 작성한 사이클링 히트

 이강돈이 사이클링히트를 성공시키고 환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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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을 프로야구사에 굵직하게 새겨놓은 사이클링히트 역시 그의 적극적인 자세에서 비롯한 것이다. 1987년 8월 27일, 잠실 경기장. 빙그레 이글스와 OB 베어스의 경기가 열렸던 그날은 아침부터 바람이 많이 불었고 가랑비까지 흩날렸다. 경기가 성사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하위권 팀과 상위권 팀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그 해 한희민과 이상군의 마운드 쌍두마차에 더해 이정훈, 장종훈, 유승안, 고원부 등이 타선을 주도하며 창단 2년 만에 최하위권에서 중하위권으로 올라선 이글스보다는 플레이오프 티켓을 놓고 한 게임 한 게임 피 말리는 순위다툼을 벌이던 베어스가 오히려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 불투명한 경기를 놓고, 베어스는 '영원한 에이스' 박철순을 불러냈고, 이글스는 '져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2진급 손문곤을 선발로 내세웠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됐다.

이글스 선발 손문곤의 그 해 성적은 1승 4패, 그리고 평균자책점은 6.93이었다. 베어스 선수들은 오랜만에 박철순에게 1승을 챙겨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박철순이라는 이름은 그 전에도, 그리고 그 뒤로도 언제나 베어스 선수들의 가슴과 어깨에 알 수 없는 기운을 불어넣곤 했다.

그 날도 그랬다. 그러나 그 날이 불사조의 화려한 부활의 순간이 아니라, 이강돈이라는 젊은 타자의 등장을 알리는 순간으로 기억될 것임을 예감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86년 빙그레 이글스 창단멤버로 데뷔한 첫 해 3할에 가까운 만만치 않은 타격솜씨를 선보인 이강돈이었지만 역시 첫 타석은 삼진으로 물러나야 했다. 쌀쌀한 날씨 탓에 뻣뻣해진 팔근육 때문인지 스윙도 부드럽지 않았고, 역시 신인급 타자에게 박철순이라는 신화적 인물을 상대하는 원정경기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세 번의 헛스윙을 통해 감을 조절한 이강돈은 두 번째 타석에서 박철순의 2구를 밀어 쳐 훌쩍 왼쪽 담장을 넘겨버렸다. 그리고 세 번째 타석에서는 우중간을 가르는 장타를 쳐놓고 3루까지 욕심을 부리다가 횡사를 하고 말았지만(기록상 2루타), 그 다음 네 번째 타석에서 내야안타를 때려내 기록의 가능성을 살려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타석. 그 타석에서 만일 3루타를 기록할 수 있다면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한 순간의 앞과 뒤에서 사이클링 히트에 도전했던 수많은 타격천재들이 좌절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똑같은 순간 이만수와 장종훈은 외야 가장 구석진 자리에 타구를 떨어뜨려놓고도 느린 다리 때문에 3루에서 횡사해 땅을 쳐야 했고, 아마추어 시절의 강기웅이나 95년 LG의 조현은 3루타 대신 달갑지 않은 홈런을 날리고는 멋쩍게 웃어야 했다.

그 타석에서 이강돈이 힘차게 끌어당긴 타구는 다시 우중간으로 날아갔고 우익수와 중견수 사이를 갈랐다. 그러나 3루에서 횡사했던 세 번째 타석에서의 안타보다도 조금 짧았다. 물론 이강돈은 죽든 살든 3루 베이스로 한 번 달려들어 사이클링 히트에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베어스 수비수가 정상적으로 공을 중계했다면 이번 역시 안타까운 횡사로 끝이 난 2루타로 기록되고, 사이클링 히트 역시 물거품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대기록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팔 근육을 경직시켰던지, 아니면 원래 친구사이였던 이강돈과의 우정이 그의 질주를 가로막으려는 마지막 손길을 움찔하게 만들었던지 그 공을 주워든 베어스의 우익수 김형석은 공을 한 번 떨어뜨리고는 더듬었다.

그리고 그 사이 3루로 파고든 이강돈은 두 팔을 번쩍 들고 대기록 작성을 자축했다. 우리 프로야구 역사상 두 번째로 작성된 사이클링 히트였다.

별명이 '깡통'인 이유

 1990년 나란히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장종훈, 이정훈, 이강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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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적극적이라는 말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는 특히 누상에 나갔을 때, 타석에서 공을 노릴 때의 집중력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었다.

앞뒤 잴 것 없이 질주해야 할 9회말 투아웃 이후에 후속타자의 장타가 혹시 잡히지는 않는지 지켜보며 달리다가 홈에서 태그아웃 당해 경기를 망친 적도 있었고, 펜스를 맞고 튀어나와 외야수의 글러브에 들어간 안타를 플라이아웃으로 잘못 보고 원위치인 1루로 부지런히 돌아가다가 횡사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별명이 '깡통'이었다. 물론 '강돈'이라는 이름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 공에나 방망이 휘두르다가 주자로 나가서도 아무 생각 없는 듯 뛰다가 잡혀 나오곤 하는 데서 팬들이 '깡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완벽한 선수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 투수들에게는 결코 한 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위험한 타자가 분명했다. 심지어는 사상 최고의 투수라는 선동열 역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에게 일격을 당하고 궁지에 몰린 경험이 있을 정도였다.

이미 삼성 라이온즈가 연속우승의 무적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오늘, 전력에 비추어 가장 우승 운이 없던 팀으로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힐 이글스가 가장 우승에 근접했던 순간은 1989년 한국시리즈 1차전 직후였다. 바로 그 경기에 해태 타이거즈의 무적신화 선동열이 선발로 나섰지만, 1번 타자로 나선 이강돈이 1회말 그 전설적인 슬라이더를 노려 쳐 그대로 백스크린 상단을 맞히는 대형 선두타자홈런을 뺏어냈기 때문이다.

선봉장 이강돈이 돌파해낸 길을 따라 진격한 이글스 타선은 넉 점을 뺏어냈고, 이상군에서 한희민과 송진우로 이어진 결사대는 타이거즈를 무실점으로 봉쇄해내며 먼저 1승 고지에 올라설 수 있었다.

물론 승세를 이어가던 2차전, 장종훈의 뼈아픈 실책으로 역전을 허용한 뒤 내리 4연패를 당해 시리즈를 내주긴 했지만, 그 3차전에 다시 선동열과 맞서 2루타를 때려내 반전의 실마리를 만들어낸 것 또한 이강돈이었다.

은퇴 2년 후에 맛 본 우승의 감격

 이강돈의 은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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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강정길 등 그와 함께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던 동료들이 대개 그랬듯, 그 역시 끝내 우승컵을 만져볼 수는 없었다. 97년, 15경기 출장에 1할 8푼의 성적. 아직 두 해 정도는 더 뛰고 싶다는 희망을 비쳤지만 끝내 은퇴라는 일정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가 선수생활을 하고 싶었던 바로 그 '2년 뒤' 99년, 이글스는 비원의 첫 우승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 해 그는 2군 타격코치 신분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고, 믿기지 않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이글스가 우승컵을 들어올린 순간, 경기장에서는 송진우가 카메라 앞에서 '함께 우승을 경험하지 못한 옛 동료들 생각이 난다'며 흐느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강돈 역시 눈물을 흘렸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승 선수단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해서 이글스의 우승에 이강돈의 힘이 실리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야구의 상식을 뒤집은 '깡통타법'의 오묘함에 매료되고 선동열이 앞장선 철벽 타이거즈에 맞서 돌진한 '깡통투혼'에 눈시울 적시다가 결국 그 깡통선배를 따라 달리며 성장한 꼬마들이 이영우가 되고 백재호가 되고 송지만이 되어 대신 엮어준 우승의 낭보였기 때문이다.

최고라기엔 부족함이 있지만, 가장 흥미로운 대결의 순간을 보여준 변칙승부사 이강돈.

이제는 선수시절의 이강돈을 기억하지 못하는 충청도 소년들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소식(청주기계공업고등학교 감독 부임)이 들린다. 그가 머지않아 그 시절의 경쾌한 승부근성으로 만들어낼 또 다른 사이클링 히트 소식이 기다려진다.

덧붙이는 글 CBS라디오 표준FM (98.1MHz) '파워스포츠'(월~토 21:05 - 21:30)의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 코너(토)에서도 방송되고 있습니다.
이강돈 사이클링히트 한화 김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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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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