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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 구순에 시집 <해연이 날아온다>를 펴낸 이기형 시인
ⓒ 컬처뉴스
▲ 이기형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해연이 날아온다>(실천문학, 2007)
ⓒ 실천문학
백발 구순에도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 그리고 그 구순 시인이 새 시집을 냈다. 혹자는 "나이 90에 시집을 펴낸 시인은 한국 문단사에서 그가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기자도 여태 구순에 시를 냈다는 시인을 그 외에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는 다름 아닌 이기형 시인. 1917년에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난 이 시인은 올해로 꼭 만 90세. 그가 최근 아홉 번째 시집 <해海연燕이 날아온다>(실천문학)를 펴냈다. 아흔의 나이에 시집 한권을 떡하니 내놓으며 현역 시인의 기개를 보여준 이기형 시인을 지난 8일 고봉준 문학평론가와 그의 서초동 자택에서 만났다.

반일 군사훈련조직 '조선민족해방협동단'의 배후

"침략 전쟁은 / 인간을 잔인 흉악한 짐승으로 만들었다 / 그런 일제(日帝) 짐승들이 / 우리의 곱디고은 딸들을 무차별 끌고 가 / 성 노예로 사정없이 짓밟았다 / 비열하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어 / 역사도 감히 붓 들길 주저한다" - '한은 구천에 사무쳐' 중에서

이 시인은 그의 나이가 말해 주듯 일제치하의 고통과 분단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어 온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역사 드라마이며, 그의 삶을 시적 꾸밈없이 진솔하게 담아낸 시는 생생한 역사의 기록인 셈이다.

"나는 1938년에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났고, 만해 한용운 선생을 만났어. 그리고 이광수도 만났지. 이들과 만나서 조선통일문제를 고민하고, 독립운동에 대해 얘기했어. 그 후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그 날까지 반일투쟁의 일선에 있었지."

그에 말에 따르면 그는 학병과 징병을 피해 산속에 들어오는 학생들을 결집시켜 일제의 전쟁수행을 방해하고 장차 연합군이 조선에 상륙하면 이에 호응할 수 있는 군사훈련 조직이었던 '조선민족해방협동단'(이하 협동단)의 배후 인물이었다. 당시 협동단의 중심 조직원이었던 '염윤구'와도 절친한 사이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1947년 그가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온 몽양 여운형 선생이 괴한에 의해 암살당하자 이 시인은 그 후 33년간 일체의 공적인 사회생활을 중단하고 칩거 생활을 해왔다. 그러다가 1980년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백낙청, 시인 이시영 등을 만나 '분단 조국 하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는 생각을 바꿔 시작 활동을 결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80년 첫 시집 <망향>이 출간됐으며, 1984년 <실천문학>에 5편의 시가 발표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인으로 활동하게 됐다.

불꽃같은 시혼으로 쓴 통일 염원시

이 같은 역사를 온 몸으로 살아왔기에 이 시인에게 '통일'은 단순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입에 맴도는 노랫말로 해소되지 못한다. 그의 어머니가 남쪽으로 내려간 자식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북에서 눈을 감았고, 자신의 딸이 북쪽에 살아 있다. 지난 2003년 정주영체육관 준공식 때 처음 북의 땅을 밟은 이후 2005년 '남북작가대회'에 남쪽 대표단으로 북의 땅을 밟았지만 딸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었다.

▲ 고향땅인 북녘의 땅을 밟았지만 분단의 쓰라림에 더욱 슬펐다는 시인
ⓒ 컬처뉴스
"사람들은 북녘 땅을 밟아 좋겠다고 하지만 기쁨보다는 분단에 대한 쓰라림에 더 아프지. 그리고 나는 이렇게라도 밟을 수 있으니 그나마 낫지만 못 밟은 사람들은 또 어째. 통일부에서 이산가족 상봉에 신청한 80세 이상 사람들이 7만 명이래.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북한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하나, 둘 죽어가고 있다고. 빨리 자연스럽게 남북을 오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

시인의 소망은 진지하고 간절했다. 그리고 그러한 간절함은 그의 시 전반에 그대로 녹아 있다.

"그날 고랑포를 건너 / 가신 임은 / 백발에도 돌아오질 않아 / 이별보다 슬픈 분단 / 그날 이별 아리랑은 열두 굽이였건만 / 오늘 분단 아리랑은 천 굽이런가 / 발 굴러 웁니다." - '분단 아리랑' 중에서

그래서 발문을 쓴 문병란 시인은 그의 시를 '불꽃같은 시혼으로 쓴 통일 염원시'라 불렀다. 아흔을 넘기고도 식을 줄 모르는 통일에 대한 열망 때문이리라.

"젊은 사람들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

"나운규는 아리랑고개를 울고 넘었건만 / 분단고개를 울고 넘는 사람은 없다 / 국록 먹은 어른들은 말잔치로 밤을 지새우고 / 청바지들은 할아버지가 울고 넘은 박달재를 / 촐랑대며 넘는다" - '해연(海燕)이 날아온다' 중에서

"만물이 소생 약동하는 봄 / 저 명동 거리 연인들의 물결 / 발산하는 젊음, 눈부신 아름다움 / 저들 가운데 / 분단에 통곡하는 젊은이가 몇이나 될까 / 대추리 사태도 / 한미무역협상도 / 백악관 핵 음모도 / 난 몰라라 그저 / 탄력 강한 고무줄마냥 탁탁 튈 뿐" - '쌍쌍이 연인이 되어'


이번 시집을 읽다 보면 요즘 시, 그리고 젊은 시인들에 대한 꾸지람이 강하게 느껴진다. 시집 맨 뒤 '시인의 말'에서도 시인은 젊은 시인들에게 "알량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시를 쓰지 말고 자주통일 지향적 리얼리즘시를 쓰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시인은 나운규의 '아리랑 고개'로 지금 젊은 시들의 시풍을 설명했다.

"말하자면 이런 거야. 내 시에도 표현했다시피 나운규는 아리랑고개를 울고 넘었건만 청바지들은 촐랑대고 넘고 있는 거야. 과거 우리 할아버지들이 울면서 넘은 분단 고개를 요즘 젊은 시인들은 분단에 대한 아무런 느낌 없이 촐랑거리며 넘고 있다는 것이지."

'분단'을 직접 겪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이 시인에게 분단을 겪지 않은, 그래서 통일에 대해 별 관심 없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못마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젊은 사람들을 탓할 일은 아니야"라고 말한다.

"젊은이들이 분단에 관심이 적은 이유는 지난 60년간의 민족문제를 교육이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야. 말하자면 지난 60년 동안 정권들은 반공교육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거지. 그래서 반공교육에 익숙해진 젊은이들은 북한의 민족이나 분단, 통일 문제에 대해 아무런 느낌을 가지지 못하게 된 거야. 그러니 젊은 사람만 탓할 수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시인은 젊은 시인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톡톡 튀고, 재미난 시들은 나중에 쓰라고. 통일된 이후에 쓰라고 말이다. 물론 통일이 모든 역사와 민족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통일'은 '백가쟁명'이다. 통일된 이후에는 어떤 것도 괜찮을 것이라는 시인. 시인에게 '통일'은 그 이후에도 죽어도 좋을 만큼 큰 열망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의 시에서는 통일 염원에 대한 시인의 비장한 힘이 느낄 수 있다.

"약관의 가슴속 깊은 곳 / 조국과 시의 큰 꿈을 안고 / 죽음의 고개를 넘고 넘어 / 일흔이 되어서야 / 대망의 민족시인이 되었다 / 분단이 풀리지 않는 한 / 늙지도 죽지도 않겠다 / 통일시만 쓴다" - '조국 시 사랑' 중에서

"죽을 때까지 시작을 멈추지 않겠다"

▲ 아직도 원고지에 시를 쓰는 이 시인. 시인은 육필원고를 꺼내 보여줬다.
ⓒ 컬처뉴스
이 시인은 지난 2005년 인터뷰차 그를 만났을 때보다 기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지난 인터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문학행사나 현장에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지만 기자를 기억해내기 힘드신 것 같았다. 하지만 시작(詩作)에 대한 열정은 반대로 날로 커지는 듯했다. 시인은 이번 시집 원고를 넘긴 이후에 벌써 한권 분량인 180여 편의 시를 썼다고 말했다.

시인은 "내 머리회전이라든가, 글 쓰는 것은 막 빨라져서 시가 막 쏟아져. 내가 생각해도 이런 내가 놀라워"라며 자필로 쓴 육필원고를 들춰 보여준다. 그리고는 한편을 뽑아 들더니 "내 젊은 사람들이 왔으니 한 편 읽어 줄께, 괜찮지?"하신다. 그가 꺼낸 시는 그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지었다는 '퉁소소리'.

"연연절절 천년 한을 쏟아내는 저 퉁소소리 / 제 가슴은 찢어집니다 / 어머니는 귀띔해 주셨습니다 / 내 두살 때 아버님은 스물하나 앳된 꽃나이 / 이 세상 마지막 하직할제 사력을 다해 퉁소를 부르셨다고 / 아버님이 애절 망극한 사연 / 소자는 긴긴 세월 지나 자나 깨나 한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 아버님은 생을 마감하는 처절한 순간 / 장엄무비한 아름다운 사력을 다해 저에게 주셨습니다 / 조국통일과 시 창작에 서렁서렁 북받치는 놀라운 힘을 주셨습니다" - '퉁소소리' 중에서

'퉁소소리'는 시인이 두 살 때 21살의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표현한 시다. 이 시인은 그가 아흔 살이 넘도록 시를 쓸 수 있는 원동력에 대해 "죽기 직전까지도 퉁소를 부르셨던 아버지의 예술적 혼이, 어떤 호소력이 나에게 전달된 게 아닐까 싶다"고 말한다.

▲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퉁소소리'를 낭송하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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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기자와 고봉준 평론가를 이끌더니 벽 한 켠에 걸어놓은 시 한편을 가리킨다. 지난 구순잔치에 후배문인인 이승철 시인이 시인을 위해 지어준 시라고 한다. "내 이 시를 읽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몰라"하신다. 노쇠해진 자신을 잊지 않고 후배 문인이 손수 지어준 시가 무척 맘에 드신 모양이었다.

"꽃불처럼 활활활 불타오르던 한 영혼을 보았습니다. / 천지간 어디서나 은빛 사자의 갈기를 휘날리며 / 먼 산하를 하염없이 질주하는 바람이었다가 / 때론 여강 갈대밭 아심찮은 詩心(시심)이었다가 / 혹은 저물녘 황혼 언덕 아래 야무진 / 차돌멩이 외침으로 버팅기고 서 있던 님은 / 하수상한 雜歌(잡가) 같은 세월 속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던, / 새푸른 조선의 금강송 한 그루였습니다." - 이기형 시인 구순 잔치에 이승철 시인이 바친 축시 '님이 저토록 푸르렀기에' 중에서

이 시인은 인터뷰를 하는 내내 "내가 오래 살아서 젊은 사람들하고 이렇게 얘기 나누고 있는 것이 참 꿈만 같다"고 했다. 그건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시인과 얘기를 나눌수록 마치 국사책 안으로 들어가 일제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통일이 될 때까지 절대 죽지 않겠다"는 시인의 굳은 각오가 하루 빨리 이뤄지는 날이 어서 오기를 함께 염원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컬처뉴스>(http://www.culturenews.net)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태그:#이기형, #시인, #해연이 날아온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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