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한-미-일 3국의 정치적 이해가 맞아 떨어져 지지부진하던 한일회담이 5.16 이후 급속히 진행됐다. 사진은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부터 정일권 총리, 박 대통령,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올해는 한일 양국에 있어 꽤나 많은 의미를 가진 해이다. 을사보호조약 100주년, 해방 60주년, 그리고 한일국교정상화(이하 ‘한일협정’) 40주년을 맞이하는 2005년. 그렇지만, 이 기념비적인 해를 맞이하는 양국의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일본정부는 외무성 홈페이지에 “일한우정청년2005(日韓友青年2005)”라는 제목으로 한일간의 우정을 돈독히 하자는 취지의 행사들을 계획하는 등 한류열풍으로 시작된 작년에 이어 올해 역시 민간차원의 교류를 더욱 장려하기 위한 지원에 힘을 쏟을 채비를 갖추고 있다.

반면, 한국정부는1월 17일에 60년대 초반에 있었던 6~7차 한일협정 회담 관련 문서 약 1200쪽을 공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박정희 정권 치하의 7대 의혹을 제기하는 등 과거사 청산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발표와 더불어 국내외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 이 문서는 당시 한국측 대표였던 이규성 주일공사와 사토 세이지 일 외무성 참사관 등의 대화가 그대로 실려 있다. “청구권(한국측), 경제협력 지원(일본측)”등 단어 선택에서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양국 대표단의 생생한 목소리를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감추어진 비밀

이 자료가 공개되자 일본의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치 등 거대신문사와 TBS, 테레비 아사히 등 방송매스컴이 큰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다지 큰 뉴스거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인지 그 이튿날로 한일협정 공개문서에 관한 내용은 일본 언론에서 사라졌다.

독재시대의 암울했던 과거사를 청산하고, 그 시기의 의혹에 대해 하나둘씩 풀어내고자 하는 한국측과 “이미 외교적으로 끝난 사항”이며 앞으로의 관계에 더 힘을 기울이자고 말하는 일본측. 솔직히 지금와서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고를 따질 수는 없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1949년 2월 대일배상조사심의회의 설치 이후 61년 제5차 회담에 이르기까지 느리지만 천천히라도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했던 것이 갑자기 왜 그렇게 급속히 진행됐는지, 한일협정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김종필-오히라 메모사건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50년대 후반 한일회담을 이끈 기시(岸信介) 총리, 한일협정이 체결된 60년대 초중반의 이케다(池田勇人), 사토(佐藤栄作)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60년에 있었던 미일안보조약의 갱신으로 인해 국내의 반발을 받고 있었다는 점, 즉 일본의 입장에서 정국타개용이 아니었는가 점 등 의문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일본 정부와 기업에 대한 한국인의 일제하 피해 보상금 청구소송이 줄을 잇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소송에 대해 일본측의 입장은 단 한가지였다.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으로 인해 개인 청구권에 대해서는 모든 합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일본 정부는 지불할 이유가 없다” 라는 것. 일본측이 그 근거로 든 한일협정 제2조 1항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돼 있다.

“한일 양국은 한일 양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한일 양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대일강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 조약내용을 본다면 한일협정에서 근거가 되는 국제조약은 '샌프란시스코조약'임을 알 수 있다. 대일강화조약, 또는 대일평화조약이라고도 불리는 이 조약은 미국을 비롯한 전승국 48개국(소련, 폴란드, 체코 등 공산권 승전국은 조인거부)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다.

전문(前文), 평화상태의 회복, 영역, 안전, 정치 및 경제, 청구권 및 재산, 분쟁의 해결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1951년 9월 체결돼 이듬해 4월 28일부터 그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즉 일본측은 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근거해 개인의 청구권에 대해서 국제사회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일협정의 근거가 된 국제조약은 '샌프란시스코조약'

한편 일본의 권위지인 아사히신문은 지난 2000년 8월 22일자에서 기밀해제된 미 국립공문서관의 자료를 토대로 당시 정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51년에 체결된 대일강화조약에 즈음하여 처음에 한국은 전승국의 일원으로 명기되어 조인식에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 미국의 존 델러스 특사와의 회담으로 인해 조약 체결 5개월 전에 전승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1949년 조약 초안의 연합국 명단에는 한국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51년 4월 23일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미국측 조약초안 담당자 존 포스터 델러스와의 비밀회담을 통해 ‘일본 국내의 조선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들이 평화조약의 수혜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한국이 조인국으로 참가하게 되면, 일본은 어이없는 청구금액 소송에 휩싸일 것이다’라고 주장해 미국측이 이 제안을 수용하고, 한국은 전승국 명단에서 빠지게 된다…”

한일협정에 언급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제2장 영역 제4조 재산 a항”에는 ‘제 2조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는 연합국, 또는 그 국민의 재산이 아직 반환되어 있지 않은 경우 시정을 담당하고 있는 당국이 반환하지 않으면 안된다(第2条に掲げる地域にある連合国又はその国民の財産は、まだ返還されていない限り、施政を行つている当局が現状で返還しなければならない)’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본문 중 제2조에 등장하는 연합국에 한반도는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된다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거해서 한반도는 대일청구의 권리및 독립국, 연합국의 일원임이 명백해지는데 정작 조인식에는 참여할 기회도, 발언권도 얻지 못한 셈이다.

게다가 이후 한일협정에 ‘샌프란시스코의 제4조 a항은 해결되었다’는 문구가 삽입되지 않았다면 이후 충분한 개인 대일청구권의 행사가 가능했었는데, 한일협정의 그 문구로 인해 대한민국의 모든 개인은 ‘공식적’으로 그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다. 물론 이후 모든 개인의 청구권 소송 및 요청에 대해 일본은 이 문구를 마치 전가의 보도인양 휘두르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은 왜 한국의 조인식 참가자격을 박탈했을까? 그것은 미국의 극동방위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가진다. 6.25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은 김일성의 야욕 때문이라고 한국의 주류언론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은 주장하고 있지만, 직접적인 계기로만 본다면 1950년 1월에 있었던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연설이 김일성의 결단(?)에 도움을 주지 않았나 하는 분석도 존재한다.

미-일, 극동방위전략서 한국을 제쳐둬

일명 '애치슨 라인'이 발표된 이 연설에서 그는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산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으로 설정할 것"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냉전시대가 본격화됨에 따라 구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방위선 설정에서 한국을 제외한 것이다.

요시다 시게루의 ‘공산주의자’ 발언과 ‘애치슨 라인’의 선포 등에서 보듯이 미국은 한국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더불어 미-일 양국 사이에 따로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에서도 미국은 일본을 극동방위전략의 최선단 기지로 활용할 뜻을 명백히 했다.

한편, 제6차 한일회담이 진행된 1962년 일본 정가에서는 한일회담에 관해 긴급 대정부질문이 이루어졌다. 1962년 8월 28일 있었던 중의원 의회의 속기록을 보면 당시 일본 사회당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현재 한국은 미국 등 서방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북한은 소련 등 공산세계와 줄이 닿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간의 감정을 자극할만한 소지가 충분한 한일회담을 급격히 서둘러야 할 이유가 과연 있는지 의문이다. 우리 사회당은 한일회담은 한국과 북한이 통일된 이후 진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민당은 쿠데타로 집권한 남한 정부가 한반도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강변하면서 지금 한일회담을 진행하려고 하고 있다. 게다가 국민의 세금을 청구권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정부에 주려고 하고 있다. 정통성이 없는 쿠데타 정부에 정당한 이유도 없이 국민의 세금을, 게다가 독도 문제에 대한 논의도 확실치 않지 않은가? ”
(카와카미 죠타로 일본사회당 위원장)

그리고 한국정부의 대일청구권 포기는 '김종필~오히라(大平) 메모'에서 처음으로 드러났다. 당시 박정희는 오히라 외상과의 회담에 즈음하여 이케다 총리에게 친서를 보내는 등 하루빨리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 지기를 바랐다. 사회당의 반발과 국민들의 대일감정에도 불구하고 이케다 내각과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이 빨리 매듭지워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일본 정치권의 '정국 타개용'으로 활용된 한일회담

특히 박정희 정권에 있어서는 그 자금의 명목이 청구권이 되었든, 독립축하금이 되었든 별로 상관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후일 김종필~오히라 회담의 결과를 보고받고 청구권이 아닌 경제협력, 독립축하금등의 이름이 쓰여진 것을 보고 노발대발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설사 굴욕적인 측면이 있더라도 우리가 이 기회(한일회담)를 살리지 못하면 두고두고 왜놈들에게 더 큰 굴욕을 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다”고 말한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무엇보다 '돈'이 절실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이 한일회담은 일본 정부의 입맛에도 딱 맞아 떨어졌다. 당시 일본정부는 60년 미일안보조약의 갱신으로 무수한 반발을 받고 있어 정국 타개를 위해 뭔가가 필요했었는데, 바로 이 때 '한일 국교정상화'가 묘수로 등장한 것이었다. 그 정국타개를 위해서는 독도문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손대지 않으려고 했던 기색이 역력하다.

62년 9월 3일 '예비절충회의' 기록을 보면, 당시 일 외무성의 이세키 아시아 국장은 ‘독도는 무가치하니 폭파시켜버리자’고 말한 바가 있다. 또 일본 야당이 국제법상 전혀 효력이 없는 ‘이승만 라인(1952년 1월 한국의 영해, 특히 동해수역을 이승만 대통령이 정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인해 독도가 한국땅이 돼버렸다며 ‘이승만라인’의 무효를 강력하게 주장하자 이에 대해 이케다 총리가 ‘(한일회담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힘쓰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을 되풀이했던 것을 보면 이런 심증은 더욱 굳어진다.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변화된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이다. 60년 냉전시대의 본격화로 인해 일본이 병참기지로 후퇴하고 남한은 공산세계와 대립하는 전초기지로서 그 위상(?)을 드높였는데, 실제로 미 케네디 정부는 박정희를 미국에 초청하고,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에게 친서까지 전달하면서 한일 국교정상화에 온 힘을 기울여 줄 것을 당부했다.

노 대통령 3.1절 기념사서 "일본 정부 배상할 일 있으면 배상해야"

62년부터 일본 방위청이 작성해 63년 발표한 군사계획 ‘미쓰야(三矢)작전(한반도 재점령계획)’에 미국 국방성이 참여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은 “미쓰야작전에 등장하는 세 개의 화살은 한국 일본 미국이며, 북한이 먼저 공격을 개시할 경우 어떤 루트를 통해 한반도를 재점령할 것인가를 7단계로 세분화시킨 작전계획”이라고 말한 바 있다. 6차 한일회담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나온 군사작전으로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공교롭지 않은가?

박정희가 한일 국교정상화의 대가로 받은 '돈'을 두고 "이것은 조국근대화로 가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 '6억 달러' 덕분에 포철도 세워졌고, 중화학공업 육성의 기틀이 마련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개인의 청구권 논란과 미국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는 한국의 실상, 무엇보다 과거에 대한 배상문제만 나오면 한일협정을 예로 들며 입닦아 버리는 일본정부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삼일절 기념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정부가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해야 한다"고 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월간 말 3월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1년부터 도쿄거주. 소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 에세이 <이렇게 살아도 돼>, <어른은 어떻게 돼?>,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썼고,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를 번역했다. 최신작은 <쓴다는 것>. 현재 도쿄 테츠야공무점 대표로 재직중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