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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다치 미츠루의 1980년대 작품 <러프>
ⓒ 대원씨아이
참 희한하다. 남녀간의 사랑을 특별한 사건이나 굴곡도 없이 10권이 넘게 그려 나간다. 주인공들의 성격은 밋밋한 듯 보이고, 커다란 야망이나 꿈, 스펙터클한 장면 묘사도 없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 '러프'는 청춘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작품이다. 거칠음, 무질서, 미완성이라는 뜻을 뜻하는 러프(lough)는 바로 청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만화 '비트'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극적 긴장감이 넘치는 '비트'와 달리, '러프'는 너무나 예쁜 한 편의 동화다. 도톰한 코에 커다란 눈, 거기에다 아담한 체구를 가진 주인공들은 영원히 자랄 것 같지 않은 피터팬들이다.

이곳에는 음모나 살인, 난동 등 끔찍하고 기억하기 싫은 것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가벼운 거짓말이나 다툼, 미움 등은 등장하지만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애교로 봐줄 만한 것들이다.

▲ 욕심없는 천재 야마토 케이스께
ⓒ 대원씨아이
러프의 주인공은 수영 경영 선수 야마토 케이스케와 다이빙 선수 니노미야 아미다. 두 집안은 조부 때부터 질긴 악연을 맺고 있다. 똑같이 한 동네에서 과자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니노미야 집안에서 만든 부엉이 과자를 야마토 집안에서 살짝 모방해 결국 니노미야 집안을 파산 직전에 몰아넣는다.

결국 집안의 조부가 야마토 집안 때문에 돌아갔다고 생각한 니노미야 식구들은 야마토라면 이를 간다. 그러나 야마토와 아미가 사랑에 빠져버리니 어찌 보면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인 셈이다.

▲ 여주인공 아미
ⓒ 대원씨아이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처절한 갈등이 전개되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세계에서 처절함은 드러나지 않는다. 화가 났을 때도 눈썹이 올라가는 게 최대치이며, 격투장면이 잠시 뒤 얼굴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난 주인공과 바닥에 드러누운 상대편 인물들을 번갈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다.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죽지 않고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안심이듯이 '러프'에서 보여지는 세계는 너무나 편안함으로 가득한 세계다.

연적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서로 누가 잘 양보하나 내기하는 신사들 같다. '한강수 타령'에서 준호가 옛 애인을 못 잊어 결국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이고,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처럼 연인을 빼앗겼을 때는 눈물도 흘리고 크게 고함도 지르는 게 흔해빠진 사랑의 모습들이겠지만, '러프'의 주인공들은 침묵과 고요 속에 마음을 숨긴다. 기껏 표현한다는 게 '나 너 좋아해'(침묵)이다.

▲ 주인공의 어린 시절
ⓒ 대원씨아이
또한 이 세계에는 악당이 없다. 악당이 있다 해도, 극에 웃음을 주는 삐에로 같은 존재일 뿐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공포를 주는 그런 존재는 아니다.

가령 1권을 펼치면 신입생 군기를 잡기 위해 인상 쓰고 등장하는 상급생 나리따가 등장한다. 건방진 신입생 다섯 명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다. 육상부 쿠메 마사루가 빵을 물고 가다 나무에 부딪혀 떨어뜨리자 눈물을 흘린다. 그 모습에 자신을 얻은 나리따가 '히죽'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접근한다. 잠시 뒤 쿠메 마사루는 자신의 빵을 떨어뜨린 나무를 두 팔로 붙잡고 뽑아버린다.

농구부의 세끼 카즈아끼를 찾아나섰을 때는 키도 작고 체격도 왜소한 모습에 자신감을 얻고 앞에 나선다. 그때 그를 따라다니는 참모가 한마디한다. "입학식 때, 저 녀석 우리 가라데부를 놀려댔다가 부실에 끌려갔었답니다" "그래서?" "다음날 가라데 부원 전부 다 학교에 안 나왔는 걸요."

▲ 절제된 대사들
ⓒ 대원씨아이
그다지 굴곡이 없는 극 전개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까닭은 작가의 개그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나리따의 경우처럼 그는 수시로 반전을 이용한 개그를 선보이며 긴장된 상황을 웃음으로 무마한다.

그리고 수시로 궁금증을 유발하는 연출 솜씨도 한몫 한다. 수영부에 새로 들어온 세끼 카즈아끼를 가르치던 야마토 케이스케는 신입생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자세가 교정돼 속도가 빨라짐을 느낀다.

몸 상태가 최고임을 확신한 그는 니노미야 아미에게 기록을 재줄 것을 부탁하고 뛰어든다. 최고 속도가 갱신될 것임을 누구도 의심치 않게 몰고 가다가, 우발적인 사고가 생기고 결국 독자들에게는 기록이 공개되지 않는다.

이러한 연출방식은 매 이야기의 결론을 뒤로 넘겨 강한 궁금증을 생기게 만드는 우라사와 나오키 못지 않다. 작가가 파놓은 길을 가다 보면 어느새 막다른 길, 다시 작가가 만든 새로운 길을 따라가면서 어느새 독자들은 작가의 이야기 전개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 동물에게도 표정이 있다
ⓒ 대원씨아이
'슬램 덩크'에서 주연과 조연 가릴 것 없이 인물들이 모두 독특한 자기만의 매력을 가진 것처럼 '러프'에서도 매력적인 인물이 넘친다. 묵직한 매력을 뽐내는 키따노 쿄오따로, 저돌적인 세끼 카즈아끼, 누구보다 야구를 사랑하면서 그보다 더한 가족애와 동료애를 보여주는 오가따, 귀여운 쿠메 마사루 등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주인공이다.

아다치 미츠루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그의 작품에는 항상 태평한 천재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태어날 때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재능을 발휘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튀는 걸 좋아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기 위해 항상 적당히 살아간다. 일에 있어서도, 공부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은 그 태평한 천재가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실력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그건 극중 주요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아미를 비롯해서, 그의 연인인 나까니시 히로끼도 야마토가 천재인 걸 알아본다.

아다치 미츠루
'터치'와 'H2' 각각 영화와 드라마화

1951년 2월 9일 태어난 아다치 미츠루는 1970년 쇼각칸에서 발행하던 잡지 소년 선데이지(Shonen Sunday DX)에 '사라진 폭음'(The Fadded Explosion, 消えた爆音)을 게재하며 데뷔했다.

1970년에 '하트의 에이스(Ace of Heart)', '아! 청춘의 갑자원', '나인', '햇살이 좋아' 등을 발표하던 그는 1981년 '터치'를 발표하면서 대번에 인기작가로 떠올랐다.

1980년대에 '쇼트프로그램 1', '슬로우 스텝', '러프' 등을 그렸고, 1990년대에는 '레인보우스토리(일곱빛깔의 고추)', 'H2', '진배', '쇼트프로그램2'를 내놓았다. 매번 스포츠를 소재로 만화를 그리는 그는 실제로 야구를 좋아해 사설야구팀인 '비타민 A'도 갖고 있다.

최근 아다치 미츠루의 과거 작품들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데, '터치'가 최근 일본 영화배급사인 토호영화사가 영화화한다고 밝혀 다시금 화제를 모으고 있고, 'H2'는 내년 1월 일본 TBS에서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될 예정이다.

제20회 쇼각칸만화상 소년소녀코믹스 부문을 수상했고, 1990년에 이미 만화책 판매부수가 1억권을 돌파한 인기작가다.
우리는 너무나 말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밤 TV에서 한 연예인이 재미있는 말 한마디라도 하면 내일 아침 스포츠신문과 포털사이트 뉴스는 난리가 난다. 그 말을 곳곳에서 소개하고, 그 말에 댓글을 달고, 또 밥먹는 자리에서 그 말을 나누느라 여념이 없다.

게다가 너무도 처절한 세상에 살고 있다. 땅값이 오른다고 하면 이웃지간도 원수로 돌아서고, 승진을 위해 동료도 경쟁자가 된다. 그러한 각박함이 너무 힘들다면 잠시 아다치 미츠루의 동화 세계 '러프'에서 휴식을 취해보는 것은 어떨지.

그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성공이나 명예가 아닌 '사랑'과 '사람'이니 말이다. 또한 침묵의 미학을 느껴보는 것도 소음에 지친 몸에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러프 소장판 1

아다치 미츠루 지음, 대원씨아이(만화)(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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