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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북부로 올라가면서 본 들녘, 추수는 끝났다
ⓒ 배지영
과연, 일기 예보를 본 보람이 있다. 창문을 열었더니 비오기 전 흙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사흘을 묵은 호텔에서 완전히 짐을 쌌다. 피렌체를 거쳐 밀라노까지 간다. 마이크에서 들려오는 가이드 목소리는 풀썩이는 흙먼지처럼 자유롭게 버석거렸다. 차창 밖으로 비가 온다.

가이드는 버스 안의 사람들을 포에니 전쟁으로 이끈다. 한니발한테 백전백패하던 로마는 세 번의 포에니 전쟁 중 마지막 전쟁을 이긴다. 승리한 로마는 그리스로 진격한다. 그리스 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다.

아이들에게 전쟁이라면 나쁜 놈, 착한 놈이 눈앞에서 싸우는 거다. 그리고 화해하는 거다. 전쟁을 하는 동안 세월이 흐른다는 것을 알리 없는 아이들은 차창 밖에서 절도 있게 내리꽂는 번개를 구경했다. 무지개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멀어지는 무지개를 보느라 뒷자리로 옮겨갔다. 하! 그리스에 간 로마군도 무지개를 보았겠다.

해찰 좀 했더니 가이드는 기원전 49년의 시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인물, 그는 이순신 장군처럼 프랑스 갈리아 지방을 정복했던 8년 동안 ‘갈리아 전기 8권’을 썼다. 문학가, 혁명가, 연설가, 전략가. 하지만 독재의 마음을 품었다고 해서 살해됐다. 그의 재산은 유언장에 적힌 대로 이름 없는 시민들한테까지 갔다.

고속도로 옆 들판은 가을걷이가 다 끝났나 보다. 젖가슴이 다 보이는 늘어진 '런닝구'를 입고서 담배 피는 할매처럼 가엾고 태평스럽다. 계절이 바뀌면 다시 저기에 밀이 나고, 옥수수가 나고, 담배가 나고, 해바라기가 핀다. 석회질이 많아서 물은 나쁜 대신 벌레도 안 슬어 농사는 잘 될 거다. 그네들은 특유의 먹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에 취해 밤늦게까지 놀 거다.

들판 뒤로 솟은 산꼭대기에는 마을이 있다. 멀어서 안 보이지만 마을마다 종탑과 교회와 광장이 있다고 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27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을 겪으면서 화폐가 발달하고, 상인이 등장하고, 언덕 위 마을들은 도시 국가를 이루며 더욱 발전했다. 지금도 빈 집이 별로 없이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유적지가 아니라 마을이다.

▲ 산꼭대기 마을, 아직도 사람들이 살아간다.
ⓒ 배지영
십자군 전쟁은 사람들의 생각도 바꿔 놓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르네상스 시대를 불러왔다. 피렌체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장사로 돈을 번 메디치 가문에서는 ‘로렌쪼 학교’라는 예술 학교를 세웠다. 어린 미켈란젤로는 이 학교를 다니고 공부해서 위대한 미켈란젤로가 됐다. 인류사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내 생각으로 말랑말랑할 것 같은 라파엘로가 나왔다.

같은 이탈리아인데 로마에서 피렌체로 들어갈 때 버스가 한 번 멈췄다. 사람들이 가만히 차에 앉아 있거나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가이드는 경비 초소 같은 데에서 허가증을 받아왔다. 뭔가 또 새로운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피렌체 거리에는 개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당에는 이탈리아 사람답지 않게 느긋하게 밥상을 차려주고 돌봐주는 사람들이 기다렸다.

가짜 ‘다비드상’이 있는 미켈란젤로 언덕에 서면 왜 피렌체가 꽃의 도시인 줄 알겠다. 꽃이 많아서가 아니다. 저 아래로 500년이나 700년쯤 된 빨간 지붕 집들이 한눈에 보인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저렇게 아름답다. 언덕 위의 사람들 표정은 꽃처럼 예뻐진다. 아이를 보는 내 눈도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트리는 꽃처럼 의연해졌다.

▲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의 다비드상
ⓒ 배지영
아이가 여섯 살이지만 나하고 하루 내내 붙어 지낸 적은 별로 없다. 아이가 나를 닮아 잘난 척을 좋아하는 것 정도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눈물이 잘 터진다. 때리면 맞받아 치지 않고 그냥 있다. 제 물건을 뺏기고 와서 엎드려 가슴을 친다. 고지식해서 몸에 나쁘다는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 나중에 200살 장수 노인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나올 것 같다.

“할아버지! 장수 비결이 뭔가요?”

(들릴락 말락 하게) “툭툭 잘 울어. 누가 때리면 맞지. 어머니랑 여행을 잘 다녔는데 어머니 말을 안 들었어. 옛일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그러니까 기억력도 총명하지.”

▲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피렌체
ⓒ 배지영
아이는 저보다 세 살 많은 '형아'의 수백 가지 매력을 단숨에 알아봤다. 본격적으로 형아만 따라다녔다. 형아네 가족사진까지 껴들었다. 문제는 그 형아네 부모는 결혼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왔다는 거다. 나는 사진 찍어주는 보시를 열심히 했다. 멋진 데가 나오면 무조건 그 부부의 사진을 찍어줬다. 아이 손을 잡고 있어야 한다는 마음을 버리니까 나도 자유롭다.

노점트럭이 있는 골목길을 걸어가 단테 생가에 갔다. 사람들은 개똥을 피하느라 한데 뭉뚱그려 섰다. 그냥 웃음이 났다. 내가 나고 자란 세대 중에서 위인이 나면 문제겠다. 집이 다 부서지고 없으니까. 내 아이 세대가 자라서 위인이 되면 골치겠다. 그 때까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보존한다면 '숭하고 또 숭하겠다.'

▲ 시뇨리아 광장
ⓒ 배지영
시뇨리아 광장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하늘은 파랗고 건물은 물론 오래 되었다. 그래서 한켠에서는 보수 중이다. 광장을 에워싼 작품들은 말을 타거나 맨 몸으로 서 있는데도 '썽썽하다.' 기념품을 파는 노점에 몰린 사람과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 찍으려는 사람이 섞여서 카메라 화면 속 광장은 주인공도 '지나가는 사람 1이나 2'처럼 클로즈업하지 않고 찍은 외로운 영화 같았다.

▲ 노점 트럭
ⓒ 배지영
또 골목길을 걷다 보니까 끝에 뭐가 보였다. 길을 돌아나가기도 전에 우와! 굉장히 크다. 화려하다. 카메라를 어디에 갖다 대야 할지 모르겠다. 분홍색, 하얀색, 초록색의 두오모 성당이다. 일부러 칠한 게 아니라 그 색깔이 나는 천연 대리석이다.

몇 백 년에 걸쳐 성당을 짓는 동안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은 하늘의 구름처럼 정처 없나? 구름은 부드럽고 가볍게 성당을 감싸다가 멀어졌다. 나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고 찾아온 일본 사람처럼 로맨틱하게 굴고 싶어졌다.

▲ 피렌체 두오모 성당
ⓒ 배지영

▲ 피렌체 두오모 성당
ⓒ 배지영
버스는 북쪽 밀라노로 간다. 가이드는 기차를 타고 로마로 돌아간다. 그는 아이와 아내가 있는 로마에서 다시 다빈치 공항으로 나가 새로운 한국 사람들을 맞을 거다. 폼페이, 카프리에 다녀오고, 로마를 돌고, 피렌체까지 올 거다. 사람을 만나서 얘기하고 그러다가 헤어지는 게 그의 일상인데도 그는 감성과 열정이 넘쳤다.

밀라노 가는 길은 고도가 높아졌다. 샤워하고 귀에 물 들어갔을 때 한 쪽으로 고개를 젖히고 한 쪽 발로 쿵쿵 뛰면 물이 탁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멍멍했다. 촌스러운 일이지만 입을 크게 벌렸다가 다물었다가 했다. 잠든 아이의 가방 속 초코파이 봉지도 팽팽해졌을 거다.

어둡고 쌀쌀한 밤거리를 걸어 피렌체 성당과 이름이 같은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에 갔다. 역시 웅장한 대리석이다. 피렌체 성당이 봄 아지랑이 같다면 밀라노 성당은 차갑다. 건물 끝은 고드름처럼 날카롭다. 성당은 구찌, 루이비통이 있는 거리로 이어졌다. 제 3세계 민족으로 보이는 파카 차림의 남자들이 잘 차려입은 남자들에게 다가가 여자 친구 줄 꽃을 사 주라고 따라다녔다.

▲ 밀라노 두오모 성당
ⓒ 배지영

▲ 레오나르도 다빈치 동상, 그는 르네상스의 영광을 미켈란젤로에게 주고 살짝 비켜 서 있는 듯 하다
ⓒ 배지영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라는 라 스칼라 극장은 보수 중이다. 길은 거미줄처럼 복잡해서 잘못 들면 빠져 나오기가 힘들다는데 버스를 운전하는 카를로는 밀라노가 집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는 게 이탈리아 사람들이지만 카를로의 아내는 두 딸을 키우며 집을 지키고 있다. 오늘 밤, 카를로는 집에 가서 한국 사람들 웃음소리 때문에 제대로 못 푼 코를 실컷 풀 수도 있겠다.

이탈리아에서는 호텔로 들어오는 장면이 언제나 같다. 잠든 아이를 업고 (가방을 끌고 메고) 호텔 방 앞에 선다. 북유럽의 스튜어디스들이 묵는 호텔이라도 별 수 없다. 문 앞에서 긴장한다. 열고 들어가서도 몸이 바로 편해지지 않는다. 애써 번 돈을 감나무 밑에 묻고서 ‘여기 돈 안 묻었음’ 써 놓는 바보처럼 잠긴 문 앞에서 한참 서성인다.

아이를 눕히고 커튼을 걷어 밤거리를 봤다. 못 사는 동유럽의 어여쁜 아가씨들이 선금을 받고 밀라노로 온다. 밤이면 돈을 갚기 위해 이 호텔 저 호텔로 다닌다. 거리는 적막했다. 오늘은 떠돌지 않아도 문 열어주는 사람들이 많은가. 밝는 날, 돌아가는 아가씨들의 신산한 발걸음 앞에도 무지개가 뜰런가.

불 끄는 데를 못 찾아서 수건으로 스탠드 불빛을 가리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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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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