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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안 큰샘. 내집 골목어귀에 있는 샘이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는 없어도 사시사철 맑은 물이 마르지않고 솟아 흘러 큰샘이라 했던가?

바가지로 샘물을 듬뿍 퍼담아 벌컥벌컥 들이켜도 물리지 않고, 어린이고 노인이고 앉아서 떠 마실 수 있는 얕은 샘. 이 샘이 근동에 소문난 큰샘이다.

샘은 본시 이곳 강진의 지형이 누워있는 소의 형국인데 이곳이 바로 소의 왼쪽 눈에 해당한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고, 샘가에는 수백년된 팽나무가 오늘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또한 그 고목 그늘에는 다산 정약용선생께서 이 고장 강진에 유배를 오셔서 처음 사셨던 곳이라는 내용을 새긴 비석 하나가 떡 버티고 앉아 있다.

▲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강진에 처음 유배오셔서 사셨던 곳을 기리는 기념비
ⓒ 장생주
자고새면 쏘다니던 그 고샅. 그 샘터다. 10여년을 우리 가족이 살았고 지금도 아까워 차마 팔지 못하고 지니고 있는 내 정든 시골집이다보니 정이 들대로 들었다.

늘 한적한 골목. 이곳 샘터는 네거리길이라 제법 북적거릴법도 한데 조용한 한낮이면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와 이따금 과일장수와 계란장수가 와서 떠들다 갈 뿐 항시 조용하다. 그러나 이 골목에 들면 동쪽으로 몇 발자욱께의 다산연구원과 수녀들의 수련원의 건물이 뭔가 마음을 새롭게 하기도 하고 다산 정약용선생을 생각하게 된다.

다산 정약용선생. 선생은 실학을 총집대성하신 조선의 위대한 학자요 시인이요 화가요 정치가이시다. 그런데 선생께서 이곳 강진땅 동문밖 주막(바로 이곳 큰샘가)으로 처음 유배를 오신 건 1801년 11월22일. 쌀쌀한 어느 가을날이었다. 한때는 임금을 가르치셨던 분이요 홍문관수찬,경기도 암행어사,황해도 곡산부사,형조참의,병조참의 등 나라의 요직을 두루 거치셨던 명망 높으신 분이 이곳까지 유배를 오신 것이다. 남달리 학문에 심취한 그가 서양문물을 접하고자 읽었던 책이 서양책이었고,그로인해 천주교신자로 몰려 귀양살이를 살게 된 정약용선생님! 창구멍이 숭숭 뚫린 주막집에서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생각하면 한스러운 인생이다. 정조임금만 살았어도 이 지경이 아니었을텐데 경상도 장기로,전라도 강진으로,유배를 오게 되었으니 언제 다시 살아 돌아 갈 것인가? 그러나 역시 그는 큰 나무 큰 사람이셨다. 이곳에 온 처음 몇 달 간은 두문불출 술로 소일하던 선생께서는 거처하는 동문밖 주막집 방을 사의제(四宜齊)라 이름하고 다시 책을 가까이 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벽에 사의제잠도의 글귀를 써붙여 놓고 스스로를 달래며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생각은 맑게 하되
맑지 않으면 더욱 맑게 하고,
용모는 단정히 하되
단정치 않으면 더욱 엄숙케 하고,
말은 요점만 말하되
요점이 전달되지 않으면 더욱 잔말을 줄이고,
행동을 무겁게 하되
무겁지 않으면 더욱 중후하게 하라.


또한 다산 선생께서는 사의제에서 주막집 노파의 아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인근에서 모여 든 아이들을 위해 2000자로 된 아학편훈의란 책을 손수 지어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이따금 찾아드는 외로움을 달랠길이 없었다. 그럴 때면 서성이던 그 샘가. 그 고목. 어쩌면 그 한 그루의 고목이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무료하면 쳐다보는 북산.고향생각이 날적마다 바라보는 만덕산. 죄인 된 몸으로사 모두가 그림의 떡이 아니던가?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문밖 출입이 다소 자유스러워졌다. 그리하여 선생께서는 이곳에 온지 4년만에 읍에서 30리길인 백련사를 찾아 나섰다. 백련사는 8대사 8국사를 배출한 대가람으로 경관도 일품이요 유명한 스님도 많았다. 선생은 그곳에서 혜장스님을 만났다. 혜장선사는 그 보다 10살이나 젊고, 불교에 대해서도 꽤 깊이 알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가 졌다. 선생은 죄인의 신분이라 다시 주막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젊은 스님 생각이 간절했다. 엎치락 뒷치락 잠을 청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밤이 깊었는데 혜장선사가 사의제를 찾아 왔다. 두사람은 그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그때부터 정약용선생은 혜장선사와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혜장선사의 도움으로 아예 거처를 북산너머 우두봉 기슭에 있는 고성암으로 옮겼다. 선생은 그곳을 또 보은산방이라 이름을 붙이고 그곳에서 책과 시와 차를 벗하며 살았다. 그리고 고향에 있던 아들들을 번갈아 데려와서는 공부를 가르치기도 하며 세월을 보냈다.

또 몇년이 흘렀다. 정약용선생은 1808년 봄에 도암면 만덕리 귤동부락 뒷산에 있는 다산(茶山)기슭에 있는 귤림처사 윤단이라는 사람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다산 정약용선생은 마음이 다소 안정이 되어 18명의 제자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했다. 그리하여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8권이나 되는 방대한 책을 저술했으며 실학을 총 집대성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생각하면 선생께서는 이곳 동문밖 주막에서 4년, 고성암에서 4년, 다산초당에서 10년, 모두 18년이란 긴 세월을 이고장 강진에서 견디기 어려운 유배생활을 하셨다. 그러나 선생은 결코 유배지의 한을 좌절과 절망으로 삭이거나 실패로 끝내지는 아니했다. 어찌보면 인간적으로는 가장 불행한 역경을 불굴의 투지와 학문연구로 끝내 위대한 승리자가 되셨다.

▲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4년동안 사셨던 곳에 우뚝 선 고목
ⓒ 장생주


정말 자랑스러운 위인이시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각고의 학문연구로 인생을 승리로 이끄신 다산 정약용선생님! 선생께서 머물다 가신 그 샘가에 오늘도 또 찾아와 서성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을 함부로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리고 왠지 그 고샅. 그 샘.그 나무가 범상치가 않아 보인다.

어쩌면 선생께서 날마다 우러르며 지켜 보았을 저 한 그루의 고목. 우러러 볼 수록 외경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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