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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선이 확정된 직 후 민주당사에서 꽃다발을 받은 노무현 당선자와 권양숙 여사.
ⓒ 마이너
한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승리했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 북한의 비밀 핵개발 파문, 여중생 사망 사건 무죄 평결, 미국의 북한 미사일 수출 선박 나포, 북한의 동결 핵시설 해제 선언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한국의 대선은 사상 유래 없는 국제적 관심을 촉발시켰다. 주요 외신들이 이번 대선을 "대북관계와 대미관계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국민투표"라는 의미를 부여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내적으로 "새로운 정치" 대 "낡은 정치"로 상징되었던 16대 대선은 한국 시민사회와 세계 시민사회와의 대화이기도 했다. 대선을 앞두고 불거진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는 단순히 한반도 내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들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전체의 질서와 전세계의 비확산체제는 적지 않은 변화가 불가피하다. 동시에 화해와 협력, 평화와 통일의 대상인 북한이, 남한의 동맹이자 우방인 미국의 군사 패권주의에 맞서 벌이고 있는 '생존 게임'에서 야기되는 딜레마는 향후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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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부시 행정부 출범이후 점차 고조되어 오다가, 여중생 사건 무죄 평결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이것이 이번 선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도 결코 '한국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이미 독일 총선에서 사민당 연정이 '이라크 전쟁 반대'를 전면화하면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 12월 초에는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에 사용되는 레이더 기지에 대해 '건설 반대'를 공약으로 들고 나온 덴마크의 진보정당들이 그린랜드 선거에서 승리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처럼 부시의 오만한 일방주의와 위험한 군사주의를 막아야 한다는 세계 시민사회의 염원과 결의는 점차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수평적인 한미관계'와 '대북포용정책'의 계승을 들고 나온 노무현 후보의 당선이 국제사회에 전하는 메시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새로운 세대의 주도로, '인터넷'을 비롯한 새로운 수단을 통해, 새로운 정치 리더십을 탄생시킨 한국 시민사회의 역동성은 보수 정부의 집권을 기다려온 부시 행정부의 바람마저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새로운 정치'의 승리라는 국내 정치적 의미 못지 않게, '탈냉전 세력'의 승리라는 세계사적 의의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의는 동시에 노무현 당선자에게 결코 쉽지 않은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강경정책에 맞서 핵카드를 다시 꺼내든 북한은 물론이고, 북한위협론에 기대어 군사 패권주의를 강화해온 부시 행정부를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부시 행정부 출범이후 지연된 '한반도의 냉전구조 해체와 통일기반 조성'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한 내부의 갈등 해소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의 이해관계 재조정이라는 근본적인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또한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바로잡고, 새로운 동맹관계의 모델을 창출하는 것 역시 중대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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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사앞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알리는 신문을 들고 환호하는 지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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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북한에 보내진 '복잡한' 메시지

흔히 국제정치학계에서는 "국가안보는 다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강조한다. 한국적 현실에서 '국가'안보를 '정권'안보를 위해 악용된 사례들이 많아 '국가안보'라는 단어 자체가 다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안보가 공동체 및 개개인의 삶의 전제조건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노무현 당선자도 대선 유세과정에서 강조한 것처럼, 지금 한반도는 '전쟁이냐, 평화냐'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이는 이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노무현 당선자의 공약과 정치적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환경조차 만들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노무현 정부의 5년은 물론이고, 한국의 미래 역시 북핵 문제를 비롯한 북미간의 대결구조를 어떻게 푸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일단 노무현 후보의 당선이 북한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전하는 메시지는 '기회'를 내포한 대단히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출범직후부터 "북한과 협상하라"는 김대중 정부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면서 대북강경책으로 일관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서의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높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는 노무현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부시 행정부로서도 중대한 선택의 기로를 맞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즉, 노무현 정부를 김대중 정부와 마찬가지로 계속 '무시'하면서 대북강경책으로 일관할 것인지, 아니면 대북강경기조를 누그러뜨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소극적으로나마' 협력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북한에게 던져진 메시지도 대단히 복잡하다. 북한이 미국을 위시한 국제사회의 강한 반발과 고립을 야기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핵카드'를 다시 꺼내든 것은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다음에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불안감에는 남한에서 정권 교체가 이뤄질 경우, 강경기조의 '한-미-일 대북압박 구조'가 탄생할 수 있다는 생각도 깔려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북한의 대외정책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기회적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즉,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할 수 있게 됐다"는 판단을 김정일 정권이 내릴 경우, 핵문제에 있어서도 과감한 양보를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역시 '난감한 기회'를 맞이하게 됐다. 고이즈미 정부가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과감한 대북독자외교를 펼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김대중 정부의 역할에 있었던 만큼, 남한의 차기 정부가 어떤 대북정책 및 대미관계를 추진하느냐에 따라 일본의 대북독자외교도 심각한 기로에 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와중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일본은 '미국의 그늘로 다시 복귀하느냐', '남한과의 공조를 바탕으로 대북독자외교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느냐'는 딜레마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위기와 기회의 기로에서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직면하게 될 도전의 무게는 일반적인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 될 것이다. 당장 이라크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로부터 참전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국제사회의 강한 반발과 기술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2004년까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지상 MD를 배치하기로 결정하고, 유럽과 동아시아 동맹국들에게 참여 압력을 노골적으로 행사해온 부시 행정부의 시야에서 노무현 정부도 예외일 수 없다. 무엇보다도 북한 핵문제 해결의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유력한 방안인 '대북 협상'을 부시 행정부가 수용할 가능성도 극히 낮다고 할 수 있다.

국민들의 가장 큰 염원이자, 노무현 당선자 스스로도 약속한 한미행정협정(SOFA)을 개정하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 내에 점증하는 반미감정을 해결하고 주한미군의 안정적인 주둔 환경을 마련해달라"는 부시 행정부의 '뒤바뀐 요구'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북핵 문제는 노무현 정부의 정치력과 외교력을 가늠할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미국이 2003년 1월부터 중유 제공 예산 취소, 경수로 사업 중단, 이라크 전쟁 강행 등 '예정된' 수순을 계속 밟아나갈 경우, 북한 역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의 봉인과 감시 카메라를 일방적으로 제거하는 등, 보복 조치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여기까지 악화되면, 노무현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위기의 한반도'를 만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무현 당선자는 이제 곧 떠날 김대중 정부와 긴밀한 협력을 통해, 1차적으로 파국을 막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에 특사 파견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대북 특사를 통해, 북한이 우려하는 미국의 북한 공격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이를 위해 남한 정부가 최선을 다할 것임을 주지시키고, 최소한 북한이 봉인된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하는 수순을 밟지 말 것을 강력히 요청해야 할 것이다.

또한 대미 특사를 통해서는 중유 제공 중단에 이어, 경수로 사업 마저 중단하면, 상황은 파국에 직면할 것임으로, 이러한 조치에 남한 정부는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특히 북한의 핵무장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바람직한 방법은 '협상'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일본과의 공조를 통해 부시 행정부를 설득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렇듯 노무현 당선자가 김대중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북핵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초당적인 협력과 국민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대북관계는 물론, 대미관계 역시 '과도기적 전환점'에 있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기대' 못지 않게 '불만' 역시 커질 수 있다. 따라서 노무현 당선자는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한 초당적인 협력과 국민적인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비록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지만, 노무현 후보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된 만큼, 더욱 중요하게는 한반도 위기의 최대 피해자는 한민족이 될 수밖에 없는 만큼, 야당과 언론은 노무현 당선자의 발목을 잡는 어리석은 우를 또 다시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시간은 약이 아닌 독'이며, 소중한 힘과 지혜를 또 다시 남남갈등으로 유실할 경우 한반도의 위기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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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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