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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휠체어를 타고 여의도공원을 출발하는 노무현 후보. ⓒ 오마이뉴스 권우성
장애인이동권연대의 1호선 시청역 기습점거가 있었던 다음날인 12일.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자신의 56번째 생일날, 눈과 귀를 막고 다리도 묶은 채 '1일 장애체험'에 나섰다.

노 후보는 연신 답답함을 호소하면서도 동참한 몇몇 의원들과는 달리 체험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행사에 참여한 100여명의 장애인들로부터 "역시 노무현이다"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사회복지재단측은 종로3가 국일관에서의 간담회를 마친 뒤 노 후보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조촐한 파티도 준비하는 등 노 후보는 이날 행사에 참석한 장애인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받기도 했다.

한국사회복지재단의 제안으로 실시된 '1일 장애체험'은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약 5시간 동안 진행됐다. 노 후보는 이날 행사 내내 지하철역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계단을 오를 때는 눈가리개를 한 채, 영화를 볼 때는 귀마개를 하며 관람하는 등 전시용 행사로 인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휠체어 타고 여의도 지하철역까지

1일 장애 체험은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이용해 봄으로써 지체장애인의 보행권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 순서로 시작됐다. 오전 9시 여의도 공원. 노무현 후보는 김화중 의원과 함께 '생애 처음' 휠체어에 올랐다. 여의도 공원에서부터 시작된 지체장애 체험에 노 후보는 다소 흥분된 표정으로 혼자 멀찌감치 앞서나가며 직장인·학생들과 인사를 나눴다.

마침 등교를 위해 여의도 지하철 역 주변을 지나가던 여고생들은 한결같이 "야! 노무현이다"라고 외치면서도 휠체어에 탄 노 후보의 모습에 익숙하지 않은 듯 "왜 휠체어에 앉아 있지"라고 간간이 물음을 던지기도 했다.

오전 9시35분 5호선 여의도 3번 출구. 외부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철에 탑승한 노 후보는 지하철 승객에 불편을 주는 것이 못내 미안했던 탓인지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어디에 있어야 되나요"라고 승객들 몇몇에 양해를 구하고는 차량 한 가운데에 멈춰섰다.

▲ 장애체험 행사에 동행한 자폐증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과 얘기를 나눠보려는 노무현 후보. ⓒ 오마이뉴스 권우성
노무현 후보는 지하철 안에 있는 동안 장애인들의 현실적 불편사항을 경청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장애아를 둔 한 어머니는 "발달장애아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수립이 필요하다"며 자폐증을 앓고 있는 두 어린이를 노 후보에게 소개시켰으며 대구대학교를 졸업하고 마땅한 직장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시각 장애인 김호진양은 "시각장애인 취업 대책 마련에도 신경을 써 달라"고 주문했다.

9시 55분께 종로 3가 지하철역에 도착한 노 후보는 휠체어를 탄 채 리프트를 이용해 출입구까지 올라갔다. 이마에 땀이 맺힌 노 후보는 리프트의 느린 속도 때문인지 "생활의 속도 개념이 달라야 하겠습니다"라며 급한 마음을 다잡았다. 리프트에서 내릴 즈음에는 "브레이크를 풀어도 뒤로 안가나"라며 불안해했으나 이내 안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가리개 한 노무현 "육상에 올라왔습니까"

리프트를 타고 종로 3가 지하철역 지하 2층까지 올라온 노 후보는 이번엔 눈가리개로 시야를 막고 시각장애 체험에 들어갔다. 노 후보는 한 명의 보조요원과 안내봉에 의지한 채 종로 3가 지하철역에서 서울극장까지 유도블럭을 따라 힘겹게 걸어갔다. 때론 발을 헛디뎌 주춤거리기도 했고, 때론 "육상에 올라온 겁니까"라고 물으며 서 있는 위치마저 확인할 수 없는 데 대한 갑갑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결국 노 후보의 입에서는 이 말이 터져 나왔다. "아 답답하네 정말."

▲ 종로3가역에서 휠체어 승강기를 타고 있는 노무현 후보. ⓒ 오마이뉴스 권우성
장애인의 사랑을 소재로 제작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를 관람하기 위해 눈가리개를 한 채 서울극장을 찾은 노 후보는 이번엔 귀를 막고 청각장애 체험을 시작했다. 귀에는 손톱만한 크기의 귀마개 꽂고 헤드폰을 덮은 채 김경재·김화중 의원과 조용히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가 끝난 뒤 "귀를 막고 본 소감이 어떤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노 후보는 "그래도 다 들려서 영화를 잘 이해했다"며 싱거운 웃음을 슬며시 지어 보였다.

이날 서울극장에는 한국사회복지재단의 제안으로 영화관람에 이창동 감독과 주연배우 문소리씨가 참석했다. 이창동 감독은 노무현 후보와 함께 자신의 영화를 감상한 데 대해 감사를 표하며 짧은 소감을 전했다.

귀마개로 막고 <오아시스> 관람

"노 후보께서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분들과 함께 보시기 위해 와 줘서 감사합니다. 영화를 보셔서 알겠지만 장애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고정관념을 미화하지 않고 깨보려 했습니다. 노 후보님도 같은 생각을 갖고, 노력하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노 후보의 생일이라고 하는데 이런 자리를 통해 기념하려는 것을 가슴 깊이 공감합니다."

▲ 휠체어를 타고 여의도에서 종로3가역까지 이동한 노무현 후보가 시각장애인 체험복장을 한 채 서울극장으로 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오후 1시께 종로 3가 국일관에 도착해서도 노 후보는 눈가리개를 한 채 점심식사를 했다. 노 후보는 테이블 곳곳을 차려진 반찬을 수저로 더듬어가며 조금씩 조금씩 입어 넣어 보려 애를 썼지만 마음만큼 잘 되지 않았다.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리는가 하면 젓가락을 잘 못 짚어 도토리묵을 탕이 담긴 그릇 속으로 빠뜨리기도 했다. 갈비탕의 간이 입에 맞지 않아 양념을 숟가락으로 퍼들었으나 "양을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며 난감을 표한 뒤 한 움큼 진 양념을 탕 속으로 섞어 넣어 버려, 주위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진 간담회장. 장애인협회 관계자들은 현 정부의 장애인 대책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최종진 농아협회 과장은 "청각 장애인들은 영화를 보려해도 자막이 없어 흐름을 파악할 수가 없다"며 "3년 전부터 시작된 장애인 영화제에 정부 예산이 배정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한 참석자는 "장애인 복지시설에 수용되는 조건이 현실성이 없다"며 법개정을 통한 대책마련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노무현 후보는 "특권 없는 사회를 만드는 일만큼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장애인이 장애를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이창동 감독 "정치가 달라져야 영화도 변화"

- 장애인과 관련한 영화를 제작한 한 사람으로서 장애 체험에 참석한 노무현 후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노무현 후보를) 잘 알지는 못하나 다만 정치하시는 분들 가끔 이런 행사를 하지 않는가. 과시적, 전시적인 행사였다면 이곳에 오거나 같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간 이런 일들을 몸소 해오신 분이므로 노 후보의 정치 역정을 통해 그야말로 내실있는 발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계속 지켜보겠다."

- 노 후보가 참석한 이 행사가 혹 전시적, 과시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나.
"이 모임은 짧은 것이고 상징적인 것이다."

- 노무현 후보에 대한 평소 생각을 듣고 싶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시간이 없어서 못 도와 드리는 것이 안타깝다. 노문모(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의 모임)에도 참여했다. 물론 서명까지도 했다. 정치가 달라지지 않는 이상 영화를 포함한 다른 분야가 뭐가 달라지겠는가. 돕고 싶다."

- 혹 다른 대통령 후보가 장애인 체험 행사를 기획해 참여할 것을 제안하면 승낙할 생각인가.
"누가 대통령이 되냐 안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자리 자체가 정치적으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민 한국사회복지재단 의장 ""장애인 복지대책 대선공약에 반영됐으면""

- 이 행사를 누가 먼저 제안했나.
"우리쪽에서 먼저 제안을 했다. 노 후보쪽에서 우리 안을 흔쾌히 승낙해 줘 성사됐다. 그 점에 대해 감사드린다."

- 노 후보를 지켜 본 소감은 어떤가.
"이전부터 사고가 열려 있는 분이라고 알고 있었다. 워낙 열려 있는 분이라 잘 해 내리라 믿고 있었다."

- 오늘 행사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일단 흡족하다고 할 수 있다. 행사에 참여한 것만으로 그 정도 평가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조만간 이회창 후보에게도 같은 제안을 할 생각이다."

- 노 후보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흐지부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장애우에 대한 복지 대책이 대선 공약에 반영되기를 부탁드린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이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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