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말 의병을 30여 년 연구를 해 오고 있습니다. 대표 저서: 의병 찾아가는 길1.2,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 1~4(중명출판사) 한국의병사(상.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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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의병장으로서 경성감옥 순국 1호는 허위 의병장이 아니라, 이강년 의병장입니다. 그리고, 감옥이름도 적확해야 합니다. 1908년 10월 21일 신식(개량식) 감옥인 경성감옥을 준공합니다. 실제는 그보다 앞서 10월 초순부터 의병이나 의병장의 이감과 교수형 집행은 시작되었습니다. 경성감옥도 넘쳐나서 마포에 새 감옥을 지어 경성감옥이라 하고, 종전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 그 후 10여 년 뒤에 감옥 대신 `형무소`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이른바 서대문형무소가 되었습니다. 이강년, 허위 의병장은 각 경성감옥 순국 의병장 1호, 2호인 셈입니다. 국사책이나 각종 사전은 식민사학자들이 왜곡한 것을 그대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2. 내란죄인(內亂罪人) 이강년(李康年)을 교수형에 처하였다. 법부에서 상주(上奏)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순종 1년 10월 8일) 내란죄인 허위(許蔿)를 교수형에 처하였다. 법부에서 상주하였기 때문이다. (10월 13일) 실제 교수형 집행은 허위 의병장은 1908년 10월 21일 순국하고, 그에 앞서 광무황제로부터 도체찰사로 임명된 바 있던 13도창의진 호서(충청도) 의병대장 이강년 의병장이 10월 13일 경성감옥(뒤에 서대문감옥, 뒤에 서대문형무소) 순국1호입니다. 국사책은 왜곡입니다. 이 같은 왜곡은 이강년 의병장은 광무황제 퇴위 직전에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최후의 투쟁을 벌이려고 했던 사실을 숨기려는 식민사학자들의 음모입니다. 이를 지난 8.15KBS 특집에서 말했지만, 편집으로...!
  3. 이 글을 늦게 보았다. 소설인가? 기사인가? `임오군란 이후로 12년 동안 조선 정치는 청나라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고? 1884년 갑오왜란(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른바 `갑신5적`이 일본군 140명 지원하애 쿠데타를 일으켜서 3일 만에 홍영식은 죽고, 4명은 일본으로 달아났지만, 일제는 이것을 빌미로 `개화`, `독립`을 쌍칼을 휘두르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 졌기 때문에 그때부터 일본 침략이 시작된 것은 더욱 아니다.
  4. 광무황제(고종은 이태왕의 시호. 고종황제 부적절)가 무능했는지도 좀더 연구해 봐야 알 수가 있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한 식민사학이 아직도 그대로.... 어째서 이런 기사가 아무런 검정없이 나오는지.....! 실록, 승정원일기 등과 통감부기록,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등 일제의 기록을 비교 검토가 끝나야 비로소 광무황제, 명성황후, 융희황제에 대한 인물사, 나아가 근대사를 쓸 수 있다.
  5. 자세한 것은 이태룡, 한국의병사(하) 참조
  6.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에 의해 훈련된 부대가 경복궁을 포위하고 저항하던 근위군을 일축한 다음 일본에서 파견한 30여 명의 자객들이 난입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일본에 의해 훈련된 부대는 조선의 훈련대를 뜻하고, 자객도 30명에 불과한 것으로....매우 왜곡된 것이다.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공사가 지휘하는 일본군 3개 중대 500여 명과 일제앞잡이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 2대대 500여 명은 궁궐에 난입했고, 이두황이 이끈 훈련대 1대대는 경복궁 밖을 에워쌌다. 그리하여 우범선의 2대대는 일본군을 호위하는 짓을 하고, 일본군과 자객은 왕비를 포함 4명을 참살 후 유방검사(궁녀는 처녀, 왕비만 44세 유부녀) 후 시신을 확인, 궁궐 뒤뜰에서 불태웠던 만행이었다.
  7. 궁중 안의 푸닥거리에 대하여 국왕과 왕비의 잘못을 간한 사간은 경남 의령 출신 안효제와 권봉희가 있었다. 1893년 권봉희는 국왕, 안효제는 왕비를 극간했는데, 안은 추자도로, 권은 흑산도로 유배갔다. 이듬해 갑오농민혁명으로 전라도 김제와 경상도 흥해에 군수로 나갈 사람이 없자, 일제앞잡이 내각은 두 사람을 불러 안은 흥해군수로, 권은 김제군수로 보냈다.
  8. 역사소설도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를 구성해야 하지만, 하물며 역사적 사실을 다룬 기사는 사실의 한 부분만 다루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민비 참살은 이른바 `여우사냥`이라는 작전으로 일본공사관기록에도 일본군 3개중대와 큐수에서 데리고 간 50여 명의 지사(자객을 일컫는 말)가 동원되었고, 일본공사가 지휘했다는 것이 명백한데.... `진령군`의 군호는 사실이지만, 하찮은 푸닥거리를 한 무당에 불과했고, 실록, 승정원일기를 보면, 두어 차례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조선을 망하게 한, 자신을 죽게한 원인이 될 수 없다.
  9. 왜곡된 기사다. 민비가 낳은 2남2녀 중 융희황제(순종은 이왕의 시호. 용어 잘못)를 제외하고 대부분 낳자마자 얼마 후 죽었다. 굿을 몇 차례 하고, 금강산 사찰에 기도하라고 했다. 청군을 불러들인 내용도 잘못이다.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지석영은 일제앞잡이로 동학농민군 학살하기 위해 당시 동래부(부산) 일본군 앞잡이가 되어 진주, 하동까지 진출했다. 민비(뒤에 명성황후)는 일본군 3개중대 약 500여 명과 일본 큐수 자객 50여 명에 의해 참살되었다. 일제의 만행을 왜곡하지 마라!
  10. 이병도 제자와 그 제자의 제자들로 구성된 국사편찬위원회가 국정 교과서를 맡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역사조작과 왜곡은 불을 보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