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묵직한 무게의 박스가 거실 바닥에 놓이자 동생들과 신이 나서 앞다퉈 박스를 열었다. 전집이 가득 들어있는 책 박스를 여는 순간, 새 책 특유의 냄새가 금세 코 끝에 와닿았다. 내가 제일 먼저 들쳐볼 수 있는 새 책의 빳빳한 첫 장을 넘길 때의 기분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헌책방만의 매력

까마득히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어서인지 새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새 책 만큼 좋아하는 건 헌책이다. 헌책은 또 헌책만의 매력이 있지. 그래서 헌책방에 가는 일도 좋아하는 일 중 하나다.

헌책방에 모인 책들엔 어떤 이유가 있을까. 다 읽어서, 또는 재밌어 보여서 샀는데 읽어보니 그렇지 않아서, 또는 선물을 받았지만 내 취향의 책이 아니어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느 작가님은 헌책방에서 자신의 책을 발견하면 그 책을 산다고 했다. 자신의 책이 헌책방에 있는 게 싫어서라고 했다. 그렇게 산 책들을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준 뒤 더 이상 나눠줄 사람이 없게 되자, 그는 책을 손수 불태워버렸다. 어떤 마음인지 모르겠던 건 아니었지만, 귀한 책이 그렇게 사라지는 게 아쉬웠다.

헌책방에 있던 어떤 책들은 또 다른 이에게 닿아 아끼는 책이 되기도 한다. 나의 책장에 있는 몇 권의 책들도 그렇다.

책들이 어떤 이유로 헌책방에 놓여 있든, 헌책방을 찾는 손님의 입장에서 책방에 들어설 때의 기분은 마치 보물찾기를 시작할 때 같기도 하다.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에 갔을 때였다.

골목골목은 물론, 책방마다 천장 끝까지 가득 가득 쌓여 있는 책들의 풍경에 먼저 입이 벌어졌고, 그 속을 누비다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았을 때의 기분은 더없이 좋았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헌책방의 책들은 왠지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안동 깊은 시골에 위치한 어느 헌책방

사설이 길었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 어느 헌책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이런 긴 서두를 꺼내들게 되었다.

3~4년 전쯤이던가. 안동의 시골 어딘가에 헌책방이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접하게 됐다. 그 사실 하나만 알고 있다가 어느 날 주소만 찾아 들고 여행가듯 훌쩍 책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은 자꾸만 나를 구불구불 깊숙한 시골길로 이끌었다. 좁은 시골길을 따라 오르고 올라 꽤 고지까지 왔다고 느꼈을 때쯤, 하필 맞은편에서는 마을 버스가 오고 있었다. 옆은 낭떠러지인지라 나도 모르게 잠시 얼음이 되었다가 거북이처럼 움직여 버스가 지나갈 공간을 겨우 만들었다. 
 
안동 헌책방 '책마을'로 가는 길, 차창 밖 풍경
 안동 헌책방 '책마을'로 가는 길, 차창 밖 풍경
ⓒ 배은설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나홀로 식은땀을 흘리기도 하며 책방에 다와 갈 때쯤, '책마을'이라는 작은 나무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화살표를 따라 내려가자 푸른 안동호가 눈앞에 펼쳐진 한적한 곳에 자리한 작은 폐교가 나왔다. 폐교를 다듬어 헌책방으로 만드신 듯했다.

학교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야말로 헌책이 가득했다. 각 교실은 물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한 쪽 편도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서가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도 많았고, 바닥에 투박하게 쌓여 있는 책들도 많았다.

이곳은 무척 조용했는데, 오래전 책들이 가득한 곳을 천천히 걸으며 책 구경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책 구경을 하다 몇몇 권의 책들을 펼치면, 그 순간 책들이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조용하지만 또 와글와글했고, 분명 혼자지만 또 혼자는 아니게 되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고요한 곳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뒤 마음에 드는 책 두 세권을 집어 들고 책방 사장님께 갔다. 그런데 사장님은 현금이 없어 계좌이체를 하려는 내게 그냥 책을 가져가라 말씀하셨다. 몇 번의 고사에도 책을 내주시는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사장님을 보며 '사장님 돈 많이 버시긴 글렀네' 혼자 생각했다.

더 이상 가지 못하는 책방에 대한 아쉬움

그로부터 한 달 후쯤, 나는 먹을거리를 들고 다시 책방을 찾았다. 하지만 사장님은 부재중이셨다. 책을 주신 감사함을 소소하게나마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좋은 책방을 아이와 신랑에게 보여주고도 싶었는데,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근방을 지나다 문득 책방 생각이 났다. 무작정 책방으로 향했다. 그때와 다름없이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한참 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은 닫혀 있었다. 
 
폐교를 다듬어 만든 헌책방 '책마을' 전경
 폐교를 다듬어 만든 헌책방 '책마을' 전경
ⓒ 배은설

관련사진보기

 
책방으로 전화를 걸자 사장님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헌책방 개방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온라인으로만 책을 판매한다고 하셨다.

헌책방을 뒤로 한 채 돌아가는 길, 차를 타고 달리다 잠시 멈췄다. 그때는 없었던 작은 전망대가 놓여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내려다보며 또 한 번의 아쉬움을 달랬다. 나만 아는 좋은 헌책방을 괜히 잃은 것만 같은 기분에 더 아쉽기도 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풍경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풍경
ⓒ 배은설

관련사진보기

  
아쉬웠지만 사실 백분 이해되는 일이었다. 깊숙한 시골에 위치한 헌책방에는 드문드문, 손님이 언제 올지 모를 일이었다. 이를 위해 책방을 사람들에게 개방한다는 건, 꽤나 큰 수고로움일 것이다.

새 책도 잘 팔리지 않는 시대에 헌책을 판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지 않을까.

딱 한 번 가봤을 뿐인 어느 책방에 대한 기억이, 무척 오래일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좋아하는 마음이 오래도록 지켜지길 바라기도 했다.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글쓴이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tick11)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태그:#헌책방, #안동책마을, #시골책방, #안동책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주 여행하며 자주 글자를 적습니다. <그때, 거기, 당신>, <어쩜, 너야말로 꽃 같다> 란 책을 썼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