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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초, 제주에서 온 분들을 대전현충원에서 안내할 일이 있었습니다. '대전현충원에 묻힌 제주4.3사건 관련자'가 이날의 주제였습니다. 대전현충원에는 10만 명에 달하는 분들이 안장되어 있다 보니 다양한 주제로 안내를 하고 해설을 할 수 있는데요. 주제와 상관없이 홍범도 장군 묘를 찾고자 하는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이날도 참가자들은 "제주도에서 대전현충원까지 왔는데, 이왕이면 홍범도 장군 묘를 다녀가자"고 했습니다. 홍범도 장군 묘 앞에서 설명을 마치고, 기념촬영까지 마치고 버스에 탑승하려는 데 몇몇 분들이 홍범도 장군 주변의 어느 묘를 찾아 사진을 찍고 뒤늦게 버스에 올랐습니다.

묘의 주인공은 제주해녀항일운동가 김옥련 애국지사였습니다. 항일운동에 나선 제주도 해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대전현충원에 묻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해녀 수탈기구 된 해녀조합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부춘화(독립유공자4-353) 지사와 김옥련(독립유공자3-167) 지사의 묘.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부춘화(독립유공자4-353) 지사와 김옥련(독립유공자3-167) 지사의 묘.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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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당시 국가보훈처)는 2022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3인의 애국지사를 선정했습니다. 3인의 애국지사는 해녀들의 고달픈 삶 속에서도 일제의 횡포에 항의해 제주 해녀들의 시위를 이끈 항일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이중 부덕량 지사는 고향 제주에 잠들어 있고, 부춘화(독립유공자4-353), 김옥련(독립유공자3-167) 지사 두 분이 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어느 곳에서나 삶이 비참했겠지만,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가 물질을 해야 하는 제주도 해녀들의 삶은 더욱 고달팠습니다. 그들 노동의 대가가 정당했더라면 덜 고달팠겠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해녀들은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1920년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을 만들었습니다.

해녀조합은 해녀들이 채취한 것을 공동으로 팔고, 중개도 하고, 자금까지 융통해 가며 해녀들의 권익을 보호했습니다. 조합설립 직후 1000명이 넘는 해녀들이 가입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해녀조합은 출범한 지 10년도 안 되어 해녀들의 권익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본 상인과 일본 해조회사 등 일제의 편이 돼 해녀를 수탈하는 기구로 변질됐습니다.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가 힘들여 채취한 전복이나 우뭇가사리 등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해조회사에 판매했습니다. 수익의 절반을 해조회사에 수수료로 가져갔고, 해녀조합에서도 일정금액을 수수료로 가져갔습니다.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 가격도 '지정판매'를 이유로 들어 조합 측에서 싸게 매겼습니다. 해녀들은 해녀조합비에 거래상인 임금 등을 빼고 나면 실제 수입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해녀조합장은 해녀들의 어려운 처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시 해녀조합장이 제주도를 통치하던 일본인 제주도사(현재의 도지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항일운동 이끈 제주해녀들 
 
하도야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 사진. 맨 윗줄 가운데가 부춘화, 두 번째 줄 왼쪽으로 두 번째가 김옥련, 오른쪽으로 두 번째가 부덕량이다.
 하도야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 사진. 맨 윗줄 가운데가 부춘화, 두 번째 줄 왼쪽으로 두 번째가 김옥련, 오른쪽으로 두 번째가 부덕량이다.
ⓒ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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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조합과 일제 당국의 횡포가 심해지자 제주해녀들은 이대로 눌러앉아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해녀회를 조직해 해녀조합을 상대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부춘화 지사는 1928년에 하도리 해녀회장으로 뽑혔고, 김옥련·부덕량 지사도 해녀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섰습니다. 부춘화 지사는 1908년 구좌면 하도리 굴동에서 태어나 15살인 1922년부터 해녀 생활을 했습니다. 김옥련 지사는 1907년 구좌면 하도리 서문동에서 태어나 9살 때부터 물질에 나섰습니다. 부덕량 지사도 1911년에 구좌면 하도리에서 태어나 13세부터 해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0대 안팎의 젊은 해녀들이 해녀조합을 상대로 싸우고, 항일운동의 주역으로 나서게 된 데에는 항일의식을 가졌던 동네 청년 지식인들의 영향과 역할이 컸습니다. 해녀들은 동네 청년들의 권유로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에 입학했는데, 여기서 한글과 산수뿐 아니라, 우리 역사와 사회를 공부했습니다. 젊은 해녀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부당함을 깨닫고, 해녀들의 권익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부춘화・김옥련・부덕량 지사는 바로 하도야간강습소 1회 졸업생이었습니다.

1931년 12월 20일 하도리 해녀회는 일제의 해녀 착취에 항의하기 위해 부춘화・김옥련・부덕량 지사 등을 비롯해 해녀 대표 10여 명을 선출했습니다. 본격적인 투쟁은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오일장 날 벌어졌습니다. 하도리에서 해녀 3백여 명이 호미와 비창(전복을 따는 도구)을 들고 세화리 시장까지 행진하며 시위에 나섰습니다. 부근 마을에서 다른 해녀들이 합세했고, 시위 행렬은 제주해녀조합이 있는 제주읍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시위 행렬이 구좌면사무소에 다다르자 해녀조합 지부장이자 구좌면장이던 강공칠이 나서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일단 이날 시위는 오후 5시에 해산했습니다. 하지만 면장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세화 오일장이 다시 열리는 1월 12일 더 큰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때마침 그날은 해녀조합장을 겸하는 제주도사 다구치[田口禎熹]가 새로 부임해 순시에 나서 구좌면을 통과할 날이었습니다.

이날 하도리 해녀 300여 명뿐 아니라, 종달리·오조리 해녀 300여 명, 세화리 해녀 40여 명까지 호미와 비창을 휘두르면서 일시에 세화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군중들도 합세해 세화시장에서 집회를 열었고, 때마침 순시에 나선 다구치 제주도사가 차를 타고 구좌면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집회장면을 보고 놀란 도사 일행은 순시를 포기하고 돌아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본 해녀들은 집회를 중단하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고 외치며 몰려가서 도사의 차를 에워쌌죠.

서훈은 2000년 이후에야...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제주시 구좌읍)에 세워진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과 3인의 해녀 흉상(오른쪽)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제주시 구좌읍)에 세워진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과 3인의 해녀 흉상(오른쪽)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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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제주시 구좌읍)에 세워진 3인의 해녀 흉상. 왼쪽부터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지사.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제주시 구좌읍)에 세워진 3인의 해녀 흉상. 왼쪽부터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지사.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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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험악해지자 도사는 결국 해녀들과의 대화에 응하기로 했고, 해녀들은 '지정판매 반대', '해녀조합비 면제', '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의 항일적 성격의 요구 조건을 내걸며 도사와 담판을 벌였습니다. 결국 제주도사는 해녀들의 시위에 굴복해 요구 조건을 5일 이내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하며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제주도사 또한 약속을 어겼고, 며칠 후부터 무장경관대를 출동시켜 주동자 체포에 나섰습니다.

당시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해녀 주동자 34명과 시위 배후로 지목받은 수십 명의 청년들이 체포됐습니다. 이때 부춘화·김옥련·부덕량 지사도 일경에 체포됐죠. 일제는 배후를 캐내겠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1개월 이상 고문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끝까지 항거했고, 자신들이 주동임을 증명했습니다. 이후 6개월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고초를 당했습니다. 경찰은 주동자를 체포하고 후속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제주도사는 약속을 어겼고, 투쟁의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해녀들의 시위는 국내 최초 여성이 주도한 항일투쟁이라는 의의가 있습니다. 해녀의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의 수탈기구로 전락해 버린 해녀조합에 항거한 투쟁이었습니다. 특히 1931년 9월부터 넉 달간 예비투쟁 단계에 있었고, 1932년 1월에 두 차례 큰 시위를 전개하면서 약 6개월가량 시위를 지속했다는 점에서 제주해녀조직의 단단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에서 주동에 나섰던 해녀 중에는 부춘화・김옥련・부덕량 외에도 고차동・김계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차동・김계석은 옥고를 치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적이 인정되지 않아 서훈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후 2000년대 들어서야 애국지사들 일부가 서훈을 받았습니다 부춘화・김옥련 지사는 2003년에, 부덕량 지사는 2005년에 건국포장에 추서됐습니다. 서훈받을 당시 생존해 있던 이는 김옥련 지사뿐이었습니다. 부덕량 지사는 일경에 체포되어 당했던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1939년 10월 4일 폐병으로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덕량 지사는 하도리 고향집 인근, 바다가 보이는 어느 해변에 묻혔습니다. 부춘화 지사는 1995년 3월 24일에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김옥련 지사는 서훈을 받고 2년이 지난 후인 2005년 9월 4일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도리 고향집 인근,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잠들어 있는 부덕량 지사의 묘. 멀리 보이는 섬이 강관순 지사의 고향 우도이다.
 하도리 고향집 인근,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잠들어 있는 부덕량 지사의 묘. 멀리 보이는 섬이 강관순 지사의 고향 우도이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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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항일운동에 참가한 해녀들은 강관순 지사가 작사한 '해녀의 노래'를 부르며 일제에 항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도에서 태어난 강관순 지사는 1930년 일제 수탈이 심해지자 야학소에서 우도 해녀들을 가르치는 등 계몽운동을 펼쳤고, 해녀항일운동 이후 배후로 지목돼 일경에 체포됐습니다. 옥중에 있던 강관순 지사는 가사를 종이에 적어 면회를 온 홍무향에게 전달했고, 이것을 당시 '도쿄 행진곡'의 곡조에 부쳐 부르면서 '해녀의 노래' 또는 '해녀가'로 불렸습니다.

강관순 지사는 이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일가를 데리고 함경도 청진으로 이사했으나, 옥중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계속 고생을 하다가 해방을 3년여 앞둔 1942년 8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관순 지사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4묘역 296호에 안장되어 있는데, 부춘화 지사의 묘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강관순 지사의 묘비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해녀가의 가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되면 돌아와 어린아이 젖 주면서 저녁밥 짓는다
하루 종일 일했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 살자 하니 한숨으로 잠도 안 오네.

이른 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코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고
파도 세고 물결 센 저 바다를 건너서 기울산 대마도로 돈벌러 가요.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은 착취 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 간다. 가엾은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해녀가’를 작사한 강관순 지사도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4묘역-296호에 안장되어 있다. 강관순 지사의 묘비 아래에는 해녀가 가사가 새겨져 있다.
 ‘해녀가’를 작사한 강관순 지사도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4묘역-296호에 안장되어 있다. 강관순 지사의 묘비 아래에는 해녀가 가사가 새겨져 있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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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항일 일깨운 '해녀의 노래' 작사한 故 강관순 지사," <제주일보>, 2019.02.28.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김은실, ‘제주해녀의 주체성과 제주해녀항일운동’, <국가와 정치> 16집, 2010.
김태완, 라미경, ‘보훈정책의 시각에서 본 제주해녀 항일운동의 과제’, <한국보훈논총> 제18권 제4호, 2019.


태그:#제주해녀항일운동,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강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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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북한학 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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