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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30일부터 2023년 4월 14일까지 9살 아들과 한국 자동차로 러시아 동쪽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인 포르투갈 호카곶을 지나 그리스 아테네까지 약 4만 km를 자동차로 여행한(3대륙, 40개국, 100개 도시) 이야기를 씁니다.[기자말]
- 지난 기사 '낙타 무섭다더니 한국에 데려가자는 아들'(링크)에서 이어집니다.

마라케시와 함께 모로코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도시 페스(Fez)로 향했다. 페스는 12세기 전 아랍국가 이드리스 왕조의 수도였고, 현재는 110만 명이 살고 있는 모로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첫 번째는 카사블랑카, 약 330만 명)이다.

9천 개의 골목이 있다는 페스의 구시가지인 메디나(Medina)는 모로코 문화재 중 가장 먼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1981년)되었다. 비좁은 흙담으로 이어진 메디나 속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좁았던 길은 다시 넓어졌다 좁아지길 반복하며 미로처럼 얽혀있었다.

이 중에서도 관광객들에게 가장 유명한 곳은 '태너리(Tannerie)'라 불리는 천연 가죽 염색 공장이다. 이곳에서 가죽 장인이 수많은 우물 속에 색색의 천연염료를 넣고 직접 가죽을 넣었다 꺼냈다 반복하며 수작업으로 가죽을 무두질(tanning)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모로코는 온통 푸른색으로 칠해진 아름다운 도시 '쉐프샤오엔(Chefchaouen)'과 지브롤터 해협 건너 유럽대륙을 볼 수 있는 도시 '탕헤르(Tangier)' 등 독특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사하라와 함께 이 가죽 공장을 꼭 보고 싶었다.

하지만, 페스의 메디나는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있고, 수많은 골목과 성곽으로 인해 지도 내비게이션도 잘 안되는 지역이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현지인에게 비용을 주고 안내를 부탁하기로 했다.
  
이곳을 지나면 9천 개의 골목을 만날 수 있다
▲ 모로코 페스의 블루게이트 이곳을 지나면 9천 개의 골목을 만날 수 있다
ⓒ 오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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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 메디나를 들어가는 관문인 '블루 게이트(Bab Boujloud)'에 도착하니 입구 주변에서 가이드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란 이름의 젊은 청년을 따라 메디나로 들어갔다. 무함마드는 우리에게 현지인들만 아는 골목을 안내해 줬다.

메디나 골목은 자동차가 지나갈 정도로 넓은 길부터 어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길이 뒤섞여 있었고, 정말 현지인의 도움이 아니면 쉽게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무함마드의 말을 들어보니 이곳은 좁은 길과 넓은 길이 뒤섞여 있어 큰 수레가 다니지 못한다고 했다. 정말 골목길을 거닐다 보니 수레같은 이동수단은 보이지 않고 짐을 실은 당나귀가 자주 보였다.
  
메디나는 좁은 길이 많아 당나귀가 유일한 운송 수단이다
▲ 페스 메디나의 당나귀(스틸컷) 메디나는 좁은 길이 많아 당나귀가 유일한 운송 수단이다
ⓒ 오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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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과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막기 위해 주변을 빙 둘러 흙벽돌로 10m 정도의 높은 성곽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16km에 달한다. 외부는 성곽으로 보호하고 내부에는 미로 같은 좁은 길을 만들어 이중으로 외부의 침입을 막았다고 한다.

걷는 골목골목마다 이색적인 풍경에 사진 찍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지만, 어린 아들이 지칠까봐 내색하지 못하고 서둘러 걸었다.
   
사실 메디나 여행을 계획하며 조금 걱정이 되었었다. 그동안 다른 도시에서는 늘 유명 관광지 바로 옆에 주차하고 아들은 조금만 걷게끔 동선을 계획했었지만, 이곳은 차량으로는 도저히 이동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직선구간은 2km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골목길 특성상 빙빙 돌아가다 보면 최소 1~2시간은 걸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일부러 계속 말을 걸었다.

"태풍아, 여기에 골목길이 9천 개가 넘는대~"
"정말? 누가 다 세어본 거야?"
"어…. 그래. 여긴 우체부 아저씨가 집을 어떻게 기억할까? 똑똑해야 하겠다. 안 그래?"
  
 
'사진 찍으세요' 유독 친절한 가이드와 그 덕에 불안한 아빠
 
페스의 메디나에는 9천 개가 넘는 골목마다 볼거리가 넘쳐난다
▲ 페스 메디나 페스의 메디나에는 9천 개가 넘는 골목마다 볼거리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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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나는 틈틈이 휴대전화로 지도와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신호가 가끔 끊기긴 했지만, 위치를 파악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계속 걷다 보니 가이드 무함마드씨는, 태너리(천연 가죽 염색 공장) 쪽이 아니라 그 주변을 빙빙 돌며 유명한 곳을 알려주고 사진을 찍으라고 하고 있었다.

나는 아들이 걱정돼 가이드에게 말했다.

"무함마드! 저도 사진을 많이 찍고 싶지만, 아들이 아직 어려서 오래 못 걷습니다. 그러니 태너리로 바로 가주세요."
"네, 알았습니다. 일단 여기서 사진 찍으세요. 여기 되게 유명한 곳이에요."


정말로 화려한 색감의 미술작품부터 화려한 수공예품 파는 곳까지 무함마드가 데려간 곳은 사진 찍고 싶은 곳, 쇼핑하고 싶은 곳 천지였다. 하지만, 서둘러 사진을 찍고 이동을 보챘다. 지도를 보니 아직 절반도 안 왔는데 드디어 아들이 말했다.

"아빠, 이제 도저히 못 걷겠어. 나 다리가 너무 아파."
"무함마드, 혹시 태너리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한 10분이요."
"태풍아, 10분만 더 가면 도착한대, 조금만 참자."
 

입이 삐쭉 나온 아들은 억지로 대답하며 터벅터벅 걸었다.
  
메디나는 성인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골목길이 뒤섞여 있다.
▲ 메디나 속 좁은 골목 메디나는 성인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골목길이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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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좁은 골목길과 9세기에 설립된 세계 최초의 대학교 '알 카라윈(Karaouyn)'을 비롯한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건물들은 이국적인 풍광으로 내 눈길을 끌고 있었다. 하지만, 발이 아프다던 아들은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고, 계속 휴대폰을 확인하며 시간을 재고 있었다.

"아빠, 이제 10분 넘었는데... 아저씨한테 다시 물어봐."

지도를 보니 아직도 한참 가야 할 걸 알았지만 모르는 체하고 무함마드에게 물었다.

"무함마드, 혹시 얼마나 더 가야 해요?"
"한 10분만 더요. 이제 다 왔어요. 여기가 엄청 오래된 신학교예요. '보우 이나니아(Bou Inania Madrasa)'라고요. 얼른 사진 찍으세요."
"네? 네…. 태풍아, 이제 진짜 10분이라는데…."
 

아프리카서 만나게 된 '슈퍼맨' 아저씨

무함마드는 우리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 여기저기 유명한 곳을 데려다주느라 태너리까지 가는 시간이 계속 늦어졌다. 평소 눈치가 빠른 아들은 자기를 속인다고 생각했는지, 길 한쪽에 있던 계단 위에 아예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버렸다.

그때, 양손과 어깨에 맨 짐이 많아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는 나를 보더니 무함마드가 아들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아들을 목말을 태운 채 계단 위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메디나 가이드 무함마드의 목말을 타고 있는 아들
▲ 슈퍼맨 아저씨 메디나 가이드 무함마드의 목말을 타고 있는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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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무거울 텐데 그냥 내려 주세요. 조금만 쉬었다 가면 됩니다."
"괜찮아요. 저도 집에 아들이 있어요. 저는 힘이 세요."


그러자 풀 죽어 있던 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빠, 나 아저씨 목말 계속 타도 돼?"
"어? 그래…."
"아~ 이제 살 것 같아."


나중에 안내를 다 끝내고 팁을 얻으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정말 고마웠다. 무함마드는 아들을 목에 태운 채 30분을 더 걸어 태너리까지 안내했다.

"무함마드, 고마워요. 이건 팁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여행 즐겁게 하세요."


태너리 주변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자, 내부는 작업장에서 생산한 다양한 가죽 공예품 판매장이 있었다. 우리는 계단을 따라 계속 옥상까지 올라갔다. 건물 옥상은 가죽 공장에서 수작업하는 걸 관람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태너리는 입장료 대신 주변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작업장을 관람하고 나중에 내려오면서 내부 판매장에서 물건을 구매하거나 아니면 건물 주인에게 팁을 주면 된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팔레트'란 말이 어울리는 곳
 
페스에서 가장 큰 가죽 공장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팔레트'라고 불린다
▲ 페스의 태너리(가죽공장) 페스에서 가장 큰 가죽 공장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팔레트'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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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 메디나에는 가죽 공장이 여러 개가 있었지만, 우리가 찾은 곳은 'Tannerie Chouara'라는 가장 큰 공장이었다. 이곳은 석회가 든 우물에 가죽을 넣어 무디게 하는 곳과 각종 천연 염료(나무껍질, 민트, 개양귀비꽃, 인디고, 샤프란 등)와 동물의 배설물이 든 우물에서 가죽을 주무르고 뒤집는 과정을 반복해 염색하는 곳이 함께 있어 우물의 색이 다양했다.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팔레트'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이곳은 비둘기나 동물의 배설물을 함께 사용해, 그 냄새가 심한 걸로도 유명하다. 건물 입구에서 관광객들에게 민트잎을 나눠줘 아들과 코 밑에 대고 있으니 신기하게도 냄새가 그렇게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전 과정을 사람의 힘으로 작업하는 1000년 전 방식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다.

동명의 영화 작품 '카사블랑카'가 워낙 유명해 모로코의 수도는 카사블랑카(Casablaca)가 아닌가 착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모로코의 수도는 라바트(Rabat)이고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최대 도시이다. 우리는 항공기를 타기 위해 페스에서 가까운 카사블랑카로 이동했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으로 내부 바닥은 유리로 되어 바다를 볼 수 있다
▲ 카사블랑카의 하산 2세 모스크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으로 내부 바닥은 유리로 되어 바다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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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에 있는 동안 작은 차로 아틀라스산맥을 넘고 사하라를 이동하느라 아들은 구토를 총 5번이나 했다. 그래서 모로코 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카사블랑카에 가면 아들에게 한식을 먹이려 식당을 검색했었다. 아프리카이긴 하지만 인구가 워낙 많아서인지 숙소 근처에 있는 한국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혼자 쏜살같이 나가서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푸짐하게 포장해 왔다.

"태풍아, 이제 우리 모로코 여행은 끝났어. 오늘 이거 맛있게 먹고 내일 스페인 가서 더 재밌게 여행하자."
"와~ 맛있겠다. 아빠, 태풍이 힘들었어."
"그래. 우리 아들이 고생했지. 아빠가 미안해."
"아냐. 그래도 낙타도 타고 아프리카 아저씨가 목말도 태워주고 재밌었어."
"그래? 아무튼 고생 많았어! 우리 아들~"

"응, 나 빨리 가고 싶어. 이제 스페인에 간다니까 꼭 집에 가는 거 같아."
"그래. 아빠도 빨리 가고 싶어."
"아빠, 우리 집에 돌아가는데 외쳐야지?"
"뭘? 아~"
"돼지!"
"원숭이! 크로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여행 기간 내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작성하였으나, 사건 등 일부 내용은 기자의 저서<돼지 아빠와 원숭이 아들의 흰둥이랑 지구 한 바퀴>에 수록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태그:#모로코, #페스, #메디나, #태너리,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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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세계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강연 합니다. 지금까지 6대륙 50개국(아들과 함께 42개국), 앞으로 100개국 여행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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