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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책 표지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책 표지
ⓒ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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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에서 낯을 익힌 어르신이 나와 함께 수영장에 다니는 딸에 관해 물어왔다. 몇 살인지 뭘 하는지를. 아마도 그분 입장에선 젊은 여자가 일하거나 공부하지 않고 수영장에 있는 게 의아했던듯싶다. 20대 초반 대학생이라는 내 대답에 그제야 의문이 풀렸는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좋을 때"라 했다. 그런가, 했지만, 나는 그분이 말한 의미를 짐작하겠기에 토 달지는 않았다.

"좋을 때"에 공감하지 못한 것은 청춘의 고단함이 지닌 무게 때문이다. 젊은이 특히 젊은 여성에게 바라는 마땅한 노력과 인내가 너무 과한 나머지, 뭐든 성과로 증명해 내지 않으면 게으르다거나 노력하지 않는다는 질책이 쉽게 쏟아진다. 나는 이제 장년과 노년 사이에 놓였지만, 과거 앞이 보이지 않던 젊은 시절의 막막함과 우울감과 좌절감을 잊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청춘을 "좋을 때"라 부르는데 주저하고, 살면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 시절의 (성)불평등과 (젠더)차별로부터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한국 사회는 젊은 여성을 조금이라도 낫게 대우하고 있나?

코로나가 세계를 강타한 2020년 '한겨레'는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1990년대생(여성)이 사라지고 있'는 문제를 다루었다.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이 좋아졌다 하고, 한국이 세계 경제대국이 되었고, 여성들의 학력은 글로벌 최고 수준이라는데, 왜 젊은 여성이 삶을 포기하는지 절망과 분노가 뒤엉킨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때 누군가 이 불안한 징후를 파헤쳐주었으면 생각했는데 관련된 책을 만났다. 이소진 연구자가 쓴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청년여성들의 자살 생각에 관한 연구)>이다.

이소진 역시 다큐멘터리 '조용한 학살'에 영향을 받았다. 당사자 세대이기도 하고, 저자 자신도 고단한 청년여성의 위태로움을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1명의 연구 참여자와 6개월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자살의 위기에 놓인 비중산층 청년여성들의 현실을 조명했다. 이소진이 큰 틀로 묶은 청년여성의 위기 키워드는 가족, 노동, 불안이었다.

가족

청년여성들의 삶을 위협하는 원인 중 하나는 단연 가족이다. 청년여성들에 대한 '싸가지 없는' 행태가 페미니즘으로 오염되어 회자되고, 스펙이 짱짱한 소수 토큰 여성들의 사회 진출과 성공이 착시현상을 일으키면서, 청년여성들의 삶이 가족 때문에 위협받는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다. 나만 해도 가족 리스크를 안고 살아가는 청년여성을 여럿 알고 있다.

청년여성들은 남자형제들에 비해 부모의 학력적 경제적 지원을 훨씬 덜 받지만, 딸 역할에 대한 기대는 턱없이 높다. 남자형제의 밥 수발을 당연시하고 가사분담은 딸에게만 부과된다. 점입가경은 아픈 가족에 대한 돌봄 노동인데, 이는 당연한 듯 비혼인 청년여성에게로 돌아간다. '영케어러'(이는 물론 청년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K장녀'는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무엇보다 가부장은 청년여성을 능력주의("대학 공부시켰는데 제대로 하는 게 없다")로도, 젠더(과도한 딸 역할)로도, 섹슈얼리티 통제로도 억압한다. 이주한 1인 가구 여성 청년들을 연구한 장민지의 <여자들은 집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난다>에서, 지역의 청년여성들이 수도권으로 이주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아버지(가족)으로부터 해방된 공간을 얻기 위한 시도였다는 점은, 가족이 청년여성을 옭아매는 큰 억압 기제임을 적시한다. 이주든, 독립이든, 가족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는 청년여성들은 심대한 심리적 압박을 겪으며 '증발하고 싶은' 욕구를 증폭시킨다.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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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여성에게서 "투잡 쓰리잡을 하는데 왜 맨날 돈이 없는 줄 모르겠다"는 토로를 들었다. 일을 많이 하는데 왜 돈이 없느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가 말한 투잡 쓰리잡은 최저임금을 받는 저임금 노동이다. 두 개 세 개를 뛰어도 안정된 정규 노동시장에 편입된 노동임금에 비할 수 없다.

어떻게든 더 나은 노동시장 진입을 위한 교육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해 투잡 쓰리잡이 필요하지만, 여러 노동을 병행하면서 '이미 완성된 노동자'를 원하는 기업의 스펙을 갖추기란 요원하다. 유망한 경력을 쌓으려 이직을 반복하며 노력해 보지만, 불안정 노동시장으로 회귀하게 되는 악순환에 놓인다. 게다가 여성이 집중된 젠더화된 노동시장은 여성이 다수라는 그 자체로, 동일노동을 하고도 남성의 66%밖에 받을 수 없는 저임금이 확정된다.

삶을 꾸리기 위해 안정된 직장이 필요하지만 이들에겐 기회가 없다. '좋은' 직장으로 진입하기 위한 문턱은 높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문이 닫혀 있다. "다시 먹고 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어" 자괴감이 들고, "노력과 노동이 없는 죽음이 편해 보이"게 된다.

불안

가족이나 직장이 주는 위험은 구조적 문제라서 피할 수 없다. 구조적 성차별과 젠더 위계를 어떻게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겠는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압도당할 때, 사람들은 살기 위해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고 쉬운 표적을 찾는다. 바로 자신이다.

'내가 노력을 덜해서'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자신을 자책한다. 문제를 노력하지 않은 과거의 나에 집중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다그친다.

그러나 더 나아지는 나는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생성되지 않는다. 결국엔 바뀌지 않는 상황에 좌절하고 개선되지 않는 자신을 혐오하기에 이른다. "보여지는 성과가 없으면 존재가치가 증명이 안 되는" 신자유주의 능력주의는 청년여성에게 '존재적 불안'이라는 덫을 놓고, '증발'하는 외 출구 없음을 표시한다.

청년여성들은 이토록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지만, 희한하게도 청년의 좌절과 자살을 다루는 콘텐츠에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 <정신 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나 <이재 곧 죽습니다>에는 '취준'(공무원이나 대기업)의 압박을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당사자로 남성청년을 세운다.

남성청년이 힘겨운 처지에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징후적이고 비정상적으로 치솟은 자살률은 명백히 2030여성들을 가리키고 있지만, 현실을 반영해야 하는 드라마는 자살하는 당사자조차 청년여성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이는 드라마의 남성청년들이 가시화된 안정된 노동시장에 진입하려다 실패한 것과 달리, 소외된 불안정 노동시장에 있는 청년여성들의 현실은 놀라우리만치 비가시화되어, 사회 문제로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젊은 여성들의 우울증을 심도 있게 다룬 <미쳐있고 괴상하며 똑똑한 여자들>에서 저자 하미나는 자살로 이어지기도 하는 우울증을 앓는 젊은 여성들을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 사이의 균열이 가장 큰 세대, 그래서 추락하기 쉬운 세대"라 파악했다.

청년여성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딸 노릇(가사노동, 돌봄 노동 등) 잘하고, 적은 임금으로도 군말 없이 일하고, 결혼해 아이까지 낳아 애국하라-의 차단되지 않는 요구 앞에 주체적 자아라는 허구와 갈등하며 한 움큼의 정신과 약을 털어 넣고 위태롭게 서 있다.

왜 이들의 위기는 역차별 운운 속에 소거되어 사회적 이슈로 다루어지지 않는가. 비가시화된 청년여성의 불완전 노동과 '증발' 위기에 응답하는 정치는 왜 어디에도 부재한 것인가.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

이소진 (지은이), 오월의봄(2023)


태그:#증발하고싶은여자들, #청년여성, #2030여성자살률, #성불평등한노동시장, #조용한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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