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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사극을 보며 품었던 활쏘기에 대한 로망을 30대가 되어 이뤘습니다. 대학원생으로 살면서 활쏘기를 통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활쏘기의 매력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활을 배우며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활쏘기는 2020년 7월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됐다. 올림픽 양궁 국가대표들이 세계 무대에서 메달을 휩쓸 때마다 '역시 우리는 활의 민족'이라고 자부해왔던 것 치고는 너무 늦은 결정이다.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고 하여 크게 달라진 건 없는 듯하다. 아니, 오히려 활쏘기는 점점 쇠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적으로 전통활쏘기 교육과 습사가 이뤄지는 활터(사정)의 현실만 봐도 그렇다.

재작년 겨울, 충남 부여에 놀러갔다가 부여 지역의 유일한 활터로 알려진 '육일정(六一亭)'에 들렀다. 육일정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의 수도인 부여 지역에 활터가 없는 현실에 개탄한 지역 주민들이 남명산 기슭에 정자를 지은 것이 그 기원이라 한다. 1954년에 한 번 위치를 옮기고, 2014년 현대식 건물로 증축했다 한다.

뒤늦게 접한 육일정 강제 철거 소식
 
철거되기 전의 부여 육일정 (2022년 12월 25일 촬영)
 철거되기 전의 부여 육일정 (2022년 12월 25일 촬영)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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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2023년 9월, 활터가 철거됐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니 꽤 오래 전부터 활터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선 눈엣가시였던 모양이다. 활터는 '소수'의 전유물이니 폐쇄하고, 이를 주민들의 운동 및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주장이 꾸준히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작년에 행정 당국에 의해 강제 철거가 이뤄졌다.

사연이 궁금했다. 직접 국민신문고를 통해 부여군에 '육일정 강제 철거 사유'를 문의하자, 지난 13일 부여군 문화건설국 문화체육관광과 담당자로부터 이메일 답변이 왔다. 부여군은 2018년부터 육일정이 있던 남령공원을 역사문화도시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해 왔다고 한다. 공원 안에 위치한 활터의 철거가 지연되면서 사업이 계속 지체되는 바람에 강제집행(철거)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담당자는 "공원조성공사의 장기화로 인한 군민 피로도 경감과 과도한 행정력 및 예산 낭비 방지를 위해서라도 궁도장 철거를 위한 무단점유 물품 이전 등 행정대집행 추진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역사문화도시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활터 철거는 불가피했다'는 부여군의 철거 논리는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옛날부터 문·무관 할 것 없이 양반들의 필수 소양이었고, 전시에는 호국무예였던 전통활쏘기야말로 부여군이 추진하는 '역사문화도시공원'에 가장 어울리는 문화 콘텐츠 아니던가.

더군다나 육일정이 있던 남령공원에는 황산벌 전투 당시 장렬하게 전사한 계백 장군을 비롯한 백제의 충신 성충·흥수 등을 모신 '의열사'가 자리하고 있다. 전통적인 호국무예인 활쏘기를 통해 백제의 기상을 기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걸까.

과거 일각에서는 육일정의 철거 명분으로 '안전' 문제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살이 날아다니는 특성상 국궁장이 안전사고에 특히 유의해야 하는 시설인 건 분명하다. 주민들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육일정은 7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이제 와서 갑자기 안전 문제를 거론하는 게 뭔가 좀 궁색해보인다. 안전이 문제가 되었더라면 행정 당국에서 시설을 보완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육일정 측은 강제 철거 직후 모처에 임시 활터를 마련했다고 한다. 황량한 벌판에 세워놓은 과녁 두 개와, 컨테이너 박스에 임시로 마련한 사무실 정도였다. 전통 활터, 활쏘기가 처한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육일정 철거 후 임시로 조성된 국궁장
 육일정 철거 후 임시로 조성된 국궁장
ⓒ 육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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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에서는 현재 2026년 준공을 목표로 새 활터를 세울 대체 부지를 물색 중이라 한다. 굳이 옮길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면, 먼저 대체 부지를 찾아 활터를 이전·건립한 뒤에 철거를 진행하는 게 올바른 수순 아니었을까. 

어디 육일정만 그러할까. 한국의 유서 깊은 활터를 찾아보면 대개 폐쇄되어 이름만 남은 경우가 잦다. 거기다 개발 논리에 밀려 천덕꾸러기처럼 이리저리 옮겨다닌 탓에, 본래 위치에 그대로 있는 활터가 손에 꼽을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활터 건물들이 옛 형태를 보전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철거로 인한 이전 후 현대식 건물로 새로 지었기에 옛 활터의 모습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근본 없는 시멘트 건물들이 그 자리를 대체해버린 것이다. 지방 활터로 습사 여행을 떠날 때마다 늘 아쉬움이 드는 까닭이다. 

서울 역시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4대문 안에 40개의 활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8개의 활터만이 남았다. 그중에서도 조선 인조 때인 1630년경 창건되어 서울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석호정(石虎亭)' 역시 전쟁과 개발에 휘말려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지금의 자리에 안착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낙산 좌룡정에서 활을 내는 활량들의 모습(왼쪽). 지금 좌룡정은 사라지고 한양도성 성벽에 흔적만 남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낙산 좌룡정에서 활을 내는 활량들의 모습(왼쪽). 지금 좌룡정은 사라지고 한양도성 성벽에 흔적만 남았다.
ⓒ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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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11년 당시 서울시(시장 오세훈)는 남산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으로 석호정을 은평구로 이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가 많은 국궁인들의 반대에 부딪힌 바 있다.

다행히 철거 반대 여론에 계획은 무산됐지만, 2011년의 석호정 사태는 활터의 미래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자체의 위탁으로 운영되는 서울의 다른 활터들 역시 행정 당국의 무관심 속에 건물의 노후화를 피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활터를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지자체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시설들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는 활터의 모습. 안내판 밑동이 썩어서 쓰러지기 직전이고, 활터 기와지붕에는 잡초들이 자라고 있다. (서울 강서구 공항정)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는 활터의 모습. 안내판 밑동이 썩어서 쓰러지기 직전이고, 활터 기와지붕에는 잡초들이 자라고 있다. (서울 강서구 공항정)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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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은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제9조)고 명시하고 있다. 굳이 헌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점점 사라져가는 옛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조금만 소홀해도 전통은 변형되고 단절되기 쉽다.

실제로 과거에는 전쟁에서 쓰는 군용 활과 평소 연습용으로 쓰는 활이 별도로 존재했다고 한다. 재료와 만드는 방법에 따라 활의 종류가 무려 7종 이상이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어느 시점에 그 많은 활들의 제작 방식이 실전되면서, 지금은 평상시 습사용으로 쓰던 각궁만 남았다.

당장은 문제가 없겠지만, 지금과 같이 전통활쏘기와 활터에 대한 홀대가 계속 된다면 머잖아 활을 쏘고 싶어도 활을 쏠 수 있는 공간들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을까 우려스럽다. 활터가 사라지면 자연히 우리 활쏘기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줄어들 테고, 면면히 이어가고 있는 전통활쏘기의 명맥도 점점 위태로워질 것이다.

정치권에 당부하고 싶다. 말로만 '전통문화 계승 및 보존'을 외치지 말고, 진심으로 한국의 소중한 활쏘기 문화에 관심 갖고 육성·발전에 힘써주었으면 한다.

정치권의 노력에 앞서, 일반 시민들에게도 관심과 애정 어린 눈으로 전통활쏘기를 바라봐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고 싶다. 부여 육일정 사태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민들부터 활터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마당에 과연 어떤 정치인이 앞장 서서 활터를 지키고 활쏘기를 장려하려 할까.

활쏘기를 민족의 자랑스럽고 소중한 전통문화로 인식하고 이를 존중하려는 의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된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활터가 홀대 받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태그:#육일정, #활터, #국궁, #활, #공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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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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