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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조문기의 묘 (애국지사 3묘역 705호)
 애국지사 조문기의 묘 (애국지사 3묘역 705호)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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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705호 조문기 지사의 묘비에 쓰인 묘비명입니다. 일제강점기 최후의 의열투쟁이었던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인공 조문기 선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운동가로 살았습니다.

조문기 지사는 192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의 가세가 기울자 선생은 어머님을 따라 외갓집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되는데요. 외조부 이조영은 고종 31년(1894)에 과거에 급제해 승지 벼슬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이 강제로 병탄된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살고 있었는데요. 일제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해 분노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일장기 찢은 할아버지

어린 조문기는 학교에서 우민화 교육을 받았습니다. 학교에서는 매일 조회시간에 일본 제국이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훈시했습니다. 신문과 라디오에서도 연일 일본의 승전 소식만 전했는데요. 조선의 어린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일본의 우수성을 들으며 세뇌당했습니다. 자라서 일본인처럼 되어야 하고 일본을 위해 전쟁에 자원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조문기 선생은 전쟁터로 가는 군인들을 실은 기차에 일장기를 흔들었고, 어느 날 하루 일장기를 들고 집에 돌아가게 됐습니다.

"문기야! 그 손에 든 게 뭐냐?"
"학교에서 나눠준 국기예요."
"이놈! 예가 어디라고 망측한 걸 집으로 들이는게냐!"


격노한 외할아버지는 일장기를 박박 찢어 버리고, 어린 조문기 선생에게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항상 자상한 모습이었던 할아버지의 모습에 선생은 충격을 받았는데요. 그날 밤 할아버지는 조용히 선생을 불러내어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문기야. 이 할애비가 밉지? 네가 어려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아무래도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문기야, 이 할애비 말을 잘 듣거라. 네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다 거짓뿌렁이다. 왜놈들이 거짓으로 꾸민거야."

그날 밤 조문기 선생은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역사의 진실을 마주했습니다.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을사늑약의 체결, 헤이그 밀사 파견, 고종의 강제 퇴위와 승하. 모든 이야기를 들은 조문기 선생은 손이 부들거리고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울분에 찬 조문기 선생의 가슴 속에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양지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향후 진로를 고민합니다. 경성사범학교 진학을 목표로 했지만 민족 차별로 인해 낙방하고 맙니다. 당시 학교의 정원 120명 중 50%는 무조건 일본인에게 배정되고, 나머지 50%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경쟁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에게는 공식적으로 25%의 기회를 준다고 했지만, 일제는 조선인에게 교육의 기회를 거의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선생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때마침 선생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일본의 거대 군수회사에서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광고였습니다. 기숙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월급도 주고, 회사 부설 학교에서 공부도 시켜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생은 적국에 가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보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만들겠다고 결심하는데요. 부모님과 상의도 하지 않고 그날로 즉시 기차에 올라 부산으로 내려갔고,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갔을 당시 선생의 나이는 16세였습니다.

1942년 10월, 선생은 도쿄 근처 일본강관주식회사에 훈련공으로 입소합니다. 그곳에서 파이프를 뽑아내는 일을 맡아서 하게 됩니다. 시뻘건 쇳덩이를 꺼내서 규격대로 잘라 넘기는 일이었는데요. 방열복과 장갑을 착용했지만, 엄청난 온도 때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작업이었습니다.

조선 청년의 파업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인 유만수 지사를 만나게 됩니다. 4살이 더 많았던 유 지사 역시 독립운동의 꿈을 가지고 이곳에 와 있었습니다. 서로의 뜻을 확인한 두 사람은 기회만을 엿보는데요. 마침내 1944년 5월에 사건이 터집니다.

회사에서 배포한 '훈련공 교양서'라는 책자가 사건의 발단이었는데요. 그 책에는 "훈련공들은 모두 농땡이를 잘 부린다. 밥만 많이 먹는다. 쌈질을 잘한다. 여자를 잘 후린다" 등 조선인 청년들을 모욕하는 차별적인 내용이 가득했습니다. 조문기·유만수 두 지사는 그 즉시 영향력 있는 조선인 청년들을 방으로 불러 투쟁을 기획하고 조직해 나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3000여 명에 달하는 청년들이 식당에 모여, 출근을 거부하며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었습니다. 그동안 쌓여왔던 울분이 터져나왔습니다.

"훈련공 교양서의 저자를 당장 우리 앞에 데려와라!"
"사장은 직접 나와서 사과하고 교양서의 판매금지와 판매된 책들을 전량 회수하라!"
"유사사태의 재발방지를 책임지고 보장하라!"
"훈련공들의 대우를 개선하라!"
"조선인 차별을 철폐하라!"


이 사건은 전쟁 중에 군수공장에서 일어난 유일한 파업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인들의 파업이었기 때문에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두 지사는 일본 전역에 지명수배가 내려지게 됩니다. 두 사람은 이곳 저곳 노동판을 떠돌며 도피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일본에 온 지 2년여의 세월이 지난 후 독립운동의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데요.

"우선 조선으로 돌아가자. 가서 큼직한 일 몇 가지를 벌이고 준비되는 대로 중국으로 가자."
"큼직한 일이라면?"
"조선에 가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민족을 배반한 친일거두와 침략 원흉을 처단해서 우리 민족의 긍지를 되찾는 일이야."

  
'정치깡패 친일파' 박춘금 처단 계획
 
부민관 폭파 의거 터
 부민관 폭파 의거 터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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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진로를 정한 두 사람은 1945년 1월, 일본 생활 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조금의 지체 없이 계획을 실행해 나갔는데요. 애국심이 강한 청년들을 찾아 동지로 규합하고 비밀결사를 조직했습니다. 귀국한 지 2개월 만인 1945년 3월 서울 관수동 유만수 지사의 집에서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우동학, 권준, 박호영 등 여섯 명의 조선 청년이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처단 대상을 박춘금으로 정합니다.

박춘금은 악질 친일파이자 정치깡패였습니다. 일본에서 '상애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는데요. 일본에서 일자리를 찾던 조선인에게 일자리를 섭외하고, 알선료를 받아 챙겼습니다. 힘없는 여성 노동자의 급여를 모두 횡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인 여성들을 폭행하고 사창가에 팔아넘기기도 했습니다.

일본 곳곳에 있던 항일민족단체를 습격하고 폭력을 저지르기도 하는데요. 오사카 조선인이 만든 '노동연주회'를 습격 수십 명의 중상사를 냈고, 일본 내 조선인 노동자들의 결사단체인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습격했습니다. 국내에서도 1924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일본인 농장주의 사주를 받아 박춘금은 주민을 습격하고 폭력을 일삼습니다. 한마디로 일본인들의 해결사 노릇을 했습니다.

박춘금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정치권에서 영향력을 키웁니다. 1930년 '우리의 국가 신일본'이라는 책을 내는데요. 그 책에는 "우리 조선인이 대일본제국을 사랑함에 어떤 어색함이 있을 것인가. 이 대일본제국의 국부 지존에 대해 받들고 충성을 바치려고 하는 것은 원래 우리의 임무가 아니면 안된다"고 썼습니다. 박춘금은 심지어 일본 중의원 선거에 입후보했고, 당선까지 됩니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제국의 국회까지 진출한 뼛속까지 친일파였습니다.

조문기 지사와 대한애국청년당 동지들은 박춘금 처단을 위해 무기부터 확보하는데요. 우선 유만수 지사가 수색변전소 작업장에 인부로 잠입했습니다. 당시 일제는 공습 피해를 줄이기 위해 주요 시설들을 지하화하는 공사를 벌이고 있었는데, 지하 작업을 위해서는 폭발물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작업장과 떨어진 화약창고에는 일반 노무자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유만수 지사는 현장감독의 눈에 들기 위해 작업에 열성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20여 일을 일한 결과 현장 감독의 신임을 얻는 유 지사는 드디어 발파 작업을 지시받습니다.

지하에 들어가 작업을 하는 동안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해서 화약을 조금씩 덜어냈습니다. 그것을 신발 바닥에 얇게 이겨 넣어서 밖으로 빼돌렸는데요. 그렇게 사제폭탄 2개 분량의 화약을 확보했습니다.

다음으로 강윤국 지사가 어디선가 권총을 구해왔는데요. 국수 공장을 운영하던 강 지사의 집에 자주 찾아오던 한 헌병 장교의 것이었습니다. 헌병은 시시때때로 국수 공장에 와서 술상을 받았는데, 그가 만취한 틈을 타서 권총을 훔쳐낸 것입니다.

무기를 준비한 조문기 지사와 동지들은 거사날을 정합니다. 친일파 박춘금이 마침 7월 24일 저녁 7시에 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라는 행사를 개최하기로 했는데 이 곳을 치기로 결정합니다. 부민관은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로 당시에는 다목적 강당으로 집회, 연설, 강연 등이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아시아민족분격대회'는 일제의 전쟁범죄에 협력해 조선인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한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거사가 3일 남은 시점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작업장에서 빼내 온 다이너마이트 심지가 문제였습니다. 불꽃이 너무 크게 일고, 소리도 크고, 냄새도 심해서 도저히 의거용으로 사용할 수 없었던 겁니다. 요란하게 타지 않고, 정확한 속도로 탈 수 있는 심지가 필요했습니다.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세 지사는 72시간 동안 밥 한술 못 뜨고 잠 한숨 못자며 폭탄제작에 돌입했습니다. 마침내 '바싹 말린 명주실' 심지가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대회가 시작한 지 1시간이나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세 동지는 대회장까지 내달렸습니다.

다행히 대회가 끝나기 전 부민관에 도착했습니다. 헌병들의 감시가 있었지만 세 사람은 군중들 틈에 섞여 들어가 무사히 대회장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이윽고 박춘금이 무대에 오르자 세 사람은 무대로 접근해서 폭탄을 설치했습니다. 하나는 계단 아래에 다른 하나는 무대 아래에 설치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폭탄을 설치하는 것을 눈 앞에 보고서도 아무도 제재하지 않았는데요. 행사 관리자가 무대 관리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3분 후 폭발하도록 장치하고 나서 세 사람은 유유히 행사장 밖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폭탄은 정확하게 터졌고, 행사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부민관 폭파 의거는 대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아시아민족분격대회는 그 자리에서 무산돼 버렸습니다. 세 지사의 완벽한 성공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친일청산' 외친 선생
  
부민관에 정의의 폭탄 이면 벗은 3청년 용사
 부민관에 정의의 폭탄 이면 벗은 3청년 용사
ⓒ 국립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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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후 부민관 의거의 배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전국을 들쑤셨습니다. 범인 검거에 총 5만 원 현상금을 걸었는데요. 3만 원은 일제가 2만 원은 박춘금이 걸었습니다. 당시 쌀 한 섬이 100원이었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현상금이었습니다. 이때 60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연행됐고,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에 못 이겨 본인이 범인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기도 하는데요. 이후 조문기 선생은 고초를 당한 이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사과하기도 합니다.

조문기 지사와 동지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잘 은신했고 검거되지 않았는데요. 해방 이후에는 오히려 '부민관 폭파 의거'를 본인이 했다면서 거짓을 떠벌리는 가짜들이 등장할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1945년 11월 13일 당시 <자유신문>에 세 지사가 진상을 공개하면서 진실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체포되지 않았던 조문기 지사는 오히려 해방된 이후에 체포되고 고초를 겪게 되는데요.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에 반대하며 '인민청년군'을 조직한 조 지사는 1948년 6월 2일 삼각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서울 시내 빌딩에 '통일정부 이룩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등 현수막을 펼치려고 계획합니다. 그런데 조직 내 끄나풀로 인해 체포되고 옥살이를 하고요. 195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 조작 사건'으로 다시 한번 투옥됩니다.

삼각산 사건 때 성북경찰서로 끌려간 조문기 선생은 형사 앞에서 취조받는데요. 그 형사는 다름 아닌 악명 높은 친일 경찰 김종원이었습니다. 훗날 김종원은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며 일본도로 사람들 목을 베고 다녔고, 권총이나 소총으로 사격 시험하듯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후 조문기 지사는 광복절 행사에도 단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는데요. '1945년에 일제는 물러갔지만 친일파들은 그대로 남아 미국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반공세력으로 변신해 우리 사회 주류로 탈바꿈 했다'는 것이 조문기 지사의 뜻이었습니다. "친일청산은 바로 오늘의 독립운동"이라고 외치며 <친일인명사전> 발간에도 온 힘을 쏟았습니다.

지사는 2008년 2월 5일 향년 81세로 이 땅에 완전한 친일청산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역위원회 등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매년 지사의 기일에 맞춰 현충원 묘역에서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2월 5일 즈음에는 지사가 남긴 육성이 현충원에 울려 퍼집니다.

"한번 독립운동가는 영원한 독립운동가다. 중간에 변절자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참고]
조문기 선생 회고록 <슬픈 조국의 노래> (유지호·권남경, 2005, 민족문제연구소)

 
조문기 선생 16주기 추모식
 조문기 선생 16주기 추모식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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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대전현충원, #조문기, #부민관폭파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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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시민활동가입니다. 우리 지역 현장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가 필요한 분에게 마이크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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