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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전, 겨울비가 오는 가운데 등굣길에서 교통지도 중이신 녹색어르신
▲ 14일, 비오는 등굣길 14일 오전, 겨울비가 오는 가운데 등굣길에서 교통지도 중이신 녹색어르신
ⓒ 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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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오전, 미팅이 있어 아이들이 등교할 시간에 집을 나섰다. 학교 앞 횡단보도에는 조끼를 입은 '녹색어르신'들이 노란 깃발로 정지신호를 하고 계셨다. 녹색어머니회 대신 활동을 시작한 분들이다(만 65세 이상 지역 내 어르신).

하나둘씩 몰려드는 아이들과 출근 전 아이와 인사를 나누는 학부모님, 아직 어린 손자의 손을 꼭 붙잡고 계신 조부모님까지 횡단보도 앞은 금세 북적였다. 잠시 뒤 초록불이 켜지고 아이들이 길을 건너 학교로 향했다.

나는 교통 봉사 활동에 방해되지 않도록 비켜서며 녹색어르신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어르신은 몸을 돌려 기분 좋게 "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받아주셨다.

뛰어오느라 숨을 헐떡이던 한 아이가 녹색 어르신께 "안녕하세요"라고 말하고 신호를 기다렸다. 초록불이 켜지길 기다리는 짧은 순간이지만 어르신은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셨다. 곁에 서있던 나는 예전에 녹색어머니 활동으로 고군분투하던 일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녹색어머니 활동의 고충

녹색어머니 활동이란 아이들 등·하굣길 교통안전을 위해 통학로에서 부모들이 해야하는 봉사 활동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받아쓰기'라는 큰 산맥을 넘어야 하는 것처럼, 학부모도 녹색어머니 활동을 해야 하는 난관에 부딪힌다. 처음에는 나도 일 년에 두세 번 한 시간 봉사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울까 생각했다. 하지만 꼭 가서 봉사하고 싶은 나의 마음과 달리, 상황은 늘 예상치 못하게 어긋나곤 했다.

첫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녹 색활동을 배정받았을 때는 겨울이었다. 둘째가 어리고 낯가림이 심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가 어려웠다. 할 수 없이 타 지역에 계신 친정엄마를 전날 모셔 와서 아이를 부탁했다. 

다음으로 배정받은 날짜에는 아이들이 감기에 걸렸고, 나도 동시에 몸살이 난 탓에 부들부들 떨면서까지 녹색어머니 활동을 해야 했다. 그 후로는 녹색당번 날짜가 다가오는 날이면 꼭 수능을 앞둔 수험생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면 조금 과장일까. 아마도 당시 초보 학부모라서 더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주변을 보면,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직장에 다니는 엄마들도 어려움이 컸다. 윗사람이나 동료들에게 어김없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을 것이다. 지역 맘카페에 시시때때로 '녹색어머니 알바' 글이 수두룩하게 올라왔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직도 '녹색어머니 알바'로 검색하면 많은 모집글이 뜨는 현실이다.
 아직도 '녹색어머니 알바'로 검색하면 많은 모집글이 뜨는 현실이다.
ⓒ 포털사이트 화면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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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어머니 활동을 하루 빠진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 마음이 그렇지가 않았다. 아이에게는 많이 미안하고, 이런 일도 제대로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다른 학부모들을 만나면 면목 없어지기 때문에 어느새 이 일은 꼭 해야 하는 일처럼 인식되어 있었다.

녹색어르신으로 달라진 학교 앞풍경

그런데 약 3년 전부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만 65세 이상 지역 내 어르신들이 교통지도훈련을 받은 후 학교에서 봉사 활동을 하기 시작하셨다. 녹색어머니 활동을 부담스러워하는 학부모들의 수고와 걱정을 확 줄여주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분들을 마주친 지난 14일, 나는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봉사 중이신 어르신께 다가가 일이 힘들진 않으신지 여쭈었다.
 
아이들 학교가는 모습이 좋다고 말씀하시는 어르신들과 인사나누는 아이들
▲ 14일, 겨울비가 오는 가운데 교통지도 중이신 어르신 아이들 학교가는 모습이 좋다고 말씀하시는 어르신들과 인사나누는 아이들
ⓒ 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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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나와서 하니 저절로 운동도 되고 좋아요. 아이들도 예쁘고요. 집에 있으면 누가 말 시켜주나요? 여기 나와서 일하고, 용돈도 벌고 하니 좋습니다." 

김재석 어르신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일하면서 아이들과 인사 나누니 좋아요. 소액이지만 한 달에 활동비도 받으니, 생활에 보탬도 되고 사람들과 얘기도 나눌 수 있고 좋습니다. 저희들은 시간이 많으니 끝나고도 학교에 봉사할 일 있으면 도와주고 가요." 

조광순 어르신께서 아이들을 살피며 대답해 주셨다.

다른 횡단보도에서 봉사하던 오이환 어르신도 비슷한 답변이다. "난 여기 나와서 일하는 게 좋아요.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인데 우리가 지켜줘야지요." 이 분의 당당한 풍채와 힘 있는 목소리에 연세를 다시 여쭙게 되었다.

초록불이 켜지고 빨간불이 켜지기를 반복하는 초등학교 횡단보도 앞에서는 아이와 학부모, 어르신 3세대가 서로를 공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길을 건너는 아이들에게 안내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노년의 쓸쓸함이나 우울함을 읽히지는 않았다. 이제 학부모인 나 또한 매번 학교의 연락에 떨며, 과제를 못다 한 듯한 불안함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신호등에 초록불이 켜졌다. 어르신이 들고 계시던 노란 안전 깃발을 앞으로 펼치자, 귀여운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학교로 향했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나아가고 있었다.

지난 13일, 통화한 경기 안양시청 시니어 일자리 담당자는 "현재 녹색어르신 활동은 시니어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안양시 또한 노력 중입니다"라고 말했다. 일 가정 양립, 저출산 시대에 워킹맘들의 고충을 줄여주는 이런 시도가 더욱 더 확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릴 수 있습니다.


태그:#녹색어르신, #녹색어머니, #등하굣길교통지도, #3세대공존, #안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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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아름답고 재미난 이야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오고가며 마주치는 풍경들을 사진에 담으며 꽃화분처럼 바라보는 작가이자 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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