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불황이 매우 심각하다. 실제로 11월까지 손익분기점을 넘은 한국영화는 <범죄도시3>와 <밀수>,<30일>,<잠>까지 단 4편에 불과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지난 8월에 개봉한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384만 관객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에 근접했지만 이병헌과 박보영, 박서준 등 스타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고 200억 가까운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영화의 성적으로는 결코 만족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난 11월 22일에 개봉한 또 한 편의 영화가 올해 5번째 손익분기점 돌파를 향해 순항하고 있다. 바로 신군부의 군사쿠테타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영화 <서울의 봄>이다. 230억 원에 달하는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서울의 봄>은 1일 개봉 열흘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서울의 봄>은 오는 6일 개봉하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나폴레옹>만 잘 넘기면 12월 중순 정도에 손익분기점에 해당하는 460만 관객에 도달할 전망이다.

<서울의 봄>을 연출한 김성수 감독은 <비트>와 <태양은 없다> 같은 청춘영화부터 <무사> 같은 무협액션, 코미디 장르의 <영어완전정복>, 정치범죄드라마 <아수라>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든 바 있다. 그리고  지난 2013년에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소재로 한 재난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 최근 코로나19로 한 차례 커다란 홍역을 치렀던 지금 다시 보면 더욱 새롭게 느껴지는 영화 <감기>다.
 
 <감기>는 2013년8월에 개봉해 전국적으로 3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감기>는 2013년8월에 개봉해 전국적으로 3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 CJ ENM

 
리틀 정우성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배우로

영화 <해바라기>에서 여주인공 희주를 연기했던 허이재는 데뷔 초 '김태희 닮은꼴'로 유명세를 탔다. 사실 신인들은 데뷔할 때 유명스타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름을 알리는데 도움이 될 때가 적지 않다.

지금은 누구 못지 않은 스타배우가 된 장혁 역시 데뷔 초기에는 '리틀 정우성'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장혁은 정우성과 닮은 외모는 물론이고 특유의 반항적인 이미지까지 데뷔 초 정우성을 연상케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영화 <짱>과 드라마 <학교>, god의 뮤직비디오 <어머님께> 등에 출연하며 '리틀 정우성' 이미지를 이어가던 장혁은 2002년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를 통해 변신에 성공했다.

2000년대 초반 영화 <화산고>와 <정글쥬스>, <영어완전정복>,<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등에 출연하며 승승장구하던 장혁은 2004년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한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돼 현역으로 입대했다. 전역 후 자숙의 시간을 갖던 장혁은 2007년 드라마 <고맙습니다>를 통해 복귀했고 2010년 드라마 <추노>에서 이대길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그 해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고 화려하게 재기했다.

2011년에도 영화 <의뢰인>과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출연해 호연을 선보인 장혁은 2013년 영화 <감기>를 통해 <영어완전정복>을 만들었던 김성수 감독과 10년 만에 재회했다. 장혁이 투철한 직업정신과 정의감을 가진 소방대원 강지구를 연기한 <감기>는 전국 311만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감기>는 2023년 현재까지도 장혁이 출연한 영화 중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작품으로 남아있다.

장혁은 <감기> 이후 영화 <가시>와 <순수의 시대>,<검객>,<강릉>,<더 킬러: 죽어도 되는 아이> 등에 출연했지만 하나같이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운명처럼 널 사랑해>와 <장사의 신-객주>,<보이스>,<돈꽃>,<배드파파> 등 드라마에서 시청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장혁은 영화 <화산고>를 촬영했던 2000년대 초반부터 오랜 기간 절권도를 수련하면서 난이도가 높은 액션 장면을 대역 없이 소화할 수 있는 배우로도 유명하다.

엄청난 재난 속에서 무책임한 주인공들
 
 영화 속에서 인해는 의사로서의 의무와 책임보다는 딸 미르의 안위에만 온 신경을 기울였다.

영화 속에서 인해는 의사로서의 의무와 책임보다는 딸 미르의 안위에만 온 신경을 기울였다. ⓒ CJ ENM

 
<감기>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은 1995년 이병헌 주연의 <런어웨이>로 데뷔해 빠르면 1년, 늦어도 2년에 한 편씩은 신작을 선보이던 부지런한 감독이었다. 하지만 김성수 감독은 2003년 장혁과 이나영 주연의 코미디 영화 <영어완전정복>을 끝으로 10년 가까이 장편영화를 연출하지 못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 현장을 떠나 있었던 김성수 감독이 '대상배우'로 성장한 장혁과 10년 만에 재회해 만든 영화가 바로 <감기>였다.

김성수 감독은 지난 2001년에도 중국 올로케에 70억 원의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무협액션영화 <무사>를 만든 적이 있다. 하지만 <감기>는 이를 훌쩍 뛰어 넘는 100억 원에 가까운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재난영화다. 조류독감이 인간에게 치명적인 감기바이러스로 변이했다는 설정의 <감기>는 감염자들의 격리와 치료제 및 백신을 구하기 위한 노력 등 코로나19 대유행 당시 실제 경험했던 장면들이 영화 속에서 실감나게 묘사된다.

하지만 장혁과 수애가 연기한 소방대원 강지구와 감염내과 의사 김인해는 배우들의 열연을 떠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면서 관객들의 미움을 샀다. 강지구는 시민들의 폭동으로 전쟁터나 다름 없는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미취학아동' 미르(박민하 분)를 길거리에 혼자 두고 사라진다. 딸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의사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내팽개치는 김인해 역시 공감을 사기 힘든 캐릭터였다.

사실 재난영화에서는 실제 주민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영화 속에서 가상의 도시를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감기>에서는 분당이라는 실존 지역을 배경으로 삼았다. '천당 아래 분당'이라 불리는 곳에서 벌어진 재난에 관객들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올 거란 김성수 감독의 판단 때문이었다. 다만, 서울과 매우 가까운 분당에서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거리를 봉쇄한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감기>에서는 국내에서 가장 큰 대형 할인마트 분당점이 주요배경으로 나온다. 초반에는 시민들이 미처 대피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셔터를 내리는 비정한 모습이 나오지만 영화 후반에는 고립된 분당 주민들을 위해 물자를 제공하는 인간적인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형 할인마트 장면은 혼잡한 분당이 아닌 경남 양산의 비어있는 병실이 많은 병원과 규모가 큰 할인마트에서 촬영했다.

분당주민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대통령
 
 차인표(오른쪽)는 고립된 분당 주민들을 지키려는 대통령 역으로 특별 출연했다.

차인표(오른쪽)는 고립된 분당 주민들을 지키려는 대통령 역으로 특별 출연했다. ⓒ CJ ENM

 
<감기>에서는 두 주인공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관객들의 분노를 자아낸 반면에 관객들이 응원하는 '절대선' 캐릭터들도 있었다. 김인해의 딸이자 영화에서 항체를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던 미르가 대표적이다. 미르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인해가 어깨에 총을 맞자 군인들을 향해 양팔을 벌리며 "제발 우리 엄마 쏘지 마세요"라고 울면서 외친다. 당시 극장에서는 미르 역을 맡은 아역배우 박민하의 열연을 보며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배우 차인표는 대한민국 대통령 역할로 특별 출연했다. 분당 주민에게 발포명령을 한 국무총리(김기현 분), 미국에서 파견된 바이러스 확산 방지 책임자 스나이더(보리스 스타웃 분)와 대립하면서 국민의 안전을 지키려고 애쓰는 개념 있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국무총리에게 "감염된 분당주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냐"고 외치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유해진은 어떤 상황에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강지구의 동료 소방대원 배경엽을 연기했고 <감기>에 특별 출연한 마동석은 감염자 통제를 위해 파견된 군인 전국환 역을 맡았다. 전국환은 분당이 통제될 기미를 보이자 미군 전투복을 입고 탈출을 시도했고 통제 후에는 폭동에 가담해 악역으로 전환한다. 항체를 가진 미르를 납치해 피를 뽑으려 했던 전국환은 강지구, 배경엽과 난투를 벌이다 바리케이드에 가슴을 관통 당하며 최후를 맞는다.

박정민도 신인 시절 <감기>에 조·단역으로 짧게 출연했다. 박정민은 <감기>에서 분당을 통제하기 위해 파병된 군인 역을 맡았는데 혼란스러운 주민들 사이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주민들에게 치료제가 없다는 것과 감염자들을 화장시킨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비록 분량은 짧았지만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이끌어낸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시절우리가좋아했던영화 감기 김성수감독 장혁 차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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