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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은퇴한 지 9개월, 얼마 안 되는 기간이지만 생활상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침마다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켜 출근을 서두르던 동작들은 안 해도 되고, 식사 시간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하는 일도 특별히 정해진 것은 아니고, 딱히 만나야 될 사람도 없다. 잠자는 것도 자고 싶을 때 자면 된다.

말 그대로 모든 게 자유롭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의 의지에 따른 생활이 가능해진 것이다. 한 번쯤 누구나 갈망할 것 같은 구속 없는 자유로움, 나도 은퇴 전 현실이 팍팍할 때는 이런 생활을 꿈꾸며 살았다. 마침내 아득히 먼 미래, 남의 일만 같았던 이런 날들이 내게도 찾아왔다.

그렇게 꿈꾸던 생활이 시작됐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구속 없는 나날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부터 나의 계획에는 전혀 없었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학창 시절부터 은퇴 때까지 어떤 조직에든 소속되어, 한 번도 소속감 없이 살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불청객처럼 찾아온 공허감과 우울감에 무기력해졌다.

먼저 퇴직한 선배들로부터 은퇴 후 우울증이 온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기는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설마 나처럼 계획적이고 현실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겠어. 할 일 없이 빈둥대는 사람이나 걸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하고는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공허감이나 우울감은 생활상의 큰 변화가 오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퇴직자의 가슴속 허점을 파고드는 것 같다. 나는 호기롭게 주변 사람들에게 꿈같은 이상적인 은퇴생활을 떠들고 다녔지만, 예외는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조직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가 자유로운 생활로 바뀌자 소속감과 긴장감이 사라진 자리를 공허감과 우울감이 대신하여 활기를 잃었다. 무기력한 생활이 한 달 넘도록 이어졌다. 좀 더 냉철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뭔가를 서둘러 시작했어야 하는데...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철저히 무시한 나의 잘못이 빚은 결과였다.
  
글쓴이가 일구어 놓은 텃밭의 일부이다.
 글쓴이가 일구어 놓은 텃밭의 일부이다.
ⓒ 곽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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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이런 불안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를 찾아 행동으로 옮겨야만 했다. 우선 퇴직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텃밭 가꾸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때마침 4월이라 텃밭 농사를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텃밭은 집에서 승용차로 10여 분의 거리에 있어 언제든지 부담 없이 갈 수 있다.

텃밭의 일부 면적은 퇴직 전부터 이미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도시 농부로 살았지만, 직장 일에 쫓겨서 나머지 면적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묵혀두고 있었다. 묵은 땅을 일구고, 농작물 씨앗을 뿌리거나 모종을 심고 텃밭을 가꾸는 동안은 잡념이 없어져 힐링이 되었다.

텃밭에 뿌린 채소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어린 모종이 쑥쑥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을 즐기는 시간에는 몸과 마음이 평온해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채워지지 않는 가슴속 공허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농작물이 자라는 것을 보는 즐거움에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기는 했지만, 뭔가 정신적으로 만족하고 지적으로 즐길 거리를 찾아서 가슴속을 마저 채워야 했다. 그래서 예전부터 은퇴 이후에 할 것이라고 마음먹었던 책읽기와 글쓰기를 시작했다.
 
글쓴이의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 서고에 책이 꽂혀있다.
 글쓴이의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 서고에 책이 꽂혀있다.
ⓒ 곽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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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는 이전에 사 놓기만 하고 읽지 못했던 책부터 읽었다. 인근에 있는 시립 도서관에 가서 필요한 책을 대출하여 읽기도 했다. 요즘은 전자책도 많지만 종이책을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종이책을 봐야 독서한다는 느낌이 든다. 종이책을 읽고 있으면 정신적인 허기가 채워지는 것 같다.

글쓰기는 마음속 이야기를 글로 풀어놓는 지적 활동이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다 보면 가슴속 응어리는 저절로 녹아내린다. 인간사와 세상사에 대해 마음을 터놓고 글 한 편을 완성하고 나면 속이 후련하다. 보약이 따로 없다. 글쓰기가 정신적, 정서적으로 건강해지는 보약이다.

그동안 잠자고 있던 블로그를 흔들어 깨우고, 오마이뉴스는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놀이터가 되었다. 특히 오마이뉴스의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지는 기사들은 깊은 감동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좋은 글을 읽는 게 좋은 글쓰기의 바탕이 된다. 글쓰기를 하면서 정신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짐을 느낀다.

이제 나는 텃밭 가꾸기와 책 읽고 글쓰기를 통해 은퇴 생활을 나름대로 즐긴다. 내 가슴속은 공허감과 우울감을 밀어내고 새로운 열정과 의욕으로 다시 채워지고 있다. 앞으로는 나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활동뿐만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는 또 다른 활동을 모색하려 한다.

아울러 육체적으로는 자연 현상을 거스를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계속 발전하는 젊음을 유지하고 싶다. 인생 2막은 내가 즐기는 일이면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하는 작은 소망을 가슴에 품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실릴 수 있습니다.


태그:#은퇴이후, #은퇴이후우울증, #은퇴이후계획, #은퇴이후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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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삶과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가끔 글로 표현합니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살맛나는 따뜻한 세상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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