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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걷는 것은 동시대를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그 안에 우리네 삶의 오늘과 내일, 어제가 있다. '골목길 TMI'는 골목의 새로운 변화와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번 호에서는 인천의 서쪽 끝 마을, 화수·화평동(花水·花平洞)의 추억을 따라 걸었다. 부두와 공업단지 노동자들의 애환이 밴 오래된 골목엔 옛것을 애틋하게 지키고 근사하게 가꾸려 애쓰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기자말]
세숫대야 냉면의 고향 화평동 냉면 거리. 허기진 마음까지 채워주는 푸짐한 한 그릇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세숫대야 냉면의 고향 화평동 냉면 거리. 허기진 마음까지 채워주는 푸짐한 한 그릇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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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를 위한 푸짐한 한 그릇

인천 동구에는 일찍이 일제가 설립한 공장이 즐비했다. 조선 기계 제작소, 정미소, 성냥 공장, 대규모 기숙사 등이 수두룩했다. 이는 광복 후 1990년대 초까지 한국기계공업, 일진전기, 두산중공업, 현대제철, 동일방직 등 굵직한 기업으로 이어졌다.

화도고개와 화평운교, 화수부두를 중심으로 다양한 형태의 가옥과 상권이 자리하며 화수·화평동은 이들 공장을 위한 배후 주거 마을로 자리를 잡았다. 일자리를 찾아 흘러 들어온 이들이 함께 모여 살며 북적거렸고, 고된 생활에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동인천역 인근 '화평동 냉면 거리'의 역사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먹성 좋은 노동자들은 사리를 추가로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철길 아래서 처음 냉면집을 시작한 '아저씨냉면' 1대 사장 김용만(71)씨가 아예 지름이 30cm에 가까운 큰 그릇을 개발해 푸짐하게 담아냈다. 화평동의 '세숫대야 냉면'은 그렇게 탄생했다.

1990년대 초 인천역∼주안역의 경인전철 복복선 확장 공사로 골목 한쪽이 헐려 냉면집이 열두 곳만 남은 뒤에도 호황은 이어졌다.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찾아왔고, 좁은 골목에 차량이 줄을 잇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일미화평동냉면’ 홍경애 사장은 28년째 이 거리를 지키고 있다.
 ‘일미화평동냉면’ 홍경애 사장은 28년째 이 거리를 지키고 있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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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 국물, 송송 썰어 듬뿍 올린 채소와 매콤달콤 고추장 양념이 일품인 화평동 냉면. 겨울철에도 별미다.
 담담한 국물, 송송 썰어 듬뿍 올린 채소와 매콤달콤 고추장 양념이 일품인 화평동 냉면. 겨울철에도 별미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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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미화평동냉면' 홍경애(69) 사장은 28년째 매일 육수를 낸다. 양념도 손님들 입맛에 맞게 연구를 거듭했다. 채소와 과일을 우려내 담담한 국물, 송송 썰어 듬뿍 올린 채소와 매콤달콤한 고추장 양념이 환상의 궁합을 이룬다.

"올여름에도 방송국에서 나와 촬영을 했어요. 전국에서 알아주잖아요. 자부심을 갖고 화평동 냉면 거리의 명맥을 이어야죠."

세월 따라 풍경은 변했지만 상인들의 굳은 심지는 여전하다.

화수아파트의 마지막 이발관
 
    
철길 위에 놓인 구름다리, 화평운교(花平雲橋). 사람들은 흔히 이 운교를 '인천극장 가는 구름다리'라고 일컬었다. 다리 건너 바로 인접해 있는 화수아파트 건너편이 극장이었기 때문이다. 아파트 뒤쪽엔 화수자유시장도 있었다. 근처 화수부두와 만석부두에서 들어오는 싱싱한 해산물로 유명해 화수동 사람들은 물론 가까운 화평동, 만석동 주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1970~1980년대 화수동의 전성기를 품고 있는 거리는, 오늘 한산하다. 옛날 번화가가 지금은 골목이 됐다. 그래도 주민들에겐 정겹고 고마운 길이다.
 
뱅글뱅글 힘차게 돌아가는 ‘시민이발관’의 회전봉.
 뱅글뱅글 힘차게 돌아가는 ‘시민이발관’의 회전봉.
ⓒ 유승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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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아파트의 마지막 이발관을 지키는 노장의 이발사.
 화수아파트의 마지막 이발관을 지키는 노장의 이발사.
ⓒ 유승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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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오래된 화수아파트 1층, 뱅글뱅글 돌아가는 이발소 회전봉이 상쾌한 아침 공기를 가른다. 시민이발관 양공옥(78) 이발사는 아침 일찍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1979년 화수아파트를 분양받아 살며 지금 자리에서 가게를 시작했다.

공장 사람들, 철도 공무원, 인근 학교 학생들까지. 화수·화평동에서 그의 이발소를 거친 사람들은 셀 수도 없다.

"1990년대 초반까지 종업원을 두고 일했어요. 극장 관객, 시장 상인,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이 앞이 인산인해였어."

그때만큼 손님이 북적이진 않아도 물을 데우는 밥솥, 손때 묻은 가위며 면도기, 빗, 여전히 튼튼한 의자는 그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노장의 이발사는 이곳에서 평생을 함께한 전우들과 한가로운 일상을 보낸다. 오래된 이발소에 쏟아져 들어오는 가을 햇살이 포근하다.
 
화평운교 건너, 정겨운 골목이 된 화수아파트 앞.
 화평운교 건너, 정겨운 골목이 된 화수아파트 앞.
ⓒ 유승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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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샘물이 솟는 신비로운 카페 ‘나무와 샘’
 매일 샘물이 솟는 신비로운 카페 ‘나무와 샘’
ⓒ 유승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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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을 품은 카페, 나무와 샘
 

하마터면 스쳐 지날 뻔했다. 이맘때면 초록 넝쿨이 건물 담벼락을 가득 메우고 '나무와 샘'이란 간판까지 쏟아져 내린다. 다행히 카페를 찾는 인기척에 주인이 유리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라며 손짓을 한다.

"2019년에 건물을 매입해서 손수 꾸몄어요. 1층은 보다시피 우물이 있는 카페, 2층은 작품 전시실, 3층 루프톱에서는 근대사 물건을 구경할 수 있어요."

호기심 많은 '나무와 샘' 이광범(59) 대표는 카페 인테리어를 하면서 1층 바닥의 철판을 걷어냈고, 우물이 옛 모습 그대로 살아 있음을 발견했다. 8m나 되는 깊은 바닥의 암반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닫힌 공간 멈춘 시간이 그를 만나면서 흐르기 시작했다. 샘물이 솟는 신비로운 카페가 '마을 공동 우물'의 추억을 소환했다.
 
우물처럼 마르지 않는 영감을 지닌 아버지와 우물보다 깊은 열정을 품은 아들.
 우물처럼 마르지 않는 영감을 지닌 아버지와 우물보다 깊은 열정을 품은 아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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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주민들이 반기고, 빨래터이자 공동 식수였던 우물터의 카페 이야기를 듣고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요."

나무뿌리 조각가이기도 한 이광범 대표는 요즘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2000여 점의 작품 중 일부는 건물 곳곳을 근사하게 채우고 있다. 아들 이승현(27)씨가 카페를 맡아준 덕분이다. 우물처럼 마르지 않는 영감을 지닌 아버지와 우물보다 깊은 열정을 품은 아들은 오늘도 공간을 애틋하게 지키고 근사하게 가꾼다.
 
 화도고개 오거리의 담담한 저녁 풍경. 어머니가 청춘을 바친 ‘제일기름집’ 곁을 아버지가 심은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다.
  화도고개 오거리의 담담한 저녁 풍경. 어머니가 청춘을 바친 ‘제일기름집’ 곁을 아버지가 심은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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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기름집 2대 사장 이인숙씨.
 제일기름집 2대 사장 이인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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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가게, 제일기름집

"엄마 뒤를 이어 제일기름집을 지키고 있는 지킴이입니다."

제일기름집 2대 사장 이인숙(57)씨는 52년 전 1972년에 기름집 문을 연 어머니 고 류옥년(1940~2018)씨의 철학을 이어받은 우직한 장사꾼이고, 반세기 넘게 한자리를 지킨 인천 사람이다.

"서민들의 삶의 현장이에요. 저희 아버지도 인천제철(현대제철)을 다녔는데, 첫 월급이 3800원이었대요. 먹고살기 힘들었죠. 엄마들도 부업을 하거나 동일방직을 다녔어요. 그땐 기름을 박카스 병으로 반 병씩 팔았어요. 그것도 생일날 미역국 끓일 때나 사다 먹고 그랬죠."

1960년대 화도고개 길을 따라 쌀집, 양화점, 양장점, 이발소, 미장원, 연탄 가게, 채소 가게, 정육점 등 작은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공장 노동자들이 고객이었다. 1980년대까지도 첫새벽부터 출근 행렬이 새카맣게 모여들었다.

작업복 입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동일방직, 인천제철, 판유리공장, 동국제강 등 공장이 3교대로 돌아가던 때라 밤늦도록 문 여는 가게가 많았다. 그중에도 목 좋은 제일기름집은 그 시절 광고판 역할을 했다. 2층 외벽에 애관극장, 오성극장의 최신 영화 포스터가 줄지어 붙곤 했다.

이젠 다 추억이고 그리움이다. "싱숭생숭해요. 단골 어머님들이 그러시거든요. 나 죽을 때 다됐는데 여기서 그냥 죽었으면 좋겠는데." 재개발 얘기에 그가 눈물을 왈칵 쏟는다.

"변화라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변화를 원하지 않는 나는 뭔가, 그런 생각도 들기는 하고... 어머니가 청춘을 바친 가게, 제가 어릴 때부터 사랑받은 동네에서 도란도란 정을 나누며 살고 싶어요. 그 시기가 당겨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현재 동구 화평동 1-1번지 일원(12만 1263m2)에선 '화수화평 재개발사업'이 진행 중이다. '꼬순내'가 솔솔 나는 화도고개 오거리엔 세월이 깃든 집과 오래된 나무, 골목길 사람들이 지긋이 나이 들어가고 있다. 가을의 끝자락, 차가워진 밤공기에 괜스레 마음이 시리다.
 
1980년대 제일기름집 외벽에 걸린 영화 포스터.
 1980년대 제일기름집 외벽에 걸린 영화 포스터.
ⓒ 사진 제공 이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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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도고개 오거리의 옛 풍경.
 화도고개 오거리의 옛 풍경.
ⓒ 사진 제공 고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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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화평동 마을지도
 화수·화평동 마을지도
ⓒ 유승현 포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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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포토 디렉터

태그:#인천, #제2의개항, #1·8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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