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 어느 때보다 실패를 무서워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집에서 편하게 신을 실내화 하나를 사도 낮은 별점 순으로 후기를 철저하게 살펴보며 심사숙고해서 고른다. 실패한 쇼핑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를 봐도 '스포일러 주의'가 대세였다면 요즘은 '결말부터 보기' 또는 '요약 영상'들이 더 많은 조회수를 차지한다. 언제부턴가 즐거움에서조차 실패를 경험하고 싶지 않아 한다. 

뭐든지 '정해진 길로 빨리빨리'인 우리에게는 실패할 시간조차 아깝다. 오슬로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시절, 유럽 각국의 다른 나라 학생들에게 왠지 모를 여유와 배짱이 느껴졌던 이유는 자기 자신을 탐색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가는 루트 말고도 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용인되었기 때문에, 실패해도 루저가 되지 않았다. 한국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그들은 잘못해서 뒤로 넘어져도 매트리스가 놓여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었지. 우리는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질 것 같은데 말이야. 

최근 카이스트 실패 연구소에서 '실패 주간'을 지정하고 실패를 예찬하는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비 과학도들에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명언을 몸소 체험 시켜줄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위대한 실패자 어니스트 섀클턴

'실패 예찬'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떠오른 한 사람이 있다. 언젠가 <알쓸인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소개했던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이다. 섀클턴은 멋진 탐험 성공담이 아닌, '위대한 실패'로 그 이름이 더 잘 알려져 있다. 

1914년 섀클턴은 27인의 대원들과 함께 최초로 남극대륙횡단에 나선다. 그러나 남극을 불과 150km를 앞두고 부빙에 갇혀 좌초되어 버린다.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보려 했지만 배는 부빙의 압력에 의해 쓰러지며 침몰하고 만다. 이 절망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에서 섀클턴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목표가 바뀌었다. 전원 살아서 돌아간다." 

심지어 그는 음악 감상회를 열고 벤조를 연주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계속해서 기록하고 사진을 남겼다. 실패의 과정을 기록한다면 그것 자체로 또 다른 성공담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던 것일까. 실패에 대처하는 유연한 마인드와 타고난 낙천성으로 그는 최악의 시기를 희망으로 버텨나간다. 

그 결과, 많은 고난과 역경을 뚫고 28인의 대원 모두 살아서 귀환했다. 전원 구조되어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해 아내에게 쓴 편지 "드디어 해냈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우리는 지옥을 헤쳐 나왔소"라는 대목을 볼 때는 나도 모르게 존경심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원 구조된 섀클턴과 27인의 대원들
 전원 구조된 섀클턴과 27인의 대원들
ⓒ Frank Hurley/Scott Polar

관련사진보기

 
섀클턴 정신을 이어받기

20여 년 전, 9살의 가을날에 우리 가족은 주왕산 국립공원에 단풍을 보러 갔다. 등산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작은 연못의 징검 다리를 건너다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다. "으앙!" 울음을 터뜨렸고 아빠가 재빠른 순발력으로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쑥 꺼내줬지만, 허리 밑으로는 다 젖어버린 불운의 어린이가 되었다. 

그 가을날 엄마 아빠는 자신도 모르게 섀클턴 정신을 실천했던 것 같다. 원래의 계획이 실패한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목표를 바꾸면 된다. 바람은 차갑고 햇볕은 따사로웠던 가을날. 오빠의 내복을 빌려 입고, 바지와 양말과 신발을 너른 바위 위에 올려 오징어처럼 말려두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단풍처럼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아유~딸내미가 물에 빠졌나 보네~" 하며 놀리며 지나가던 것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아직도 가족모임에선 주왕산 입수 사건이 종종 언급되곤 한다.

뜻대로 된 것보다 뜻대로 되지 않았던 기억들이 내 안에 더 강렬하게 남는 법이다.아무 일 없이 계획대로 주왕산 정상에 올라갔다 왔으면 가을 가족여행의 해상도가 이 정도로 선명할까.

문득 떠올린 나의 어린 시절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물에 쫄딱 젖어 엄마한테 혼구녕이 났지만 이제는 떠올리면 웃음이 나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으니 괜찮다고.

주왕산 주봉에 올라가지 못할 상황이라면 개울가에 앉아 물놀이를 하며 재미있게 놀면 된다. 정신승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마음가짐이 우리 어깨 위에 잔뜩 올라가 있던 무거운 돌을 내려주고, 인생을 좀 더 유머러스하고 즐겁게 볼 수 있게 만든다.

"오히려 좋아" 마인드를 널리 이롭게 알리며, 삶에 유연성을 불어 넣으며 살고 싶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음가짐과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면 그 생각만으로 등 뒤에 매트리스는 아니지만 도톰한 요 한 장쯤은 깔린 기분이 드는 것 같다.

실패해도 괜찮다!

덧붙이는 글 | *참고 서적 : <인듀어런스> 캐롤라인 알렉산더 


태그:#실패예찬, #실패주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매일의 기쁨을 더 자주 기록하고 싶은 취미부자 직딩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