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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조선왕조 시절 수많은 시인·묵객이 활동했다. 그중 가장 호방하고 주체성이 강한 인물을 뽑자면?

사이팔만(四夷八蠻)이 모두 황제라 칭하는데
오직 우리 나라만 자주독립을 못하고 속국 노릇을 하니
이 욕된 처지에서 살면 무엇하고
죽는단들 무엇이 아까우랴
내가 죽더라도 곡(哭)하지 마라.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가 임종을 앞두고 가족에게 남긴 말이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홍안(紅顔)은 어듸두고 백골만 무쳤느냐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임제가 33살 되던 해 평안 도사(都事)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가는 길에 개성에 들러 천하의 명기로 알려진 황진이를 만나고자 했다. 그녀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바라 만나 대작을 하고 싶었던 거였다. 하지만 이미 석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을 찾아가 잔을 올리며 통곡을 하고 시 한 수를 읊었다.

이로 인해 그는 얼마 뒤에 해직되었다. 도사의 신분으로 한낱 기생의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시를 읊었다는, 시쳇말로 '품위문란죄'였다. 임제는 조선시대 자주성이 강한 포부와 정한이 넘치는 인물이다. 39살로 마감한 짧은 생애가 온통 비탄·울분·비애·방랑·시문·여인들과 시정(詩情) 넘치는 사연 가득한, 비탈지고 그러면서도 넉넉한 삶이었다.

임제는 1549년 11월 20일 전남 나주 회진에서 5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아버지 임휘진과 어머니 경주 김씨 사이에서 5남3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중종 때 조광조를 구하려고 상소를 올렸던 좌승지, 광주목사 등을 지낸 뼈대 있는 가문이었다.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 외에 벽산(碧山)·소치(嘯痴)·겸재(謙齋) 등이 있는데 백호로 널리 알려졌다.

허목(許穆)이 쓴 묘비명에 따르면 "타고난 재능이 절등하여 하루에 수천 언(言)을 외울 수 있었고 문장이 호탕한데 시에 특징이 있었다."고 하였다. 초년에는 글공부보다 노는 데 팔려 술집을 드나드는 등 다소 부랑끼 있는 아이였다. 20살에 들어 비로서 학문에 뜻을 세우고 발분하여 22살 가을에 대곡(大谷) 성운(成運)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다.

대곡은 젊은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그의 형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속리산으로 들어가 학문에만 열중한 선비였다. 대곡은 서경덕·조식·이토정 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그의 문하에서 조선시대의 올곧은 선비·풍류객이 다수 성장할 만큼 큰 인물이었다.

임제는 천성이 호방한 데다 스승 대곡의 훈도를 받으면서 그의 학문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 되었다. 그것도 주자학에 갇힌 관념적인 학문이 아니라 기백이 넘치는 배움이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 3년 동안 도학에 몰두하였다. 경서와 격물치지 연구에 날밤을 세웠다.

임제는 뒷날 <대곡선생 제문>에서 스승을 추모한다. "만약 세상의 명예나 도적질하는 녹록한 무리들과 한 자리에 놓고 평가를 한다면 그야말로 매화가 보통 꽃들 사이에서 빼어나고 학이 뭇 닭 속에서 특이한 것과 무엇이 다르오리까. 공자가 말씀하신 '세상에 은둔해 있어도 고민이 없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데 이르러 오직 선생이 여기에 거의 가까운 것입니다."라고 추모하였다.

임제는 3년 후 속리산 대곡 선생의 문하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손수 옥퉁수를 만들어 불며 산수를 즐기는 한편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29살이던 1577년 9월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배수되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동서붕당이 심해지면서 관리들은 능력보다 파당에 따라 진퇴가 결정되고, 반대파는 누명을 씌워 제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사(文詞)로 이미 세상에 이름이 날로 높아갔는데, 이때 동서붕당의 물의가 일어나 선비들은 명예로 다투며 서로 추겨 세우고 끌어들이고 하였다. 공(公)은 자유분방하여 무리에서 초탈한데다, 굽혀서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은 때문에 벼슬이 현달하지 못했다."(묘비문)
임제는 31살이 되는 1579년 함경남도 안변의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부임한다. 이때 양사언·허균·차태상 등 당대의 문우들과 가학산에 올라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이 무렵에 지은 <출새행(出塞行)>이다. 변방 즉 국경에 출정하여 지은 시란 뜻이다.

열사란 무엇을 하고 사는건가
반초(班超)의 공을 세워 정원후의 봉(封)을 꼭 받아야 한다
금과(金戈)로 본국의 달을 하직하고
철마타고 국경을 향해 가노라
살기가 사막에 둥둥뜨고
음산한 바람은 무루(戊樓)를 뒤흔드는구나
허리에 찬 백상(白羽)의 화살로
오랑캐의 두목을 쏘아 목을 벨거로세.
좋은 재주 불행히도 사화에 연좌되어
낙향하여 고향에 누워 계셨네
뭇 입은 무쇠를 녹인다는데
수신으로 헐뜯는 소리가 그쳤었지요
한마당 취한 꿈 봄은 이지러지고
혼은 큰 강물따라 흘러갑니다.
하교(河橋)라 새벽내 목놓아 우니
취루에 안개만 자욱하구나.


임제는 탈속과 울분과 방랑의 일생을 보내면서 많은 시문을 지었다. 그의 문집 <백호집(白湖集)>에는 1천여 수를 헤아리는 주옥 같은 시가 담겼다. 조선문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김시습→허균→김만중→박지원으로 이어지는 계맥(系脈)에 임제를 끼고, 조선의 양대 천재시인 으로 박은(朴誾)과 임제를 들기도 한다. 또 권필(權韠)과 함께 중요한 소설의 위치를 차지한다.

임제는 재사이면서도 초탈하여 흉중에 막힘이 없고 심성이 맑았으며 협기 넘치는 문인이었다. 천태산인(天台山人) 김태준은 "구법(句法)이 호방하고 사지(詞旨)가 농려하여 당대의 두목지(杜牧之)와도 같아 권필도 미치지 못할 바"라고 평하였다.

황진이를 추모하는 시 한 수로 질책을 받은 임제는 벼슬길에 더욱 환멸을 느꼈다. 벼슬도 벼슬이지만 사화와 붕당으로 아귀다툼을 하는 권력세계, 수기치인의 학문보다 이권과 세력에 양심을 팔고 사는 유생들의 처신에 실망했다.

임제가 평안도사를 마치고 임지를 떠날 무렵 한우(寒雨)라는 평양 기녀와 만나 술잔을 나누었다. 시·서·화에 춤과 노래까지 겸비한 절세가인이었다. 임제는 헤어지기가 서운하여 시 한 수를 읊었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내천(川)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寒雨)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잘까 하노라.

한우는 만만찮은 여인이었다. 즉각 대구(對句)를 지었다.

어이 얼어자리 무슨 일 얼어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두고 얼어자리
오늘은 찬비(寒雨) 맞았으니 녹아자면 어떠리.


임제와 한우는 '찬비'와 '한우'를 적절히 사용하여 남녀의 정을 속되지 않고 품격 있는 애정의 표현을 시로 나누었다.

임제가 숨지기 전 어느 날 한명회의 무덤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지었다. <한명회의 무덤을 지나며>이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도와 공신이 된 이후 누대에 걸쳐 온갖 호사를 누린 '권력의 화신'이다.

사나이 살고 죽음이
의로움 위해 끝장 봐야 하리
큰일에서 경륜은 혹시 권도(權道)를 용인한다고
성인도 안다 하였어라.

주나라 상부(尙父)도
죄는 쳐야 한다 말했거늘
그대 마냥 공훈 세움이야
세상에 그 무엇 남겨주나.


임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 8월 11일 고향 나주 회진에서 39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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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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