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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서툰 외교로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조선왕조와 집권 서인 세력은 효종이 즉위하면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고 종주국 명나라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북벌정책을 내걸었다. 당시 청국이 중원을 통일하여 막강한 국력을 갖춘 터이어서 현실성이 적은 '내부용'이었다. 조선의 집권세력은 몇 차례 전쟁을 치루면서 자신들의 무능을 은폐하고자 실효성이 없는 구호를 내세우고 백성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마치 무능한 안보로 북한인민군의 침공을 받고 이승만이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기고는 북진통일론을 내세웠던 일의 전주곡이라 할 것이다.

실정은 권력층이 자행하고 희생은 백성들이 치러야했다. 백성들은 북벌정책으로 군사훈련과 부역에 시달리고 막대한 군사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죽은 명나라가 산 조선백성들을 죽이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비록 속빈 구호이지만 '북벌(정책)'은 한동안 조선사회의 대의와 명분으로 작동하였다. 권력층은 이를 적당히 부추겨 애국심을 유발하고 정권유지에 활동했다. 김자점이 권력투쟁에 밀려나자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청국에 밀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벌정책'은 그 실효성과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조선사회의 '시대정신'으로 굳혀졌다. 사대부들은 청국을 세운 여진족을 북방오랑캐라 여기면서 멸시하고 이미 망한 나라 명나라를 추모하는 회귀현상이 전개되었다. '오랑케 청국'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엄청난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데 조선의 조야에서는 '현실인정, 속내 북벌'이라는 이율배반의 길을 걷고 있었다. 청국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말까지 강희·옹정·건륭 3대의 출중한 군주가 통치하면서 태평성대를 누렸다.

언제까지나 백성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고 거짓 구호 정치를 해 나갈 수는 없었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독일에 괴테가 있다면(중략)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박희병)는 말처럼, 정조가 집권하면서 깨어 있는 선비들이 등장하고, 연암 박지원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1780년 청국에 사절로 가는 친척을 따라 연경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여행하면서 겪은 일, 청국 학자들과의 토론한 내용을 기록하여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폭넓게 소개하였다.

연암의 주위에는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실학파가 형성되었다. 홍대용·박제가·이덕무·유득공·남공철·이서구 등 당찬 실력가들이다.

박제가(朴齊家, 1750~?)는 서울에서 승지 박평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초정(楚亭), 양반의 자제이지만 첩의 아들이어서 과거시험이 허락되지 않는 등 신분차별이 심했다.

열한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여 박제가와 그의 어머니는 버림받은 외톨이 처지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면서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머리가 대단히 우수했던 그는 어려서부터 독습으로 학문을 하고 글씨를 잘 썼다. 열다섯 살 때 쓴 글씨를 우연히 보게 된 이덕무가 깊은 인상을 받고 아홉 살의 연하인 데도 친구로 삼았다. 이덕무 또한 서얼 출신으로 비극적인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처지여서, 둘은 동병상련 속에 실학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박지원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이를 통해 홍대용·유득공·이서구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게 되고, 더 넓은 세상을 알아가면서 실학사상을 탐구하였다. 박제가의 젊은 시절의 시에 <계곡물 옆에서>가 있다.

맑은 계곡과 오솔길 섬돌을 빙 둘렀고
초막은 간신히 천 권의 책을 들일 수 있네
청산과 마주하여 서로 싫어함이 없고
외 구름 조각은 끼었다 걷혔다 하누나.


영조가 죽고 개명군주 정조가 즉위하였다. 박제가 등 서얼 출신들에게는 행운이었다. 그가 스물일곱 살인 1776년 정조는 궁궐 안에 규장각을 설치했다. 사료편찬, 도서출판과 국정개혁을 연구하는 학술기관이었다. 실무를 담당하는 검서관으로 박제가·이덕무·유득공·서상수 등 서얼출신의 우수한 재야학자들을 임명했다.

왕은 양반출신 고관들의 맹렬한 반대가 있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이들에게 정식 품계는 내리지 않았지만 정5품에 상당하는 대우를 하였다.

검서관이 된 2년 뒤 청나라 방문단의 수행원으로 선발되었다. 오래 전부터 크게 발전한 청국의 문물과 학자들을 만나고 싶어 했던 바람이 이루어졌다. 청나라 방문단의 정사는 재상인 채제공이었다. '정조 임금에 채제공 재상 체제'의 조선후기는 세종대왕 이래 두 번째의 르네상스였다. 여기에 박지원을 비롯한 정약용·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 실학파들이 포진하게 되었다.

박제가는 석 달 동안 청국을 돌아보고 귀국하여 <북학의(北學議)>라는 장문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서문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어렸을 때 고운 최치원과 중봉 조헌의 고결하고 청신한 지도 정신력을 경모하여 왔다. 고운은 당나라의 관리가 되었지만 귀국한 후 혁신책을 실천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가야산에 칩거하여 그 뒤 생사도 분명치 않다. 중봉은 정사(正使)로서 북경을 방문한 뒤 <동환봉사(東還封事)>라는 개혁안을 제출하고 그 실천을 주장하였다. 중국과 대등한 국력을 기르고자 한 그들의 의욕은 달리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북학의>에서 농기구의 개량을 비롯하여 수차(水車) 이용, 토양에 맞는 품종개발, 수레도입, 기와·종이·화살·도로·교량·화폐·문방구 등 전반에 걸쳐 소개하고 개량할 것을 제시하였다. 다양한 해외무역을 강조하고 서양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천문·역학·조선·무기제조·벽돌 제조 등을 건의했다. 천주교를 금지하여 외국인 입국을 금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총체적인 국정개혁안을 제시한 것이다.

세간에서는 박제가와 그 일파를 '북학파'로 불렀다. '북벌'에서 청을 배우자는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그의 저서 <북학의>는 바로 '북학'의 교과서가 되었다. 연경에 다녀와서 박제가는 <연경잡절(燕京雜絶)>을 지었다.

우물 위에 도르래를 달아
바퀴와 덮개를 만들고
좌우에 수레박 줄 두 가닥 내리면
그 힘이 배 이상 늘어나리라.

농부가 말똥을 주으려고
광주리 들고 말 꽁무니 쫓아가네
말이 땅 위에 서서 오줌을 쌀 것 같으면
땅을 파서 그 똥 오줌을 가져가네

언젠가 한강 위 밭을 모두 사서
사립문 마주보며 밭갈이 할거나
중국의 농정서를 잠시 뒤져서
용미차 만들어 당나귀로 맷돌을 돌리세.


예나 지금이나 사대주의자들은 실용보다 낡은 이념과 가치, 역사발전이나 개혁보다 기득권 유지에 함몰된다. 박제가는 정조 재위 중 두 차례나 더 청국을 방문하고, 부여 현감에 제수되는 등 한동안 소신을 펴는 활동을 하였다. 1800년 정조가 죽고 권력을 장악한 노론정권에 의해 투옥되고 곧 두만강변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의 소식은 기록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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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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