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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으로 밀려드는 안개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과 섬을 한 폭 수묵화로 물들인다. 잔잔한 바다가 회색빛 세상을 그리면, 점점이 떠 있는 어선 위로 날아든 물새의 날갯짓에서 잠시나마 느껴보는 평화로움. 이 가을, 완도의 바다는 자연이 부려놓은 천연의 수묵화로 다시 깨어난다. 

전남 국제수묵비엔날레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진도와 목포에서 열렸다. 코로나19로 인한 지난 특별전을 빼면 올해로 3회째다.

비엔날레는 2년마다 열리는 국제적 미술전람회이다. 국내에는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대구비엔날레 등이 있다. 광주비엔날레는 디자인을, 대구는 사진예술을 주제로 연다. 부산비엔날레는 청년비엔날레, 야외조각대전, 바다 미술제 등 다채로운 주제로 9회째 열렸다.

전남 국제수묵비엔날레는 지난 2018년 목포와 진도에서 시작했다. 소치 허련과 그의 자손 남농 허건의 영향력 때문이다. 이 행사는 우리의 전통 미술사가 수묵화에만 머물지 않고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을 결합한 현대미술로서 남종화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여기에 해남군도 곧 합류할 예정이며, 강진, 순천, 광양, 신안 등지로 확산될 것이 예상된다. 올해 해남군은 전남수묵비엔날레 유치를 위해 대흥사 호국대전에서 처음으로 특별전을 가졌다. 지역 언론과 해남군 예술단체가 4년째 공들여 준비한 결과이다. 해남군 행정도 적극적으로 이 행사의 추진을 서두르고 있는 분위기다.

그동안 본 전시회가 목포 구도심 일대와 진도 운림산방 일원에서 열렸지만, 해남군은 "전남 국제수묵비엔날레는 공재 윤두서의 실험적 정신을 적극 수용해서 우리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수묵비엔날레에 해남이 빠졌어도 비엔날레 기간에 공재 윤두서의 실험적 정신을 살린 수묵전을 자체 기획할 수 있다"며 "수묵화 특별전시회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서야 한다고"고 강조했다.  

해남군은 "한국 남종화의 뿌리가 공재의 실험적인 화풍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남도의 정신을 찾는 과정이다"라며 전시총괄 큐레이터가 선정한 한국의 대표 수묵작가 22명의 작품과 18명의 지역작가 작품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올해 열린 전남 국제수묵비엔날레는 아시아를 넘어 미국 등 19개국 1900여 명의 작가들이 참여했으며, 전남체전과 지역축제와의 연계로 관람객 활용 범위를 확대했다.  

남종화는 수묵산수화의 복합적 양식으로 이미 북송대부터 생겨났다. 소동파와 그의 벗들이 문인과 화공의 그림이 신분과 교양의 차이로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차이가 난다며 논리를 세웠다. 

이를 기반으로 '사인지화(士人之畵)'와 사대부의 회화론을 만든다. 그림을 업으로 삼지 않는 화가들이 취미로 그들의 뜻을 표현한 것인데, 이들은 기법에 얽매이거나 사물의 세부적 묘사에 치중하지 않았다. 그려내고자 하는 사물의 진수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의 학문과 교양, 그리고 필력을 갖춘 상태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동기창의 남북종화론이 성립, 이후 남종화와 문인화를 동일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우리나라는 18세기 전반기에 남종문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미 고려시대에도 사대부들이 원나라를 통하여 북송대 사대부화 이론을 접했다.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조선 후기는 한국의 승경을 화폭에 담은 진경산수화와 서민 계층의 생활상을 담은 진솔하고도 해학적인 풍속화를 많이 그렸던 때이다. 우리네 정서와 자아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 분야 외에도 문화의 다변성에 힘입어 전통을 반영한 남종문인화가 꾸준히 확산됐다.

19세기에는 18세기에 형성된 남종화의 바탕에 추사 김정희와 그 주변 인물들에 의해서 본격적인 남종화의 세계가 전개됐다. 이 시기에도 문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새로운 문화 계층으로 성장한 중인화가들도 남종화의 성장에 큰 몫을 담당했다.

추사 이후 조선의 남종화는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 그래서 남종화 본연의 취지와 정신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생겼다. 

중국은 이민족의 침입을 수없이 받았다. 이에 좌절한 문인 사대부들이 현실정치를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하면서 꿈과 이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들은 세상의 혼란에 저항하기보다는 인격 수양과 절제로 세상을 이겨내려 애썼다. 그 대표적인 표현 양식이 남종화로 발전했다.

완도에는 그 대표성에 정점을 찍은 인물이 있다. 신지도에 유배 온 원교 이광사는 시, 서, 화에 능했다. 원교는 조선의 글씨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서예의 대가로만 알려졌는데, 그는 조선의 사상가로서 차원을 뛰어넘은 우리만의 예술세계를 정립한 인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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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문화예술활동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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