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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 개사돈 모리네 이야기https://omn.kr/25n7v

모리는 아프다. 마른가지에 새싹이 돋아나던 봄날, 산책 중에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툭 쓰러졌다. 귓볼이 붉어지고 잇몸도 창백해졌으며, 눈꺼풀까지 파르르 떨려 힘겹게 깜빡거렸다고 했다.

그 길로 녀석을 안고 응급실로 뛰어가 정확한 병명을 얻기까지 무려 한 달간의 입원과 수차례 검사를 거쳤다. 결과는 듣기에도 생소한 '에반스 증후군'이었다. 

포털의 한 백과사전에는 '신체가 적혈구·혈소판·백혈구 등을 파괴하는 자가면역혼란질병으로, 원인은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며 주로 혈소판 감소증, 용혈성 빈혈 등 증세가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적혈구가 결핍되면 피로·호흡곤란 등 빈혈이 나타나고, 심각하지 않은 상처에서도 심하게 피가 난다. 백혈구 수치가 낮은 경우에는 쉽게 감염을 일으킨다. 또 합병증으로 홍반성낭창(루푸스) 또는 류머티스성 관절염 등 다른 자가면역혼란 질병, 악성종양을 동반하기도 한다. 확실한 치료법은 없지만 면역체계를 억제하기 위해 스테로이드를 사용한다. 또 비장을 절제하거나 적혈구·혈소판·백혈구 등을 수혈하는 치료법이 있기는 하나, 그 효과는 미미한 실정이다'라고 설명한다.

간혹 노견에게나 발견된다는 희귀질환을 생후 1년 6개월의 어린 생명이 떠안게 된 것이다. 심지어 몸 안에 퍼진 곰팡이균 때문에 외부 간염을 우려해 당분간 산책조차 할 수 없다. 오로지 가족에게 기쁨을 줬던 모리의 기약없는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힘겨운 시간들은 모리뿐만이 아니었다. 보호자도 항시 곁을 지켜야 했고, 위급 상황이 생길 때마다 품에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다. 복용할 약도 나날이 늘어갔다. 조심스레 문자로 모리의 상태를 물어보면 간절한 기도 부탁드린다는 근심어린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모리가 아파"
 
구찌와 모리가 한창 예쁠 때.
 구찌와 모리가 한창 예쁠 때.
ⓒ 김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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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 혼자 산책을 한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보호자에게 집중하며 걷느라 제법 의젓해졌지만, 이따금 가던 길을 멈추고 모리가 달려오던 횡단보도 앞 사잇길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모리가 아파...!" 나지막히 들려주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고는 바닥에 붙어있던 앞발을 무겁게 떼어냈다.  

벚꽃잎이 눈 내리듯 떨어질 무렵, 비로소 만난 모리는 산책을 만끽할 기력조차 없이 유모차 안에 누워 있었다. 그럼에도 우릴 발견하자마자, 그동안 몹시 아팠다는 듯 울음 섞인 외마디로 "멍!" 하고 부르짖으며 멀리서부터 서럽게 반겼다.  

눈부시게 풍성했던 새하얀 털들도 피부 표면이 붉게 드러날 정도로 한 움큼 빠져 맨홀같은 흔적을 남겼다. 약기운 탓에 네 발 또한 나른하게 움직였다.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서로 핥고 부벼댔건만, 감염 우려로 다가가지 못하니 구찌도 멀찍이서 꼬리만 흔들 뿐이었다.  

모리가 아프다는 것을 구찌 역시 알았는지, 이내 몸을 돌려 사방을 경계했다. 개든 사람이든 먼저 달려가 반기던 녀석에게서 처음 보는 기사도였다. 혹여나 주변 개들이 다가오면 우렁차게 짖어 멀리 쫓아 보냈다.   

유모차의 느린 속도에 맞춰 같이 걷는 내내 주제넘은 생각이 차올랐다. 여전히 1주일에 한 번은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병마와 기나긴 싸움이 될 수도 있다.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치료비를 쉼없이 감당한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는가.

이미 무리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본래대로 상미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끝끝내 파양을 결정한다 한들, 어느 누가 비난의 돌을 함부로 던질 수 있을까! 그러나 모리 어머니의 고운 음성이 오지랖을 멈추게 했다.  

"그래도 이만하니 감사하죠...!"  
"상미만으로도 이미 큰 시련인데 '왜 또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나'란 생각은 들어요. 솔직히 앞이 깜깜해요. 그래도 이미 가족이고 함께 지낸 시간이 있는데, 그 끝이 어딘지 몰라도 같이 가볼 수밖에요."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오롯이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결심도 대단한데, 어떻게 매번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물었다. 그건 상미로 인해 단련된 오랜 습관이라 했다. 상미와의 일상 속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도 보람과 기쁨이 찾아지다 보니, 감사할 순간들이 점차 쌓이게 되었단다.

모리도 처음엔 병원 갈 때마다 잔뜩 예민했었는데, 이젠 아픈 자신을 데리고 가주어 고마워 한다고 했다. 말끝에 흘린 미소 뒤로 남몰래 맺힌 눈물을 훔쳐보고 말았다.

여기, 귀한 사람
 
모리와 많이 닮은 구름.
 모리와 많이 닮은 구름.
ⓒ 모리 보호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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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해질녘, 다시 만난 모리는 활짝 웃으며 힘껏 달려왔다. 깜짝 놀라 영문을 물으니, 안심하기엔 이르나 혈소판도 다소 정상으로 올라오고 덕분에 스테로이드 약까지 줄일 수 있게 되었단다. 추후 경과를 지켜보며 면역약을 계속 복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구찌가 모리에게 배를 보이며 땅바닥에 사정없이 등을 부벼댔다. 모리를 볼 때마다 좋아서 했던 행동이다. 모리는 아장아장 걸으며 다시 산책을 즐겼다. 구찌는 걷다가도 자기 걸음이 빨랐다 싶으면 고개 돌려 모리가 다가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 줬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다시 보폭을 맞췄다.   

헤어질 즈음, 어제 육교 위로 강아지 형태의 구름이 피었다며 상미의 언니가 사진을 보여주었다. 정말 사진 속 흰 구름이 푸른 잔디를 신나게 뛰놀던 모리와 많이 닮아 보였다.  

멀어지는 모리네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지난했던 시간들을 단심으로 묵묵히 버텨온 모리 어머니의 공력에 한없이 고개가 숙여진다. 내일 역시 오늘처럼 성실히 살아내시겠지요. 잠시일지라도 여기, 귀한 사람이 있음을 세상이 기억해 주었으면.

태그:#반려견, #모리, #모리어머니, #모리야건강해, #구찌여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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