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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발굴 현장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2014년부터 진행한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생생한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 느낌 등을 한 주에 한 편씩 전할 계획이다. 잘못된 역사와 진실을 밝히고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진실과 화해의 치유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기자말]
[다시 만날 그날까지⑪] 학살 가담 후 이민... 북한에 남겨진 가족의 예상 밖 생사 (https://omn.kr/26eit)에서 이어집니다. 

2018년 2월 20일, 필자는 또 가방을 챙겼다. 충남 아산시 배방동 설화산 5차 발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발굴한다'는 소식만 들으면 눈에서 빛이 나고 기운이 난다.

아산 설화산 발굴지는 경남 진주에서 가기엔 차편이 좋지 않았다. 천안아산행 버스를 타고 아산 터미널에서 도착한 후 택시를 타고 발굴장에 도착하니 당시 홍수정 공동조사단 실장이 마중을 나와 있다. 발굴지가 산속이라 필자를 안내하기 위해서다. 그는 멀리서 자원봉사 온다며 항상 나를 반겨준다.
 
 흑암 슈퍼 (당시 금방앗간 터 피학살자들이 임시 감금된 곳)
  흑암 슈퍼 (당시 금방앗간 터 피학살자들이 임시 감금된 곳)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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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리마을 입구에 위치한 흑암 슈퍼는 세월을 말해주듯 초라하다. 이곳은 학살사건 당시 피학살자들을 2~3일 감금하였던 '금방앗간' 터인데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그 옆에 걸린 펼침막이 필자를 반긴다.

집 몇 채를 끼고 오르니 오솔길이 나온다. 여기서 1km 이상 올라가는데 2월의 끝자락 날씨가 아주 매섭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눈이 녹아서 흙이 신발에 달라붙는다.
 
공동조사단의 5차 유해 발굴 알리는 펼침막의 안내
 공동조사단의 5차 유해 발굴 알리는 펼침막의 안내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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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산은 '눈이 오면 아름답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아름다운 산속에 학살지가 있다니. 1951년 1월 6일, '한겨울 추위에 떨면서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어린아이들을 업고 손에 손잡고 끌려 올라간 역사적인 길이구나' 생각하다 보니 발굴 현장에 도착하였다.

안경호 당시 공동조사단 국장은 늘 필자에게 발굴 경과와 과정 현황을 설명해 준다. 이날도 마찬가지로 설명을 듣고 발굴 현장 구역을 정해줬다. 5차례 발굴을 하니 그런대로 장소가 익숙해진다.
 
설화산 겨울 전경
 설화산 겨울 전경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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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산으로 어머니들이 하얀 치마저고리 입고 아이를 업고 혹은 손을 잡고 끌려 올라갔던 오솔길
 설화산으로 어머니들이 하얀 치마저고리 입고 아이를 업고 혹은 손을 잡고 끌려 올라갔던 오솔길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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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부역혐의 학살사건이란

아산지역 부역자 혐의 처벌은 1950년 9월 26일과 27일 미군이 천안을 지나던 무렵, 각 읍∙면 치안을 맡았던 치안대(의용경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등)에 의해 시작되었고, 1950년 9월 29일 온양 경찰이 복귀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아산지역의 피학살자 수는 최소 8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산 지역의 일부인 배방읍 중리 설화산의 경우, 1951년 1월 6일 온양경찰서와 향토방위대장이 공모하여 좌익 관련자와 가족, 부역(附逆) 혐의자(온양읍과 아산군 일대 부역자) 등을 금곡초등학교에 감금했다가, 흑암슈퍼(당시 금방앗간)에 2~3일간 감금한 후 저녁 무렵 설화산으로 끌고 가서 총살하고 시신을 폐광에 유기한 사건이다.

당시 설화산 피학살자는 200~300명으로 추정된다. 가족들의 행렬이 '장날 소 떼엮듯이' 새끼줄로 묶인 채 끌려간 후 1시간 정도 있으니까 총소리가 탕탕탕 다다다다 들렸고 학살은 저녁 늦게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과연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날을 되새기며 2018년 2월 20일(40일간) 진행된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옛 지명 성재산) 발굴 현장 상황을 알아보자.
   
타지역 피학살자는 보도연맹원이 많은 반면, 아산 지역은 부역혐의자가 많이 학살되었다. 부역 혐의란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당시 부역혐의자들은 적법한 조사나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학살되었으며, 그 가족들 역시 마을회의, 도민증 발급이라는 연락을 받고 소집되었다가 이유도 모른 채 살해되었다.

그렇다면 가족 중 어린아이들은 국가에 반하는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일에 동조했는지 묻고 싶다. 어떤 이유로 부모와 함께 왜 살해했는지.

필자는 설화산 발굴장에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경남 진주, 대전시, 충남 홍성군과 또 다른 학살의 배경과 학살 과정, 대상이 너무 달라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어느 지역의 학살 행위에 경중이 있겠냐만, 설화산 학살에 참여한 가해자들은 악마 그 자체였다.
  
유해발굴만 40일

그간 공동조사단의 유해 발굴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발굴단이 모두 자원봉사자이기도 하고, 발굴 경비가 시민사회단체 후원금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화산은 유해 발굴을 40일간 실시했다. 아산유족회가 지속적으로 아산시에 유해발굴을 요청하면서 '한국전쟁민간인학살 추모에 관한 조례'를 제정, 예산 1억2천만 원을 지원해서다.

필자는 아산시가 참 고맙고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진주시는 타 지역에 비해 학살지가 많은데도 발굴 비용에 대한 예산조차 편성하지 않고 있다. 주변 봉사자들이 '진주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고 물어올 때마다 진주시민으로서 부끄러워진다. 암튼 발굴 기간이 넉넉해 완전한 발굴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발굴 시작도 하기 전 큰 난관이 발생했다. 배방읍 중리마을 사람들이 발굴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피학살자들이 부역혐의자들이기에 당연히 죽어 마땅하고, 그들의 저주받는 뼈들이 중리마을로 지나가는 것을 허락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아, 아직도 어르신들의 사고 속에선 그들이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당시는 그런 생각을 해야만 살 수 있었기에 그랬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세월이 60년이 흘렀는데 상황은 전혀 변하거나 바뀌지 않았다.

박선주 유해발굴단장과 김장호 전 아산유족회 회장, 아산시청 행정과 직원 등이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피학살자들의 원한도 풀어주고, 고이 모시면 동네도 좋아지고 서로가 좋은 일이라 설득하여 겨우 허락받았다고 한다.
 
필자 발굴 모습과 전체 유해 발굴 현장 모습
 필자 발굴 모습과 전체 유해 발굴 현장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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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현장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발을 디딜 곳도, 손을 짚을 곳도 없을 정도로 유해가 뒤엉켜서 서로 나오겠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유해가 이렇게 많이 쏟아진 적이 드물었다. 한편으론 유해가 많이 나오면 시굴이 정확했고, 매장지를 확실하게 찾았다는 뜻이다.

이유는 매장지를 증언과 생존자 또는 주민들의 증언을 근거로 찾아도 실패로 끝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해가 많이 나오면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론 많은 생명이 학살되었다는 것에 가슴이 아팠다.

이런저런 사연이 많았지만, 발굴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특히 아산시 행정과에서 지원하니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설화산 발굴 현장 모습
 설화산 발굴 현장 모습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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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자만의 희열

발굴하면서 가장 짜릿하고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유해, 유품이 쏟아져 나올 때이다. 아마 발굴하지 않고서는 경험하기 힘든 상황이다. 유해가 첩첩이 쌓여서 노출되면 전신에 전율이 흐르면서 발굴에 매료된다. 그래서 휴식 시간이 되어도 손땔 수 없어서 푹 빠지게 된다.

안경호 국장이 소리를 치면서 쉬는 시간이라고 나오라고 한다. 다른 발굴단에게 피해 줄까 봐 어쩔 수 없이 허리를 펴고 나왔다. 발굴작업은 중노동이기에 잠깐의 휴식이 중요하다.

필자는 40일 연속으로 하지 못하니 봉사하는 동안은 혼신의 힘을 쏟고 싶었다. 사실 설화산 발굴에 하루 더 시간을 쏟았다. 현장이 심상치 않아 발길을 돌리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이제 발굴장을 감싸고 선 밤나무 한 그루 사연을 소개해 보자.

보았노라, 들었노라, 느꼈노라
 
설화산 유해 발굴장에 늠름하게 서 있는 한 그루 밤나무의 사연
 설화산 유해 발굴장에 늠름하게 서 있는 한 그루 밤나무의 사연
ⓒ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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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그림 밤나무가 처음에 본 모습이다. 발굴이 계속 진행되면서 밤나무 뿌리 속까지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밤나무 뿌리 사이 사이로 유해가 줄줄이 달려 나온다. 밤나무 뿌리가 유해를 감싸 안고 있었고, 밤나무 또한 유해들의 피와 살의 양분을 빨아먹고 60년간 서로 공생하면서 자라고 있었다.

유해를 잔뜩 품고 있기에 우리는 밤나무 뿌리를 베어내기로 했다. 어찌나 뿌리가 튼튼한지 톱질과 도끼로 찍어서 파내는 고난도의 발굴 작업이었다. 그날 '보았노라, 들었노라, 느꼈노라'라며 어두운 침묵으로 묵묵히 서 있던 산증인인 밤나무가 영원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4차 발굴까지는 보도연맹원, 형무소재소자로 거의 남자 피학살자였기에 유해와 유품도 거의 남자 것만 노출되었다. 그런데 설화산 유해 발굴지는 충격적이었다. 학살된 여성과 어린아이들의 유해가 너무 많이 쏟아진 것이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말문이 턱 막혔다. 여성과 아이들 유해와 유품을 보고 박선주 단장을 비롯해 발굴단원 모두 눈물바다가 되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두꺼운 옷이나 포대기 속에 싸여있는 어린아이의 갈비뼈가 노출되었을 때다. 큰 돌에 눌러져 형태를 잃어버린 어른들의 머리뼈를 수습하기도 하였다. 부서진 발뼈의 경우는 일부 신발 속에 남아 있었다.

도대체 여성들과 아이들이 무슨 이념이 있고, 무슨 죄가 있기에 잔혹하게 학살했을까, 도저히 인간의 탈을 쓰고 행할 수 있는 일인가, 어린아이들을 학살할 때 가해자들은 어떤 심정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가해자는 괴물이었을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생 행위를 저질렀을까.

야비한 학살 과정

아산 지역에서는 1950년 9월 말경, 부역혐의자들의 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51년 1.4후퇴 전후로 부역혐의자 가족들을 학살하기에 이른다. 설화산 피학살자 208구 중 남자 23구이다. 남자들은 온양경찰서로 잡혀갔다. 그리곤 며칠 동안 구금시켰다가 집으로 보낸다.

속리산 구경시켜 줄 테니 집에 가서 먹을 것을 준비해 오라고 했단다. 그길로 집에 가서 도시락까지 싸 들고 다시 경찰서로 갔는데, 그곳에서 자신들이 설화산 학살지로 끌려갈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설화산 수직 금광(가로 3m 세로 6.5m)에는 시신이 바닥층부터 차곡차곡 포개져 5층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각 층 사이에는 마사토와 진흙 및 잡석과 짚으로 채워져 있었다. 바닥층과 4층에서 불에 그을린 뼈들이 일부 확인되기도 했다.

13화 설화산 편이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전쟁 창원유족회 유해발굴 조사단장입니다.


태그:#설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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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진주에서 거주하고 있다. 전직으로 역사교사였으며, 명퇴후 한국전쟁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10여간 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해발굴 봉사로 인하여 단디뉴스 연재 18회를 기사화했으며 고등학교, 일반인, 초중고 교사 대상 유해발굴 관련 연수도 진행중이며 9월부로 오마이뉴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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