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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가 갑자기 작업 일정을 연기해서 혹시 몸이라도 안 좋으신가 걱정했다. 안과에 통원치료차 다녀왔단다. 내가 걱정할까봐 라인(스마트폰 통신앱)으로 몇 번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었단다. 이곳에서는 데이터를 쓰면 요금폭탄이라 꺼놓고 살기 때문에 라인을 못 본다. 때로 일반문자 주고받기 조차 안 될 때도 있다. 이곳 통신환경은 석기시대다. 

오늘 작업은 구루메(久留米)란다. 이틀을 쉬어서인지 몸이 가뿐하다. 평생을 정원 일로 단련된 사부도 힘이 드는 마당에 젊지 않은 초짜가 힘든 건 당연하겠지. 차가 출발하고 금방 뭔가 잊었다며 핸들을 집으로 돌린다.

같은 모양 도구함이 2개라 하나를 두고 오면 잊는 게 많다. 나도 전지가위를 못 챙겼다. 정원사가 연장도 없이 어쩌자는 거야. 큰일날 뻔 했다. 사부에게 크게 꾸중들을 일인데도 모른 체 한다. 이걸 깨닫게 하기위해 본인이 뭘 잊었다고 핑계대고 돌아온 건가. 인자하기도 하셔라. 

집안을 지켜 준 존재에 대한 감사 의식
 
흑송은 한 눈에 웃자람이 느껴질 정도로 새순이 비대하다
 흑송은 한 눈에 웃자람이 느껴질 정도로 새순이 비대하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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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작업장소는 주택가 아담한 양옥집이다. 정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주차공간이 있다. 가운데 통로와 사이에는 흑송이 버티고 서 있다. 흑송은 한눈에 웃자람이 느껴질 정도로 새순이 비대하다.

커지면 커진 만큼 정원사는 힘들다. 왼쪽으로 흑송을 비켜선 아랫쪽에는 챠보히바(편백류)가 거대한 달덩이로 떠 있다. 정문에서 보면 좌히바 우흑송 쯤 되겠다. 흑송의 자연미와 히바 인공미의 절묘한 균형이 눈길을 끈다. 

히바류는 편백나무로 만든 원예 품종의 총칭이다. 챠보히바는 일본 정원의 대표적 상록수인데 성장이 느리다. 1미터 크는데 5년이 넘게 걸리는 느림보 수종으로 알려져 있다. 성장이 느리다는 건 그만큼 손질하는데 세심해야 된다는 얘기다. 성장이 빠른 나무라면 약간 실수를 해도 금방 새순이 자라서 감춰주지만 이건 실수하면 그걸로 끝이다. 

오늘 일거리가 너무 간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부가 뒷쪽으로 가면서 손짓한다. 후원에 다른 일거리가 또 있다. 적송 두 그루 제거 작업이다. 하나는 완전히 고사했고 다른 하나는 가지가 많이 잘려지고 상태가 안 좋다. 오늘 두 그루 모두 제거해야 한단다. 간단한 게 아니었군.

죽은 나무는 그냥 제거해도 되지만 살아있는 나무는 고별 의식을 치러야 한단다. 한 집안에서 지금까지 삶을 함께 해온 생명에 대한 예의란다. 정원주가 준비해 둔 술과 쌀, 소금을 유리컵에 가져왔다.

간소하지만 정원주와 작업자가 함께 치러야 하는 의식이다. 세 종류의 컵을 소나무 앞에 차렸다. 사부가 고개를 숙이고 박수를 두 번 치더니 다시 고개를 깊이 숙인다. 나도 눈치껏 따라 했다. 
 
한 집안에서 지금까지 삶을 함께 해온 생명에 대한 예의다
 한 집안에서 지금까지 삶을 함께 해온 생명에 대한 예의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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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뒤란에 우뚝 서서 집안을 지켜 준 존재에 대한 감사다. 상태가 안 좋아져서 제거하게 된 일에 대한 정원주의 사죄도 포함돼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생명존중 의식인 거다.

'북극곰이 죽어가고 있어요'라는 포스터로 남아 있는 공허한 자연환경 보호 캠페인이 이곳에서는 생활속에서 리얼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가 미신이라 치부해버린 일이다. 의식을 치르고 나니 작업장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살아있는 것들이 겪는 마지막 절차. 나무라고 다르랴. 오랫동안 손질해 온 나무를 보내는 사부 감회가 남 다를 것 같다. 사부는 정원 손질 작업도 나무와 대화를 하는 거라 했다. 이곳을 자르는 건 저쪽으로 자라라는 뜻이야. 그걸 용케 알아차리고 잘 자라서 정원에서 제 역할 하는 나무가 되는 거라던 사부. 표정이 어두운 걸 보니 왠지 짠하다. 

나도 안다. 어떤 정원의 소나무는 묵은 잎이 빽빽해서 숨막힐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훌훌 정리하고 나면 내 속이 다 개운해 졌다. 떠나올 때면 소나무가 가지를 흔들며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도 사부처럼 시나브로 나무들과 교감이 됐었다. 정든 나무를 떠나 보내는 일도 정원사의 숙명이다. 

사부는 연장사용 요령만 알려주고 흑송 손질하러 자리를 뜬다. 오늘 일은 시간내 못 마칠지도 몰라. 내일 와서 또 하면 되니까 너무 서둘지 말고 천천히 해. 바리캉은 손가락만 없어지지만 체인톱은 잘못하면 손목이 날아가. 보험금은 나오겠지만 많이 아프니까 조심해야 돼. 손가락이 잘리고 손목이 날아간다는 처참한 표현도 사부는 태연하다.  

60년 경력이 거저 된 게 아니다
 
정든 나무를 떠나 보내는 일도 정원사의 숙명이다
 정든 나무를 떠나 보내는 일도 정원사의 숙명이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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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무를 캐내는 것은 특별한 요령이 있다. 먼저 스쿠푸(삽과 비슷한 도구)로 뿌리 주변을 둥그렇게 파낸다. 잔뿌리는 삽으로 툭툭 자르면 되지만 굵은 뿌리는 전용도구를 이용해야 한다. 쇠막대 끝에 날카로운 대패날 같은 걸 달았다. 그걸로 뿌리를 자르고 나서 넘어뜨릴 쪽을 더 깊게 파면 끝이다. 나무는 그쪽으로 쓰러지게 돼 있다.

더운 날 삽질로 땀이 범벅이다. 가끔 지나가는 소나기가 반가울 정도다. 사부가 비옷을 입으란다.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입어. 이런 날 비옷도 없이 일하는 걸 누가 본다면 우리를 얼마나 준비성 없는 사람들로 보겠어? 사람은 항상 보이는 게 중요해.

사부는 지혜롭다. 일하다가 내가 힘들만 하면 데리고 주변 가게로 간다. 맘에 드는 음료수 하나 고르란다. 물론 준비해 온 생수가 있긴 하지만 단 걸 먹어야 힘이 덜 든단다. 내가 일하다가 열 받아서 심통이 나면 오늘 일정에 좋을 게 없다는 걸 아시는 거다. 60년 경력이 거저 된 게 아니다. 노련하게 일 시킬 줄 안다.

점심은 대개 열한시 쯤 먹는다 식당도 덜 붐비려니와 힘쓰는 일이라 그때 쯤이 출출해질 때다. 지난번 우동집에서 다음에는 밥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주변 밥집 야요이켄을 찾아 데려간다. 정식 메뉴가 다양하고 가격도 저렴하다. 밥이 맛있는 데다 흔치않게 덤까지 자유로운 곳이다. 

자판기에서 메뉴를 골라 식권을 뽑아야 하는데 나를 시킨다. 노인이라 키오스크는 익숙치 않은 거다. 우동집은 대개 입으로 주문하고 현금을 직접낸다. 번거롭지 않다. 사부가 매일 우동만 고집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 내가 고등어 구이를 뽑았더니 자기도 같은 걸 뽑으란다. 하긴 사부도 이제 우동이 물릴 때가 된 거다. 나는 밥을 한 공기 더 추가해서 오랫만에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히바는 깊이 자르면 싹이 안 나오니 주의하면서 얕게 자르는게 요령이다
 히바는 깊이 자르면 싹이 안 나오니 주의하면서 얕게 자르는게 요령이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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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일은 히바 달덩이 만들기다. 같은 달덩이 형태라도 이건 크기가 엄청나다. 케다츠(현장용어다, 보통 사다리는 '하시고'다)를 세워놓으니 위에 올라가 시범을 보이신다. 히바는 깊이 자르면 싹이 안 나오니 주의하면서 얕게 자르는 게 요령이야. 시범을 보이면서 한 곳이 살짝 깊이 들어갔다. 이건 니가 고쳐 봐. 아침부터 고별의식 땜에 피곤해 보이더니 사부도 실수를 한다. 

전동 바리캉으로 둥근나무를 자르려면 전체 형태에 대한 감각이 필요하다. 어디를 자르고 있건 전체 형태를 머릿속에 그리며 잘라 나가야 실패하지 않는다. 너무 깊이 들어가서 원줄기가 보이면 보기도 싫거니와 고치려면 다른 곳을 같은 깊이로 잘라야하니 일거리가 커진다. 히바는 철쭉처럼 흔들고 털지 않는다. 조심조심 한번에 끝내야 한다. 

내 일이 먼저 끝났다. 당연하다. 바리캉은 좌르륵 지나가면 끝나지만 흑송은 새순 하나하나 손질해야 한다. 게다가 주인이 비료를 주는 바람에 웃자라서 손질이 힘든 대상이다. 도와드릴까요? 대답이 없다. 고별의식 뒤끝이 길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내일 다시 와야 될 걸요. 알았어. 해 봐. 오늘 못 끝낼 것 같다는 일을 시간 안에 끝내 버렸다. 요즘 초짜가 밥값을 제대로 하고 있다.

사부와 벌인 소나무 수형 논쟁
 
오늘 못 끝낼것 같다는 일을 시간 안에 끝내 버렸다
 오늘 못 끝낼것 같다는 일을 시간 안에 끝내 버렸다
ⓒ 유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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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다 끝나고 사부와 소나무 수형 논쟁이 벌어졌다. 흑송 가지 하나가 겹치는 바람에 그 아래 히바나무의 매끈한 자태를 가리고 있다. 내 눈에는 분명 잘라야 하는 가지다. 저거 잘라야 해요. 겹쳤잖아요. 내년에 자르자. 잘라야 한다는 건 사부도 인정하는 거다. 내가 밤에 살짝 와서 잘라 버려야지. 똑같은 가지를 잘라도 니가 하면 주인이 불평해. 내가 해야 깔끔하게 잘 잘랐다 하지. 그게 초짜와 프로의 차이야.

요즘은 일을 시켜놓으면 그걸로 끝이다. 하루종일 묵묵히 자기가 맡은 흑송 손질을 할 뿐 내 일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일 끝나고 돌아와서 도구 정리하는 것도 많이 익숙해졌다. 어디에 뭘 둬야 하는지 정해진 자리에 척척 둔다. 한번 가르쳐 주면 알아서 잘하니 흡족해하신다. 항상 너는 머리가 좋다는 칭찬과 함께.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고요. 남들보다 더 많이 신경쓰고 밤 잠 줄여가며 더 많이 공부하는 거지. 

사부가 잠깐 와 보라며 어딘가 데려간다. 길 건너편에 시에서 운영하는 동백나무 전시관이 있다. 이웃집에서 내 집에 이상한 놈이 왔다 갔다 하는 걸로 보면 안 되니까. 인사해 둬야지. 이곳에 온 지 몇 달이 지났는데 새삼스럽게 웬 소개? 제자 자랑이 하고 싶으신 건가?

덧붙이는 글 | 내 블로그 일본정원 이야기(https://blog.naver.com/lazybee1)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일본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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