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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해설사 경험을 바탕으로 이곳에 묻힌 다양한 인물들의 생애와 사연을 소개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생각해야 할 점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100만 평 규모로 조성된 대전현충원 전경
 100만 평 규모로 조성된 대전현충원 전경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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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은 1979년 4월 1일 착공해 6년여 만인 1985년 11월 13일 준공했습니다. 준공에 앞서 1982년 8월 27일 사병 안장을 시작으로, 준공하던 해인 1985년 2월 28일 장교 및 경찰관을 안장했습니다. 준공 이후엔 1986년 11월 7일 장관급 장교 안장, 1987년 4월 6일 애국지사 안장, 1989년 10월 23일 국가사회공헌자 안장을 시작하며 안장 대상자를 확대해 갔습니다.

대전현충원에 총 몇 명이 잠들어 있는지 아시나요? 2023년 9월 2일 기준으로 총 9만 9613명이 안장돼 있고, 4만 0591위가 위패로 봉안돼 있습니다. 묘지 만장, 즉 묘지 자리가 다 차는 시점을 앞둔 2021년 5월 4일엔 충혼당을 개관해 묘역 매장 대신 화장 후 유골을 충혼당에 안치하기 시작했습니다. 2023년 9월 2일 현재 충혼당에는 3310명이 봉안돼 있습니다.

약 100만 평(330만 9553㎡)에 걸쳐 조성된 대전현충원을 둘러보면 우선 그 규모에 놀라는데요. 10만 기에 달하는 묘역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저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80평, 국가유공자는 8평... 묘역마다 묘소 면적 달라

우선 묘역에 따라 묘소 면적에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규모가 큰 묘소는 국가원수묘역(9월 22일부로 '대통령 묘역'으로 변경 예정)입니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약칭 국립묘지법)에서는 대통령의 직에 있었던 사람의 묘의 면적을 264㎡(80평) 이내로 두고 있습니다(제12조 1항). 대전현충원은 80평 규모로 8기를 안장할 수 있는 국가원수묘역을 2004년 9월 조성했는데요, 2006년 10월 최규하 대통령이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된 이후 추가로 안장된 국가원수는 없습니다.

대통령의 직에 있었던 사람 외에는 3.3㎡(1평)입니다. 다만, 국립묘지법에 따라 국회의장⸱대법원장 또는 헌법재판소장의 직에 있었던 사람이나 국가나 사회에 현저하게 공헌한 사람 중에서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묘의 면적을 따로 정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묘의 면적은 26.4㎡(8평)를 넘을 수 없습니다.

국립묘지법 제정에 앞서 시행된 국립묘지령은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장관급 장교 및 이와 동등 이상의 대우를 받는 자의 묘를 26.4㎡(8평)로 규정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1기당 8평 규모로 조성된 묘역은 장군묘역과 사회공헌자묘역, 독립유공자묘역입니다.
     
독립유공자 5묘역을 조성 후, 국립묘지 밖에 안장돼 있던 독립유공자들이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면서 2014년 7월 4일부터는 독립유공자들도 1평 안장이 시작됐습니다. 독립유공자 이장 전용 묘역으로 독립유공자 7묘역이 추가로 조성됐죠. 7묘역도 이장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안장 여분이 이제는 100여기 정도 밖에 안 남은 상태입니다.

독립유공자 6묘역은 8평 안장이 가능한 묘역입니다. 생존해 있는 독립유공자들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특별히 조성된 공간이죠. 현재는 47기가 조성돼 있고, 7기 정도 조성할 공간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생존 애국지사는 국내외를 합쳐 10여 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8평 안장이 가능한 사회공헌자 묘역도 안장할 수 있는 묘가 서너 기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장군 묘역은 제2묘역이 2020년 10월 27일 다 차서 그 후부터는 장군들도 사병과 똑같이 1평으로 안장되고 있습니다.
 
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된 최규하 대통령의 묘역 및 묘비 사진. 가운데 봉문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묘비가, 왼쪽으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대가 위치해 있다.
 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된 최규하 대통령의 묘역 및 묘비 사진. 가운데 봉문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묘비가, 왼쪽으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대가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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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서 최초로 1평 묘역에 안장된 최홍선 장군(공준 준장)의 묘(제7묘역 708-70212). 그 옆으로 육군 일병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대전현충원에서 최초로 1평 묘역에 안장된 최홍선 장군(공준 준장)의 묘(제7묘역 708-70212). 그 옆으로 육군 일병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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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뿐만 아니라 비석 등 부속구조물에도 자세히 보면 차이를 뒀습니다. 80평의 국가원수 묘는 원형의 봉분에, 묘 두름돌을 돌릴 수 있습니다. 묘비뿐 아니라 상석과 향로대, 별도의 추모비도 세울 수 있죠. 최규하 대통령의 묘비의 높이는 2.7m입니다.

8평 규모의 묘는 비석의 높이만 91㎝이고, 좌대까지 포함하면 186㎝에 이릅니다. 받침대의 길이는 106㎝입니다. 1평 규모의 묘역에 묘비는 76㎝의 비석 아래 15㎝ 높이로, 55㎝ × 72㎝ 크기로 상석을 받칩니다.

국가원수묘 묘비는 앞면에 '제○대 대통령 ○○○의 묘'라 적고, 뒷면에는 묘비 번호 없이 안장자의 출생일·출생지, 사망일·사망지 및 사망구분을 새깁니다. 왼쪽에는 안장자의 가족사항을 새기며, 오른쪽에는 안장자의 주요 공적 및 경력을 새깁니다. 묘비 상부에는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무늬를 화강석으로 조각합니다.

나머지 묘역의 비석 앞면에는 안장자의 신분(계급)과 성명을 새기고, 배우자의 성명을 안장자의 비문 왼쪽에 '배위 ○○○' 또는 '부군 ○○○'라고 새깁니다. '배위(配位)'는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이고, '부군(夫君)'은 남편을 높여 이르는 말입니다. 뒷면에는 묘지번호, 안장자의 출생일·출생지, 사망일·사망지 및 사망원인을 새기고, 배우자의 성명을 안장자의 비문 왼쪽에 한 줄로 배우자의 출생일 및 사망일을 새깁니다.

조문기는 '애국지사'인데 김용원은 '순국선열'인 이유

8평 규모 묘역의 묘비 대좌대 앞면에는 추모의 글을 새기고, 뒷면에는 안장자의 공적사항과 수훈내용 및 가족사항을 새깁니다. 1평 규모 묘역의 묘비에서는 왼쪽 옆면에 안장자의 가족사항을 새기고, 오른쪽 옆면에는 안장자의 공적사항을 새깁니다.

8평 규모의 묘역의 묘비 아래 대좌대 앞면에 새기는 추모의 글은 고인의 말이나, 후손들의 글 또는 책에서 인용한 문구 등 자유롭게 적을 수 있습니다. 비석 전면에 새기는 안장자의 신분(계급)과 성명 글씨체(서체)는 통상 유족 의견을 따라 선택됩니다.

2021년 8월 카자흐스탄에서 국내로 송환돼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독립유공자 제3묘역 917)의 묘비에 쓰인 글씨체는 신영복 선생의 글씨체인 일명 '어깨동무체'입니다. 생존 유족이 없었던 홍범도 장군의 경우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요청에 따라 해당 서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일어난 최후의 의열투쟁으로 불리는 '부민관 폭탄의거'의 주역 중 한 명인 조문기(독립유공자 제3묘역 705) 선생의 묘비를 한번 볼까요? 앞면에 새겨진 글은 신영복 선생이 직접 쓴 글씨입니다. 비석 앞면의 '애국지사 조문기의 묘' '배위 장영심'이란 글씨뿐 아니라, 대좌대 앞면에 다음과 같이 조문기 선생의 어록을 새겨넣었습니다. 이것 역시 신영복 선생이 직접 썼습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독립유공자 제3묘역 705에 안장된 조문기 애국지사의 묘비 앞면의 글씨는 신영복 선생이 직접 쓴 글씨다.
 독립유공자 제3묘역 705에 안장된 조문기 애국지사의 묘비 앞면의 글씨는 신영복 선생이 직접 쓴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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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된 이들의 비석에서 이름 위에는 '애국지사' 또는 '순국선열'이라고 적혀 있는데요, 이들 모두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입니다.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차이점도 있습니다. 1945년 8월 14일 이전에 순국한 경우는 '순국선열',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애국지사'로 구분합니다. 1945년 8월 14일 이전에 사망했다 하더라도 노환이나 다른 사유로 사망한 경우에는 '애국지사'로 구분되는 거죠.

조문기 지사는 1945년 7월 24일 발생한 부민관 폭파 사건을 이유로 1982년 건국포장에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조문기 지사는 2008년 2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 '애국지사'를 붙입니다. 곽낙원 지사(독립유공자 제2묘역 771)는 광복 이전인 1939년 4월 29일 사망했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순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애국지사'로 부릅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경무국장을 역임했던 김용원 선생(독립유공자 제1-1묘역 525)은 1927년 1월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2월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병보석을 받고 출옥했으나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해 그해 6월 사망해서 '순국선열'로 부릅니다.

대전현충원에는 10만 기에 가까운 묘가 조성돼 있다 보니 묘들이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처럼 차이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묘비에 적힌 글귀나 이력에서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볼 수도 있죠. 어쩌면 대전현충원은 10만 명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거대한 인물사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를 연재하는 김선재·임재근·정성일 시민기자는 대전현충원 평화둘레길 행사 등의 해설사를 맡아 활동해오고 있습니다. 2022년부터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가 있는 대전현충원 평화둘레길 해설사 양성과정'을 진행하면서 해설사를 확대해오고 있습니다.
 
한 시민이 곽낙원 애국지사의 묘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곽낙원 지사는 광복 이전인 1939년 4월 29일 사망했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순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애국지사’로 부른다.
 한 시민이 곽낙원 애국지사의 묘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곽낙원 지사는 광복 이전인 1939년 4월 29일 사망했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순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애국지사’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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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원 선생은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해 출옥 4개월 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옥사로 인정되어 순국선열로 불린다. 김용원 선생의 비석 앞면에 ‘순국선열’이, 뒷면에는 ‘1934년 6월 14일 대전 순국’이라고 적혀 있다.
 김용원 선생은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해 출옥 4개월 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옥사로 인정되어 순국선열로 불린다. 김용원 선생의 비석 앞면에 ‘순국선열’이, 뒷면에는 ‘1934년 6월 14일 대전 순국’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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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대전현충원, #묘비,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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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북한학 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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