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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  [기자말]
자고 가라는 친구의 권유를 일단 거절했다. 너무 민폐다. 고등학교 친구 상미(가명)는 내게 마드리드에서 자기 집에 머물 것을 권했다. 상미는 프랑스 남자와 결혼해서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 살고 있다. 무려 아들 셋을 키우며 맞벌이 중이다.

내가 머물러야 하는 일정은 심지어 월요일 밤부터 금요일 아침까지였다. 이건 뭐 거의 테러 아닌가. 사람 좋은 제안에 숙소비 아낄 마음으로 생각 없이 응했다간 우정이 끝장날 수도 있다. 아니야 상미야, 숙소를 따로 잡을게. 대신 두어 번 만나서 수다나 떨자고.

'자고 가라'는 고교 동기의 제안  

상미는 꽤나 강경했다. 미안할 게 뭐냐는 것이다(난 그렇게 재워줄 자신 없는데...). 그래 너는 괜찮다 치자. 렉스(상미 남편, 가명)와 아이들은 안 불편하겠어? 상미는 간결했다.

"모두 반기지, 오히려 거절하는 네가 이해가 안 간다는데?"
"그래? 그 정도야? 그럼...... 아니야 그래도 좀."
"야, 그냥 와서 자."
"그래 알았다."
 

실은 나도 맘 붙일 데가 필요했다. 우주도 삼형제와 놀게 해주고 싶었다. 결국 못 이긴 척 제안을 덥썩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과연 우린 웃으며 헤어질 수 있을까.
   
도시에 물을 운반하기 위한 다리로 로마시대에 지어졌다고 한다.
▲ 마드리드 근교 세고비아의 수도교 도시에 물을 운반하기 위한 다리로 로마시대에 지어졌다고 한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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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 결국은 일종의 소비 행위다. 관광지와 교통편, 숙소의 스케줄을 계획하고 구매하고 실행하는 일이다. 그러다보면 여행자들은 볼 수 있는 것들만 보게 된다. 현지 사람들이 살아가며 느끼는 것들이 궁금했지만, 들여다 볼 기회가 없다. 상미 집에서의 며칠은 나와 우주에게 여행의 새 단계를 열어주는 기간이었다. 마드리드 현지에서 발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 가족과 동행하는 경험이었다.

상미와 렉스는 중학생이 된 큰 아들의 방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방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축구 스타들의 사진이 잔뜩 붙어 있었다. 우리가 'FC바르셀로나 홈구장에 다녀왔는데 되게 좋더라'고 말하니, 첫째는 우릴 반기는 와중에도 '거기보다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더 좋다'며 라이벌팀에 대한 적대감을 확실히 표현했다. 마드리드에 있는 동안은, 우주에게 FC 바르셀로나 홈구장에서 사온 옷은 안 입히기로 했다.

아이 하나를 키우면서도 난 쩔쩔 맸는데, 둘이나 셋 키우는 집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내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이어질 네 번의 아침은 그 체험판이었다.
  
프랑스 대가족 풍경, 폭풍처럼 보였다  

상미와 렉스의 첫째 온(가명)은 중학생, 둘째 조(가명)는 5학년, 셋째 린(가명)은 유치원 생이다. 객식구 둘까지 포함해서 깨워서 씻기고 아침을 먹이고 나가기까지, 무슨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일이 일어났다. 투정, 장난, 갈등, 훈육, 칭찬, 독려, 눈물바람, 웃음바람....... 사람이 많으니 이렇게 감정의 관계도가 많구나. 숱한 감정들이 짧게 짧게 오가다가 우루루 각자 집을 나섰다. 나는 숨을 죽이며 뭔가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해보고 싶었지만 신통치 않았다.

렉스를 처음 알게 됐던 건 둘이 한국에서 연애를 할 때였다. 난 어릴 때 잠시 프랑스에서 체류한 적이 있어서 프랑스 사람을 반가워 한다. 렉스는 마침 나와 동갑이라 어릴 때 봤던 TV프로그램이나 만화 주제가 같은 것을 공유하는 기쁨이 있었다. 워낙 오래된 기억이고 지금까지 연락이 닿는 현지 친구가 없어, 난 다 잊어버린 서툰 불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렉스랑 어릴 때 기억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다만 달랐던 건 난 파리에서 살았기에 파리를 그리워하는데, 렉스는 프랑스 남부 툴루즈 출신이라 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서울 깍쟁이들' 같은 느낌인 걸까? 상미와 렉스가 프랑스를 떠나 스페인에 거주하게 된 것도, 또 바르셀로나보다는 마드리드를 선호하는 것도 그런 취향에 따른 결과일지도 몰랐다.

둘은 결혼 후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신혼을 보냈는데, 난 그 때도 이들 집에서 며칠 신세진 적이 있었다. 첫째 온이가 아기고 둘째 조가 뱃 속에 있을 때다. 상미는 한국어에 굶주렸던 듯 내게 많은 대화를 쏟아냈다. 당시 렉스는 갑작스레 외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하는 상미가 우울해한다며 걱정했다. 그때만 해도 싱글이었던 난 상미의 고군분투를 거죽이나마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당시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렉스는 임신 후기였던 상미를 대신해 나를 기차역에 내려줬다. 그 순간 나는 휴대폰을 렉스 집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렉스는 걱정 말라며 소포로 보내주겠다고 말했으나,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당장 온갖 연락을 도맡는 조연출 일을 해야할 상황이었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는 우리 근처에 택시가 한 대 멈춰섰다. 두고간 휴대폰을 들고 상미가 쫓아왔던 것이다. 내가 덤벙대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어릴 때나 별로 다른 게 없다.
 
"우주야 이렇게 뛰면서 찍으면 신기한 사진이 나와."... "아빠 뭐하시는 거에요 창피하게"
▲ 디즈니 "백설공주" 성의 모델이라는 세고비아 알카사르 앞에서 "우주야 이렇게 뛰면서 찍으면 신기한 사진이 나와."... "아빠 뭐하시는 거에요 창피하게"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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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네 부부는 둘 다 재택 근무 중이라 그나마 약간의 여유가 있어보였다. 상미는 이번에도 굶주렸던 한국어 대화를 길게 할 것을 기대했으나, 나는 나대로 친구 집에 오래 있는 게 미안해 촘촘히 일정을 잡고 돌아다녔다. 우주와 난 시내와 왕궁도 구경하고, 톨레도와 세고비아 당일투어도 다녀왔다.

그러니 한국어 대화는 각자 잠자리에 들기 전 1시간 여 압축적으로 이루어졌다. 마드리드에서의 고군분투, 현재 회사에서 자리잡은 과정, 살면서 느꼈던 무신경하거나 은근했던 인종차별, 사람들과 부대끼며 속상했던 이야기, 성취에 대한 자부심,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한국 엄마들에 비해 너무 자식들에게 못해주는 것 같은 불안함...

난 막내를 위한 한국어 교재를 상미에게 주었고, 상미는 남편의 허리를 위해 한국에서 공수해온 귀한 파스들을 여행자인 내게 한아름 선물해주었다. 여행 온 주제에 현지인에게서 한국 물품을 강탈할 수 없다고 생각해 한 두 장만 받을 생각이었으나, 일단 허리에 파스를 붙이고 나니 살 거 같아 염치 불구하고 주는 대로 받았다.
    
형제가 없는 우주는 삼형제와 어울리는 일이 신기하고 즐거운 모양이었다. 다만 형들의 호의어린 농담이나 장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러워했다. 온이가 집 안 칠판에 장난으로 '우주 바보'라고 쓰니 갑자기 울먹울먹하며 '내가 왜 바보에요?' 하고 내게 되물어 온이가 당황하기도 했다(왜긴, 너랑 놀아주려고 그런 거지...).

우주는 외동이다보니 늘 다른 친구들과의 어울림에 신경을 쓰게 된다. 형제들끼리 몸싸움하며 키득거리고 노는 것도 부러웠다. 우주는 급격한 애정을 갖게 된 FC바르셀로나의 위대함을 자꾸 강변하며 대화에 참여했지만, 온이는 레알 마드리드가 최고라며 그 부분만큼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 아이들은 아빠와 엄마 덕에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데, 스페인에서 8년째 살고 있으니 스페인어도 잘 했다. 또 나는 렉스랑 대화하려니 영어를 섞어 쓰는 게 서로 편했다. 그러다 보니 4개 국어가 뒤섞였다. 같이 카드게임을 하는데 아이들의 전략 전술이 스페인어-프랑스어-한국어로 휙휙 테이블을 날아다녔다. 여기가 바벨탑인가. 여행 온다며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인강을 듣다 온 우주에게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집이었다.

내게도 신기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렉스와 상미가 큰 솥에 스튜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줄 때, 첫째 온이는 'Je n'aime pas légume!'(나 채소 싫어!) 하고 외쳤다. 그 순간, 수십년 세월이 압축되며 프랑스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친구들이 외치던 문장이 생각났다.

맞아. 저 문장이었어! 그때 그 채소는 맛이 없어서 애들이 싫어했었지, 저 문장 참 자주 얘기했었다. 그래도 채소를 먹어야 한다고 온이를 어르던 렉스는 갑자기 웃는 나를 이상하게 보다가는, 자초지종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드리드 축구팀 '직관', 하지만 더 좋았던 건 
 
그 와중에 자기만의 여행 영상에 필요하다며 우주는 동영상을 찍었다.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 "레알 마드리드 대 옐체"의 경기 그 와중에 자기만의 여행 영상에 필요하다며 우주는 동영상을 찍었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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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류 기간 동안 마침 스페인 축구 리그 경기가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 대 옐체'의 경기였다. 상미 가족에게 감사할 겸 티켓을 구매했다. 이 가족도 첫째를 제외하고는 축구에 별 관심이 없어서 첫 라리가 관람이었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FC바르셀로나에 취했던 우주는 아무 위화감 없이 레알 마드리드 응원에 영혼을 바쳤다. 하도 레알, 레알, 소리를 질러서 같이 응원하던 앞 자리 사람들이 흘끔흘끔 돌아볼 정도였다.

경기는 4:0. 아센시오 첫 골, 벤제마 두 골, 모드리치 마지막 골까지, 유명 선수들이 골을 몰아넣는 축제같은 경기였다. 특히 아센시오 팬인 첫째 온이는 그것 보라며 득의양양해했다. 다만 관중석 한 칸만을 채우고 초반에 응원을 보내다 침묵에 빠져버린 옐체 팬들을 보기가 좀 안쓰러웠지만.

둘째 조와는 레티로 호수로 보트도 타러갔다. 세비야 스페인 광장에서 노젓기에 빠져버린 우주에겐 특급 코스였다. 5학년 조는 체격이 좋아, 처음이라면서도 균형을 잘 잡고 힘 좋게 배를 운전했다. 지금은 작은 우주도 저렇게 커나가겠지. 같은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있던 친구들이 저마다 부모가 돼서 자기 삶을 개척하고 있는 일이 문득 돌아보면 참 신기하다. 당시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삶의 장면들을 많이도 지나왔다.
  
마드리드 레티로 공원 안에는 큰 호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유유히 보트 놀이를 즐긴다.
▲ 레티로 호수에서 노 젓는 아이들 마드리드 레티로 공원 안에는 큰 호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유유히 보트 놀이를 즐긴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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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밤이 정신 없이 지나고 스페인을 떠나는 아침이 되었다. 유치원에 막내 린을 데려다 주고 온 상미는 우버를 불러주었다. 기념 사진을 찍고 택시를 타려는데, 갑자기 조가 막 팔을 흔들며 뛰쳐나왔다. 십여년 전처럼 내가 또 휴대폰을 두고 나왔던 것이다. 마침 조가 제일 엄마를 닮았는데, 휴대폰을 흔들며 달려오는 모습이 딱 그 때의 상미 모습 같았다. 조야, 너 그땐 상미 배 속에 있었는데.

나라면 엄두도 내기 힘들 환대와 대접 속에 마드리드를 떠나며 상미 부부와 삼형제에게 너무 고마웠다. 자세히 쓰지 못한 많은 마드리드와 주변 관광지의 멋짐이 있었지만, 내게 마드리드는 이 가족과의 대화들로 가장 깊게 남았다.

이제 프랑스다. 난 또 다른 기대에 마음이 설레고 있었다. 나에게 프랑스는 제2의 고향 같은 느낌이 있다. 3년 밖에 살진 않았지만, 한국에선 매년 이사 다녔던 기억인데 프랑스에는 처음으로 오래 한 집에 머물렀었다.

한국에서 바빴던 부모님도 외국 생활 중에는 서로 서로에게 집중할 여유가 더 있었다. 가족의 전성기였다고나 할까. 이제 아들과 함께 그곳을 다시 방문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우주에게 속삭였다. 우주야, 이제 도착할 곳은 아빠가 어릴 때 살던 나라야. 아빠한텐 되게 고향처럼 느껴지는 곳이야.
  
스페인 옛 수도 톨레도의 석양. 이날 가이드는 우리에게 이 곳이 배우 지성이 배우 이보영에게 프로포즈를 한 장소라고 소개해주었다. 도대체 이런 정보는 어떻게 아는 것인가!
▲ 톨레도의 석양 스페인 옛 수도 톨레도의 석양. 이날 가이드는 우리에게 이 곳이 배우 지성이 배우 이보영에게 프로포즈를 한 장소라고 소개해주었다. 도대체 이런 정보는 어떻게 아는 것인가!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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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스 공항에 내리니 따스한 햇살과 아름다운 하늘이 우릴 반겼다. 공항 앞에서 우주의 사진을 찍어 주곤 바로 트램을 탔다. 그리고 난 프랑스식 환영을 받았다, 소매치기. 순식간에 지갑이 사라졌다. 내 현금, 내 카드, 내 미소와 따뜻한 마음도 같이 사라졌다. 이 이야긴 다음 기사에. 

태그:#스페인, #아빠와아들,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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