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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무단통치가 극에 달했던 1915년 12월 24일 새벽, 경주 인근 토지세를 운반하던 일제 우편마차를 습격해 8700원의 거금(현재가 2억 5000만 원 상)을 빼앗아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낸 의거, 이 경주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 역사를 독립기념관은 '경북 우편마차 습격의거지'로 명명해 경주의 항일독립운동 사적지로 지정해 두고 있다. 

항일독립운동 사적지는 옛 경북도 경주군 광명리 소태고개, 현주소 경주시 대경로 4682 효현교 일대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5년 12월 26일 자 신문은 3면에 관금 8700원 탈취 사건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사건이었다. 

일제가 조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끝내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미제사건이었지만, 이 의거는 광복 이후 가서야 당시 사건 발생 3개월 전인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항일무장투장조직으로 결성한 대한광복회소속 권명만 우재룡 선생이 참여한 독립군자금 마련 의거라는 것이 드러났다.

당시 대한광복회 총사령은 경주군 외동읍 녹동리에서 자란 박상진 의사였다. 경주사정에 누구보다 밝았던 박상진 의사가 총사령이었기에 기획하고 실행했던 의겨였다. 경북 우편마차 습격의거 사건은 경주시립극단이 연극으로 재연할 만큼 극적 요소가 많았던 의거였다. 

2020년 7월, 경주시는 효현교 일대 역사적 현장에 안내판을 세웠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지난해 광복절 <경주포커스> 독자들과 함께 탐방할 때만 해도 훤하게 드러나 보였던 효현교 우편마차 습격의거지 안내판은 이제, 누구라도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내판이 있는 것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로 주변 상황이 변해 있었다. 누군가 쌓아둔 흙더미가 높이 쌓여 있어 안내판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지경이다. 

뿐만 아니다. 흙더미 위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안내판 앞에는 큰 마대에 온갖  폐기물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경주시의 독립운동 사적지 6곳 중 안내판은 3곳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독립기념관 의뢰로 2009년 2월 12일부터 2010년 1월 1일까지 실시한 2009년 국내 사적지 실태조사 결과, 경주시에서는 6곳이 항일독립운동 사적지로 지정됐다.

1894년 갑오의병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문헌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적지 가운데 역사적 비중, 교육적 가치, 지역특성 등을 고려한 선정이었다. 당시 독립기념관이 지정한 경주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6곳은 다음과 같다. 

▲1896년 6월 17일 경주연합의진이 경주성을 공격했던 경주성연합의진 전투지(동부동 2-8) ▲1915년 12월 24일 대한광복회 권영만, 우재룡이 세금우편마차를 습격한 경북 우편마차 습격의거지(경주시 광명동 1128번지 일대) ▲경주장터 3.1만세운동 시위지(경주시 동부동 113-6 신한은행 4거리 일대→2020년 봉황대 인근 경주작은장터로 변경) ▲1926년 8월 이만근, 이중근 형제가 만든 산내청년회 결성지인 의곡공립보통학교(산내면 의곡리 89-14)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집터(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496-2~6) ▲박상진의사 묘 (내남면 노곡리 산 242-6) 등이다.

이 가운데 안내판이나 상징조형물이 있는 곳은 경주3.1만세운동 시위지, 우편마차 습격의거지, 박상진 의사 묘 등 3곳뿐이다.

나머지 3곳은 독립운동 사적지라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조차 설치되지 않은 채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관리부실 속에 방치되고 있는 역사의 현장, 광복 제78주년을 기념으로 경주시 독립운동사적지에 전반에 대한 경주시와 보훈부의 관심이 절실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경주포커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경주, #독립운동사적지 , #우편마차습격의거지, #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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