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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편집자말]
엄마는 스페인에 대해 이야기 해주곤 했지.
마치 그곳이 그녀의 고향이라는 듯이.
안달루시아 산 속의 도적들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어.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지.
난 파리를 내 나라로 삼았어.
그리고 바다를 상상할 때면, 
그 바다는 안달루시아 산을 향해
이곳으로부터 멀리 나를 데려간다네.
 - <보헤미안>,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중


빅토르 위고 원작 소설을 뮤지컬로 만든 <노트르담 드 파리>에 나오는 노래다. 집시인 에스메랄다의 어머니는 그라나다와 세비야가 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부터 피레네 산맥을 지나 파리까지 북쪽으로 올라갔다.

이는 우주와 나의 이후 경로와 같다. 우주도 이 노래를 좋아했다. 여행의 지역마다 개인적으로, 혹은 보편적으로 떠오르는 노래들은 그 여행의 주제곡처럼 남는다. 이 노래는 우리 여행의 주제곡 중 하나였다.

알함브라 궁전을 방문할 사람들은 입장 시간을 꼭 지키는 것이 좋다. 알함브라 궁전의 핵심이라고 주로 불리는 '나스리 궁'만큼은 예약 시 기제된 입장 시간을 지키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궁전을 방문하던 날 나와 우주의 첫 딜레마가 되었다.

조식을 짧게 마칠 것인가
 
정원 같은 길이 많다.
▲ 알함브라 궁전 일각 정원 같은 길이 많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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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온 힘을 소진했던 나는 이날 아침 두드려 맞은 느낌으로 깼다. 곤히 자는 우주를 깨워 일으키기가 미안했지만, 오늘의 일정을 소화하려면 깨워야 했다. 이곳은 또 조식까지 있는 숙소가 아니었던가.

오래 머물고 싶은 쾌적한 숙소였지만 허둥지둥 씻고 짐을 싸서 카운터에 맡기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미 입장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어른의 계산으로는, 10분 동안 먹고 5분 동안 달려가서 입장하면 되는 일정이다. 

하지만 우주는 오랜만에 만난, 입맛에 맞는 쾌적한 아침 식사를 천천히 즐기고 싶어 했다. 즐기고 싶은 마음으로만 따지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더 끌면 입장 시간을 놓칠텐데 어쩌나.

이 상황을 빠르게 우주에게 설명했지만 우주는 아직 잠도 덜 깨서 여유롭게 오물오물 천천히 음식을 맛보고 있었다. 애가 탔다. 아이를 들쳐 안고 그냥 나가버릴까. 그런데 내가 우주라면 그런 여행이 좋은 기억으로 남을까?

나는 나스리 궁의 존재를 예매 전까지 알지 못했다. 우주는 지금 나로부터 들었다. 그 궁을 위해 이 편안하고 나른한 하루의 행복한 시작을 끊는 것이 맞을까. 어른끼리의 여행이라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이와의 여행이라면, 이 편안함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누가 아는가. 좀 늦더라도 입장시켜 줄지.

조바심을 내려놓자 나도 마음이 편해졌다. 우린 조식을 충분히 즐겼다. 그동안 마트에서 산 씨리얼과 우유를 조금 타 먹는 것으로 아침을 대신했던 우리에겐 풍요로운 만찬이었다. 그래봐야 빵과 계란과 샐러드 류의 유럽식 간단한 아침이었지만.

여유를 부리는 김에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영상통화 했다. 몸과 마음의 피로가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날 밤 마주하게 될 숙소를 미리 알았더라면 이 숙소의 행복을 더 마음 깊이 새겼을 것이다.
 
저 방향으로 론다와 세비야가 있다.
▲ 알함브라 궁전의 서쪽 전망 저 방향으로 론다와 세비야가 있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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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의 입장부터 나스리 궁의 방문시간이 지났다는 경고를 받았다. 우주는 보통 좌절이 빨랐다. 뭐가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 "왜요?" 하고 물으며 금방 울음 장착 모드가 된다. 그럴까봐 나는 재빨리 얘기를 해두었다. 여행에선 모든 걸 다 보고 다닐 필요도 없고, 다 볼 수도 없어. 안 된다고 하면 그냥 '괜찮아. 안 궁금해!' 하면 돼. 우리 함께 말해 볼까? 안 궁금해! 우주의 얼굴이 금방 웃음과 함께 활짝 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해 나스리 궁의 입장 줄을 다시 서 보았다. 그러나 여지 없이 입장 불가였으니, 알함브라 궁전 방문객들은 참고하시길. 물론 우리는 무려 한 시간 반을 늦은 확신범들이어서 처분에 큰 불만은 없다.

우주와 나는 오기 전 다운로드 받은 오디오 가이드를 열심히 들으며 나머지 알함브라 궁전의 구석구석을 열심히 누볐다. 가이드 내용에 대해 대화도 나누고, 다양한 인종과 나이 대의 사람들도 구경하고, 목 마르면 대형 패트째 가져온 물을 마시고, 배고플 땐 앉아서 미리 챙겨온 긴 빵을 뜯어서 나눠 먹었다.

우주는 여전히 <꽃보다 할배>의 현장에 있다는 걸 기뻐했으며, 나는 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오래된 성을 걷는 일이 좋았다.
 
신구 배우가 함성을 지르다 제지당했던 장소
▲ 궁전 내, <꽃보다 할배> 촬영지 중 하나 신구 배우가 함성을 지르다 제지당했던 장소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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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은 다양했다. 젊은 청춘들, 노부부, 어린 아이들의 손을 잡거나 들쳐업고 다니는 부부들, 뛰어다니는 청소년들. 20대에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배낭여행을 다닐 때는, 그 때가 여행다니기 가장 좋은 인생의 나이대라고 생각을 했다. 어린이들은 뭘 모르고 금세 잊어버릴 것 같았고, 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들은 힘들어 보였다. 노부부들은 피로해 보였다.

그리고 다른 어른들은, 이미 세상에서 자기 자리가 정해진 사람들 아닌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의 그때만이, 여행의 어떤 정수를 흡수해서 삶의 변화를 줄 것만 같다는 턱없이 낭만적인 자기 긍정이 여행을 더욱 설레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를 알겠다. 유적지 관광은, 그 장소를 밟아온 긴 시간대의 많은 사람들과 하나의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전까지 그 곳을 방문해본 적 없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그 공간을 방문해본 사람으로서 다시 써내려가는 일이다.

노부부들은 짧은 여생에 추억거리를 더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살아온 긴 시간에 이곳의 시간을 더해 자신을 다시 한 번 음미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기억이 희미할 지라도, 이곳에서 같이한 가족과의 느낌을 건물 밑의 주춧돌의 하나처럼 마음에 쌓을 것이다.

이런 기억은 이후에 다시 클릭해서 들어갈 삶의 하이퍼텍스트가 된다. 난 알함브라를 방문해본 나로서 나의 정체성을 다시 써내려갔고, 우주와 이후에 다시 찾아볼 순간들을 마음으로 또 사진으로 기록했다.

배터리도 데이터도... 운이 없었다 
 
궁전 밖 풍경을 따라가다보면 알바이신 지구에서 알함브라를 바라봤던 전망대도 찾아볼 수 있다.
▲ 문과 창 너머 궁전 밖 풍경을 따라가다보면 알바이신 지구에서 알함브라를 바라봤던 전망대도 찾아볼 수 있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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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까지는 고속버스였다. 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무거운 짐을 이끌고 가서 햄버거를 샀다. 햄버거를 주문할 수 있는 곳까지 짐을 들고 갈 수가 없어서, 짐과 함께 우주를 자리에 앉혀놓고 혼자 주문대 앞에 섰다.

이것도 만 7세 아들과 아빠에겐 위험 부담이 있는 모험이라, 끊임 없이 고개를 양쪽으로 돌려가며 아이를 시야 안에 두고 햄버거를 구했다. 시간에 맞춰 고속버스에 올랐다. 난 우주에게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고 세비야에 대해 검색도 하며 안달루시아의 일몰을 지켜보았다.

버스에서 노래도 듣고 정보도 찾으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스마트폰, 보조배터리, 인터넷 데이터. 고속버스에 내려서 숙소까지 길을 찾으려면 지도가 켜져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배터리와 인터넷 데이터가 남아 있어야 한다. 나는 충분히 남겼다고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충분하지는 않고, 운이 없을 경우라면 아슬아슬하게 맞을 만큼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운은 없었다.  

세비야의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예약된 숙소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였다. 이걸 택시 타기엔 또 아까웠다. 다시금 걷기를 선택했다. 우주와 나의 휴대폰은 두 개 다 배터리가 많이 남지 않은 상태라, 일단 우주 것으로 지도를 보고 혹시 방전되면 내 것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우주의 것은 생각보다 급격히 방전되었다. 내 휴대폰의 지도를 켰다. 배터리는 버틸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데이터였다. 남아 있는 데이터가 너무 적었다. 새로운 도시에 어두운 밤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적대적으로 보인다. 그 곳에선 스마트폰 데이터와 배터리만이 희망의 등불이다. 그리고 그 등불은 꺼져가고 있었다.

숙소와 100미터 안쪽으로 거리가 좁혀졌는데, 갑자기 지도가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지도 없이도 찾아갈 법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지도앱이 헤매기 시작한 장소는 거대한 광장이었다. 그 광장은 여러 개의 찻길과 여러 개의 촘촘한 골목으로 나무 뿌리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 길 끝은 모두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도저히 감으로 찾을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지도는 조금씩 틀어진 길을 가르쳐주는가 싶더니, 급기야 격자 무늬로 변해 버렸다. 데이터가 소진된 것이다. 거기에 배터리까지 급격히 낮아졌다. 선구매했던 인터넷 데이터가 소진되면 아주 느린 셀룰러 데이터로 전환된다.

사실상 검색이 불가능한 속도의 인터넷이다. 지도 로딩은 오래 기다려도 희망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게다가 배터리가 그 시간을 기다려 줄 수가 없을 것이다. 신이시여 왜 이런 위기를, 아니 내가 자초했지.

광장 중앙의 분수대에 걸터 앉아 속살을 드러내듯 큰 트렁크를 열었다. 빨랫감을 헤쳐 노트북을 꺼내 폰과 연결해서 배터리의 생명을 연장했다. 주변의 와이파이는 기대할 수 없었다. 사각형의 좌표 무늬는 느릿느릿 퍼즐 완성하듯 다시 그 지역의 지도를 띄웠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방향을 점지 받아 다시 트렁크를 닫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매우 좁은 골목에 있었다. 지도앱은 헤매며 여기 저기를 방향을 잘못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건 데이터의 문제도 아니었다. 좁은 골목은 하나가 아니었고, 그나마 숙소 비슷한 문이 보이는 곳에 걸린 간판은 내가 예약한 숙소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겹치는 단어는 있었다.

그라나다에서 숙소 이름이 예약 앱에 표기된 이름과 달랐던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더 당황했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가진 정보들을 바탕으로 몇 가지 가능성을 소거한 결과 이 곳이 맞는 숙소라는 확신이 들었다. 작은 호스텔이었다.

끝까지 나한테 이러기야

그런데 문제는 이 호스텔은 관리인이 업무 시간 이후엔 퇴근하는 형태였다는 점이다. 메일로 온 출입 방법과 문 앞의 출입 패널이 조금 달랐다. 두 번 실패하고 나자 혹시 이곳이 아니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더럭 들었다. 그 때 마침, 안에서 한 여행객 커플이 나왔다. 천만 다행이었다. 등대도 정신력도 다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방으로 가는 복도는 매우 비좁은 오르막이었다. 방은 광각렌즈로 찍은 소개 사진으로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좁았다. 화장실이 침대보다 세 계단 위 문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라나다의 숙소와는 극단적인 차이였다.

그렇게 좋을 필요도, 이렇게 별로일 필요도 없는데. 괜찮아 우주야. 잠만 자고 내일 아침에 바로 나갈 건데 뭐. 숙소앱의 사진과 설명, 가격만으로는 아직도 숙소의 질을 판단하기 참 힘들다. 공간이 너무 좁아 일단 나라도 먼저 씻고 나와야 할 것 같아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우주야 씻어라… 말하며 화장실을 나오는 순간 미끄덩, 하늘을 날았다. 바닥이 대리석처럼 미끄러운 재질이었다. 몸이 가로로 붕 뜨는 순간이 초현실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세 개의 계단 중 마지막 계단의 모서리에 쿵 떨어졌다. 허리와 오른쪽 팔꿈치에 강렬한 통증이 엄습했다. 비명이 나왔다. 악! (계속)
 
추락의 현장
▲ 세비야 숙소 방 안 계단 추락의 현장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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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아빠와아들, #스페인, #유럽,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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