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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 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 [편집자말]
아들의 철도 사랑은 특별하다. 기차 장난감을 그렇게 좋아하더니 조금 크고 나서는 지하철 노선도에 빠졌다. 서울 지하철 노선도의 각 호선과 환승역을 통해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방법을 찾는 게 그렇게 재미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의 지하철을 처음 타러갈 때 설렘이 하늘을 찔렀었다. 그랬는데 첫 날 지하철을 잘못 타고 거꾸로 타고 난리를 치는 통에, 신세계에서 새로운 지하철 노선 체계로 진입하는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우리는 첫날 벌어진 난리를 '리세우(LIceu)의 비극'이라고 이름 붙였다. 

지하철로 이동할 일이 있어도 리세우 역은 피했다. 아니 꼭 그랬다기 보다는, 걷다 보니 어쩌다 다른 호선 다른 역만 이용하게 됐다. 숙소 근처를 걷다 리세우역을 발견했을 때는 "여기다, 비극의 장소!" 하면서 같이 신음소릴 흘렸다.
 
가우디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 몬세라트 성당에서 바라본 바위봉우리 가우디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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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로 남은 산, 몬세라트

바르셀로나 4일차인 마지막 날에는 몬세라트와 시체스 당일 투어가 예약되어 있었다. 집결지인 산츠역까지 가려면 리세우역에서 타는 것이 가장 빨랐다. 우리는 비장하게 비극의 장소로 돌아가 첫 날의 상처를 극복하자고 결의했다. 

그 날의 주제가 잡히니 우주에겐 그 날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바르셀로나 지하철에 대한 상처를 극복하고 노선도를 완전 정복할 기쁨에 바로 들떴다. 우주에게 아쉬운 건 산츠역에서 몬세라트까지 기차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전세 봉고로 이동한다는 사실이었다. 단체 이동을 하려면 그게 더 편해서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정확하게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첫 날의 실패가 마지막 날의 극복으로 아들의 마음 속에 남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이 여정의 순간 순간이 즐거운 모험으로 생각되기를 바랐다. 삶의 당혹스러운 실패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성공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고, 그런 순간도 있다고, 은유로서 마음에 기록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이건 어른인 나에게 더 필요한 은유일지도 모르겠다.
  
바위산 속의 대성당이 주는 숭고를 느낄 수 있는 곳
▲ 몬세라트 바위산 옆에서 바위산 속의 대성당이 주는 숭고를 느낄 수 있는 곳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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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서 다닌 지하철 길은 돌아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하지만 처음엔 미로에 던져진 것 같았다. 첫 날의 실수 이후 아들은 노선도를 철저하게 확인했다.

길치 아빠를 어린 아들이 인도하는 모양새였다. 그래, 네가 심청이다. 전세 봉고를 타면 그 역할을 할 수 없어 아쉬워 하는 듯했다. 난 어릴 때부터 어떤 장소를 느낌과 이미지로 기억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들은 이동 경로와 위치로 기억하는 듯 했다. 너무 다른 생명체다.
  
몬세라트 대성당의 검은 성모상. 치유능력이 있다는 속설에 따라 많은 관광객이 줄지어 순서대로 성모에게 짧은 기원을 드린다.
▲ 검은 성모상 몬세라트 대성당의 검은 성모상. 치유능력이 있다는 속설에 따라 많은 관광객이 줄지어 순서대로 성모에게 짧은 기원을 드린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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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날의 목적지는 아들에게도 이미지로 남았으리라 생각한다. 몬세라트는 거대한 바위산과 그 고도에 지어진 성당과 어린이 합창단, 그 안에 있는 검은 얼굴의 성모상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몬세랏의 바위산은 가우디가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주가 본 어린이 여행책에는 가우디를 중심으로 바르셀로나 소개가 되어 있었다. 첫 날 본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높게 솟은 탑들과 몬세라트 바위산의 유사함은 우주에겐 현장학습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정기적으로 성가를 부른다.
▲ 몬세라트 대성당의 합창단원들 근처의 초등학교에서 정기적으로 성가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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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았던 해변가, 아빠와 아들의 차이점

오후에는 시체스 해변으로 향했다. 여행에서 처음 맛보는 지중해의 바다였다. 부드럽고 선명한 햇살과 맑은 바다, 고풍스러운 건물들. 이곳도 칸처럼 영화제의 도시다. 작년에는 이정재 배우 겸 감독의 <헌트>가 시체스 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우린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여행자들이 늘 하는 일과처럼. 

우주는 겨울 바다의 백사장에서 너무나 오랜만에 맨발로 뛰어다니고 바다에 발을 담갔다. 아이들은 어쩜 저리 모래와 바다를 좋아할까. 지중해의 2월 바다는 부드럽게 차가웠다. 물론 나는 발을 담그진 않았다.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심정으로 아들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기보다는 발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고 다시 신발을 신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해변 마을의 골목길에서
▲ 시체스 해변 마을의 골목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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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는 여행 중 처음으로 기막힌 노을을 만났다. 가이드는 너무 다행이라고 말했다. 다른 곳은 날씨가 안 좋아도 볼 것이 있는데 이 해변은 날씨에 따라 많이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해변에서 아름다운 노을을 맞으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다른 일행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천천히 가만히 걸었다. 

해변 한 쪽 끝에는 친절하게 구부러진 나무와 작은 놀이터가 있었다. 사람들은 놀이터 경계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아들은 그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다. 석양과 소년은, 늘 <어린 왕자>를 생각나게 한다. 

별이 너무 작아, 의자를 조금만 뒤로 옮기면 다시 노을을 볼 수 있다던 소년. 많이 외로운 날은 마흔 네 번 노을을 보았다던 소년. 한 번의 노을만으로도 큰 위로를 얻는 나는 마흔 네 번이나 노을을 보고 싶은 마음은 어떤 것인지를 가늠해 본다. 그러다가 노을과 아들의 미소를 찍는다.
  
시체스 해변의 놀이터에서
▲ 지중해의 겨울 바다 시체스 해변의 놀이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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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가는 날이었다. 국내 여행이라거나 스페인에 사는 입장이라면 굳이 이렇게 짜지 않았을 스케줄일 것이다. 하지만 멀리 한국에서 인생에서 몇 번 없는 여행 기회를 쓰기 위해 날아오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효율이 중요하다. 다양하게 볼수록 좋다.

관광객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장소에서라도 특별히 할 일이 의외로 그렇게 많지가 않다. 무조건 걷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니 전세 버스로 여기 저기 이동하며 내려서 인증샷을 찍는 일이 멀리 여행 온 사람들이 하게 되는 가장 흔하고 중요한 과업이 된다.
  
여행 중 처음 만난 맑은 노을
▲ 시체스 바닷가 놀이터 여행 중 처음 만난 맑은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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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는 일이 여행지를 체감하고 몰입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굳이 내가 사진 안에 들어가 인증샷을 찍어야 하는가? 등의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결론은, 여행지 체험은 이제 어떤 장소에서 무엇을 어떻게 찍었는가가 매우 중요한 여행 체험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느 장소에 있었다는 기록도 중요했다.

사진을 찍는 일은 관광지를 이해하는 일보다, 나를 이해하는 일에는 가깝다. 나는 무엇을 찍고 싶고, 소중히 여겼을까. 이 순간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순간의 너는 어떤 감정일까. 그러다보면 나와 너와 관광지 사이의 관계를 기록해보고 싶어진다. 그렇게 사진을 찍는 일은 관광지와 나와 너를 이해하는, 가벼운 놀이가 된다.

다만 사진을 많이 찍다보니 포즈를 개발하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아들은 고정 포즈와 구호를 만들어 왔다. '브이' 자를 수평으로 만들어 눈 옆으로 가져다 대며 '가우디' 하고 외치는 것이다. 사진이 흔해지면서 김치나 치즈를 외치는 일이 드물어진 시대에 울려퍼진 아이의 가우디는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저금통에 동전을 넣는 사람을 형상화 했다고 한다. 미로 아래서 가우디를 외치다.
▲ 후안 미로가 디자인한 가이사 뱅크의 로고 아래서 저금통에 동전을 넣는 사람을 형상화 했다고 한다. 미로 아래서 가우디를 외치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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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라나다로 내려간다고 하니, 가이드는 우주에게 말해 주었다. "어? 거기는 지역이 달라서 가우디라고 하면 안 될텐데?" 이 말을 듣고 우주는 가는 곳마다 의미가 있는, 사진 찍히는 데 적절한 구호를 개발하는 데에 애쓰게 된다.

'완벽한 아빠'라는 로망, 과감하게 버리다

바르셀로나에 돌아오고 투어는 해산했다. 우리는 폐장 시간이 다가오는 까사바뜨요에 들러 거의 마지막 관람객이 되어 실내를 관람했다. 태블릿을 들려주고 AR로 상상을 보충해주고 설명을 하는 관람 형태였다. 한글 설명도 있었다. 

이 모든 '관광 체험'의 진화에 일단 놀랐다. 그리고 가우디 건축의 내부 구조를 바라보면서, 가우디를 더 어렸을 때 체험했더라면 삶이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건축을 어떻게 지어야 할까에 대해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고 단호하게 실천할 수 있구나. 가우디의 건축은 건축가 자신의 삶과 믿음의 총체 같았다.
 
가우디의 대표적인 건축 중 하나. 실내 투어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다.
▲ 까사바뜨요의 야경 가우디의 대표적인 건축 중 하나. 실내 투어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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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근처 마트에서 고기와 채소를 샀다. 외식비에 비해 마트 물가는 싼 편이었다. 민박집에 있던 프라이팬과 올리브유와 소금 등을 눈여겨보고 벌인 일이었다. 바르셀로나 마지막 저녁은 아빠가 요리를 해주겠어. 남자 둘이 먹는데 고기 구워서 샐러드랑 먹으면 그만이지! 

그러나 고기는 질겨서 씹기 괴로웠고 생기 없는 채소는 쓴 데다 소금은 미칠 듯이 짰다. 마지막 저녁은 대실패했다. 그러나 아빠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매일 체험 중인 아들은 실망을 크게 표출하지는 않아 주었다. 완벽한 아빠로 보이고 싶은 로망이 없지는 않았는데, 모자란 채로인 것이 내게도 편하고 너의 성장에도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내 마음대로 생각했다.

이제 그라나다로 이동한다. 여행 동선을 고민할 때 알함브라 궁전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냥 궁전일 것 같은데, 너무 유명해서 안 보기는 아쉬운... 여행이 그렇다. 다만 모든 계획 역량을 바르셀로나에 집중한 탓에 그라나다부터는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우린 새벽까지 짐을 싸고 머리를 맞대고 잠들었다.

태그:#바르셀로나, #유럽, #아빠와아들,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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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출합니다. 그리고 이것 저것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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