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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헌 박상진 의사 생가터. 안내판조차 없다.
 고헌 박상진 의사 생가터. 안내판조차 없다.
ⓒ 경주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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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지원으로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년에 걸쳐 국내 독립운동 사적지 조사를 실시했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경북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박상진 의사 집터를 조사한 뒤 기념표식이나 안내판을 설치할 것을 권고했다.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이 살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기념표식이나 안내판을 설치해 알리고 교육현장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출생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공식적으로 박상진 의사는 1885년 1월 22일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1887년 네 살 때 외동읍 녹동리로 이사했다.

박상진 의사의 할아버지가 박상진 의사 생부 시규, 백부이자 양부였던 시룡의 집을 나란히 장만해 주었다고 알려졌다.

박상진 의사가 1902년 상경해 왕산 허위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최소한 유소년기 15년은 외동읍 녹동리에서 보낸 셈이다. 

거지에게 좋은 곡식을 주게 했다거나 6-7세때 제 또래 아이들중에 떨어진 옷을 입은 아이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 주었다거나, 지극한 효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일화는 모두 자라난 외동읍 녹동리에서의 일이다.

생모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도, 수배중에 일제 경찰에 검거될 것을 알면서도 장례식 참석을 위해 찾아왔던 곳도 모두 이곳 녹동리였다.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469-2~6에 박 의사의 집터가 있다. 2월 23일과 27일 두 차례 외동읍 녹동리를 현장 취재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권고에도... 안내판조차 방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2010년 발간 국내항일독립운동 사적지 대구경북1편에 수록된 박상진 의사 집터와 권고사항.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2010년 발간 국내항일독립운동 사적지 대구경북1편에 수록된 박상진 의사 집터와 권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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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기념표식이나 안내판 설치를 권고한 지 13년이 지났지만, 그곳이 박상진 의사의 집터라는 사실을 알리는 표식이나 안내판은 여전히 없었다. 

집터는 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농막이 하나 들어섰고, 일부는 채소를 재배하고 있었다. 일부는 묵혀두고 있었다.

21년 전, 2002년 8월, 지역신문에서 일하던 기자는 취재를 위해 두 차례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밭으로 사용되는 것은 여전했고 안내판조차 없이 무심하게 버려진 것도 똑같았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박상진 의사 집터 5필지 가운데 469-2, 3, 4번은 지목상 대지로 나타난다. 등기부등본상 면적은 954평이다. 나머지 469-5, 6은 지목상 밭(전)이었다. 196평이다.

대지 3필지 가운데 가장 면적이 넓은 469-2번지는 울산시 울주구와 울산시 북구 호계에 주소를 둔 울산시민 2명, 469-3은 외동읍 녹동리 주소의 주민, 469-4번지 역시 외동읍 녹동리 주민 소유로 나타난다. 나머지 밭 2필지 가운데 1필지는 469-3 대지소유주, 또 다른 1필지는 469-4 대지 등기인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란히 있었다는 기왓집 2채가 헐린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2002년 8월 취재 때, 그리고 올해 취재를 통해 5칸짜리 기왓집 두 채 가운데 한 채는 1970년대 초에, 나머지 한 채는 1980년대 초에 헐렸다는 주민들의 전언을 들을수 있을 뿐이었다.

등기부 등본에는 1968년, 1972년, 1973년의 매매기록이 보였지만 정확하게 매매 시점이나 박상진 의사 사후 그집의 내력을 기억하는 주민은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박상진 의사가 살던 집은 1970년초에 헐렸다. 기왓장과 건축자재는 당시 오천정씨 재실을 짓는 데 사용됐다. 현재의 오천정씨 재실.
 박상진 의사가 살던 집은 1970년초에 헐렸다. 기왓장과 건축자재는 당시 오천정씨 재실을 짓는 데 사용됐다. 현재의 오천정씨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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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에 먼저 헐린 박상진 의사의 집 건축자재는 집터에서 1㎞남진 떨어진 곳, 외동읍 녹동리 839번지에 오천정씨 재실을 만드는 데 고스란히 사용됐다. 기왓장을 비롯해 건축자재를 모두 옮겨 재실로 지었다. 그때 박 의사가 살던 집 5칸짜리를 4칸으로 줄여 지었다.

오천정씨(연일정씨) 재실에는 현재 정락교(86)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정락교씨의 선친(박유한)때 재실을 지었고, 그때부터 살았다고 했다. 무슨 인연으로 박상진 의사가 살던 집 자재로 재실을 지었을까?

정락교씨는 박 의사의 집이 정락교씨 8대 조상 때부터부터 살던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8대 할어버지때 녹동에 와서 터잡고 살았다고 한다. 그후 석계1리로 이사할 즈음에 송정박씨 집안(박상진 의사의 할아버지로 추정 - 기자 말)에 그 집과 터를 매각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50여년전쯤 다시 그 집이 누군가에게 팔린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때는 그 집이 오랫동안 비어있었는데, 우리 조상이 지은 집이라고 해서 선친께서 건물만 사서 이쪽에 재실로 옮겨 지었다."

워낙 오천정씨들이 대대로 살았던 집과 집터를 박상진 의사 일가에 팔았고, 그후 박상진 의사가 살았던 집이 누군가에게 다시 매각될 즈음에 오천정씨 집안에서 지은 집이라는 이유로 건축물만 매입해 재실로 지었다는 것이다.

오천정씨 재실은 정면 4칸. 지붕 기와는 함석재질의 개량기와였다. 1970년대초 재실을 지을 당시 지붕에 얹었던 그 기와가 아니었다. 기자가 2002년 취재했을 때만 해도 옛 기와였다. 그 후 지붕을 교체한 것이다. 정락교씨는 "10년 전쯤 기와가 썩고 지붕이 내려앉을 지경이라 함석기와로 교체했다"고 말했다.

박 의사가 살던 집터, 생활했던 집 건축자재는 모두 외동읍 녹동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가 복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들은 모두 갖춘 셈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박 의사의 숨결을 느낄수 있는 자재까지 있어서 더욱 그렇다. 

복원 바라는 마을 주민들... "경주-울산 협력" 주장도

취재현장에서 만난 녹동리 주민들은 생가 복원을 간절히 원했다. 이 마을 출신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기리고, 마을 발전을 위해 복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상열 외동읍 녹동리 이장은 "복원하면 마을에 사람도 찾아오고 마을 발전의 계기가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러나 복원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다. 집터 구입비만 해도 적지 않게 들 것이고, 토지소유주들이 매각 의사가 있는지 여부도 불분명하다. 신라왕경핵심유적복원정비사업, 해월 최시형생가 복원 추진을 하고 있는 경주시의 여력도 여의치 않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김신재 경주발전협의회 수석부회장(동국대교수)의 제안은 눈 여겨 볼만하다.

김 교수는 최근 한 지역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박상진 의사 생가복원을 해오름 동맹인 울산시와 경주시의 선도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녹동리 생가복원이 실현돼야 울산시의 박상진 의사 현창사업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고, 경주시 역시 박상진 의사 생가복원을 통해 역사도시 경주의 정체성을 한층 더 강화 할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상열 녹동리 이장이 생가터에서 복원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김상열 녹동리 이장이 생가터에서 복원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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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지역신문 재직 때인 2002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박상 진의사 생가복원 필요성을 제기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당시 신문보도.
 기자는 지역신문 재직 때인 2002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박상 진의사 생가복원 필요성을 제기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당시 신문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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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현교에 안내판을 설치한 모습. 사진은 지난해 8월15일 경주포커스가 주관한 경주시 독립운동사적지 탐방사진이다.
 효현교에 안내판을 설치한 모습. 사진은 지난해 8월15일 경주포커스가 주관한 경주시 독립운동사적지 탐방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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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의 독립운동 재조명 또는 현창사업은 주낙영 시장 취임 이후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는 양상이다. 주 시장의 지시로 내남면 노곡리 박상진 의사의 묘역을 새롭게 단장했고, 진입로도 확장했다. 세금마차 습격 의거장소에는 안내판을 설치했다. 

지난해에는 1919년 경주만세운동이 벌어진 곳에 '경주 3.1독립만세운동 발상지' 표지석을 세우기도 했다.

박상진 의사는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악했던 1910년대 독립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독립전쟁론의 선구자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열전을 펴낸 박걸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전 학예실장은 "암흑기 무단통치시대 친일파 처단등 의열투쟁을 주도했던 그의 활동이 한줄이 빛이 돼 3.1운동의 원천을 형성한 선각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외동읍 주민들을 중심으로 박상진 의사의 출생지가 경주라는 점을 규명하고,생가 복원을 추진하는 활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외동읍 주민, 사회단체의 활동은 주춤한 상태다. 

울산으로 거의 공식화된 작금의 출생지 규명은 어쩌면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정확한 내력을 규명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독립운동가가 울산 출신이면 어떻고 경주 출신이면 또 어떤가.

지금은, 일제강점기 초기 눈부신 활동을 펼쳤던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가 유소년기를 보냈던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생가터 복원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때다. 당장은 그의 생가터에 제대로된 안내판 설치부터 시작해야 한다.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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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주포커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박상진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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