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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일교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걸 보니, 가을이 깊어가는구나! 한다. 내겐 가을을 지내는 혼자만의 몇 가지 의식이 있는데 새벽녘 눈을 떠 싸한 공기를 벗 삼아 이른 산책을 하는 것, 올해는 단풍을 어느 산에서 만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 오래된 시집을 꺼내 읽는 것, 그리고 또 하나 '누른 국수'를 빼놓지 않고 먹으러 가는 것이다.

엄마가 그리워지는 맛, 누른국수
 
막 끓여 낸 누른 국수
 막 끓여 낸 누른 국수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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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는 "'누른 국수'가 뭐야?" 하겠지만, '누른 국수'라는 단어를 봄과 동시에 동공이 확장되고 입에 침이 고인다면 그분은 필시 내 동향 분이리라. 이 '누른 국수'는 대구의 10미(味)로도 꼽힐 만큼 향토색이 진한 음식이다. 밀가루로만 반죽을 해 끓이는 여타 '칼국수'와는 달리, 노란빛이 도는 콩가루에 밀가루를 섞어서 반죽을 해 누런 색을 띤다고 해서 누른 국수라고도 하고, 밀대로 눌러서 만든 면으로 끓인 국수여서 누른 국수라고도 한다.

정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뭐 중요하겠나, 다른 칼국수에 비해 정성이 배 이상 들어가는 '누른 국수'만큼은 다른 어느 지역의 국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진한 그리움의 맛을 지녔다 자부한다. '국수 가 뭐, 다 거기서 거기지...'라고 미리 예단하지 마시라. 이 '누른 국수'는 그야말로 고향의 맛, 엄마가 그리워지는 맛, 한번 먹어보면 다시 생각나는 잊을 수 없는 맛이다. 

엄마는 자타공인 이 누른 국수의 달인이었다. 예로부터 국수가 유명한 고장에서 나고 자란 탓도 있겠지만, 엄마가 이 누른 국수의 달인이 된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엄마도 그렇지만 아버지는 국수나 만두처럼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특히 즐겨 드셨는데, 전쟁 후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미군으로부터 배급받는 밀가루가 그나마 구하기 쉬워서였다고 했다. 슬프고 아린 역사의 한 편에서 '누른 국수'는 그렇게 내 부모님의 최애 음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거, 오늘 국수 좀 해 먹지?"라는 아버지의 한마디면 엄마는 별다른 반응도 없이 나무로 만든 커다란 국수 판과 밀대를 광에서 꺼내왔다. 누가 만들어 줬는지는 몰라도 대단히 튼실해 보이는 그 장비들을 내오는 것으로부터 누른 국수 만들기는 시작된다.

콩가루와 밀가루를 엄마의 비밀 비율(나중에 가르쳐 주셨는데 사실 비싼 콩가루보다 밀가루가 훨씬 많이 들어갔다)로 반죽해서 잠시 숙성시켜 놓은 다음, 멸치육수를 들통에 끓이기 시작한다. 엄마는 다른 건 다 아끼고 아껴도 이 멸치 육수에 들어가는 재료만큼은 절대 아끼는 법이 없었다. 국수의 맛 팔 할은 이 육수에 있다고 믿었던 분이셨기에.

은빛이 도는 멸치와 넓적한 다시마 그리고 가끔 대파의 뿌리 부분이 전부인 이 육수의 재료는, 사실 누른 국수로 끓인 칼국수의 핵심이었다. 언젠가 다른 지역 여행 중에 칼국수를 먹다가 '아, 누른 국수 먹고 싶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국물이 그냥 맹물에 끓인 듯 너무 밍밍했던 것이다. 모름지기 누른 국수의 국물은 연한 갈색빛이 돌만큼 진하게 멸치를 우려내야 한다. 그래서 살짝 비린 맛이 국수 끝에 달려와도 괜찮다. 눅진하고 깊은 맛, 그것이 누른 국수와 다른 칼국수들의 차별점이므로.

육수가 마련되는 동안 반죽과 숙성을 거친 거대한(?) 덩어리는 이제 누른 국수로 거듭날 채비를 한다. 객식구가 식구수보다 더 많은 대가족의 한 끼 식사를 위해 엄마가 누르고 밀어야 할 국수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뭐든 퍼주기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엄마는 이 한 끼 국수도 그냥 우리 식구만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던 거다. 우리 집에서 누른 국수를 민다는 소식이 들리면 동네 사람들 너도나도 대문 앞을 서성거릴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음식 솜씨가 뛰어난 아내를 둔 아버지는 어쩌면 이 국수를 이틀이 멀다 하고 먹고 싶다고 함으로써 이웃들에게 은근히 아내의 솜씨를 자랑을 하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본 적도 있었다.

엄마도 "넘이 끼리 주는 기 젤로 맛있더라"
 
곱게 썰어 놓은 누른 국수
 곱게 썰어 놓은 누른 국수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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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미컬하게 국수를 밀고 칼로 썰어 고르게 펼치는 과정을 무한 반복하는 엄마를 보며 신기한 기술자 같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어린 시절의 나는 밀가루 음식이 싫어서 국수 말고 밥을 달라며 칭얼거리기 일쑤였다.

"엄마, 내는 국수 먹기 싫다, 아래도 먹었잖아. 밥도(줘), 나는 김치하고 밥 묵을 거다."
"누른 국수가 얼마나 구수하고 맛있노! 국수 싫으면 국물에다가 밥 말아가 무라(먹어라) 알겠재?"


엄마 표현대로 비할 바 없이 구수하고 맛있는 그것도 너무 자주 먹으니 물릴 수밖에 없었지만, 아버지의 최애 음식을 나의 투정이 이길리 만무했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성정의 엄마였지만 대부분의 그 시절 어머니들이 그랬듯 당신의 남편, 가장의 말을 최우선시했기에 말이다.

누른 국수가 먹기 싫어 칭얼대는 나와 동생을 위해 엄마는 국수를 썰고 남은 꽁다리를 연탄 화덕에 구워주곤 하셨는데, 이게 또 별미이긴 했다. 그냥 밀가루가 아닌, 콩가루가 섞인 반죽으로 구워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소하고 바싹하게 구워진 꽁다리를 하나씩을 들고, 어떻게든 국수를 먹지 않으려고 뻗대던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금세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어쩌면 그렇게 온 가족이 둘러앉아 누른 국수를 만들던 시간이 더없이 소중했던 걸 한참 후에야 알게 됐다.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기에 말이다. 한 그릇의 국수로 식구들과 객식구는 물론이고 동네 사람들까지 배불리 먹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니 오히려 즐거워했던 내 부모님의 부부로서의 행복이 그렇게나 짧았다는 걸, 왜 나는 머리가 굵어지고서야 느끼게 된 것일까?

시간이 제법 걸리는 누른 국수와 거기에 어울리는 겉절이를 때마다 만들면서도 한 마디 불평을 내놓지 않던 엄마의 마음이, 당신의 남편을 향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기에, 그 순간을 떠올릴 때면 아쉬워 절로 한숨이 나기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의 국수판과 밀대는 좀처럼 광에서 나오질 못했다. 국수를 엄청나게 좋아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기도 했거니와, 어쩌다 한 번 국수라도 밀라치면, 아버지 생각이 떠올라서 왠지 가족들은 가장 없는 슬픔에 잠기게 된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한동안 우리 집에서 '누른 국수'는 금기의 음식이기도 했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밴 한옥에서 이사를 나오던 날, 엄마는 물끄러미 그 국수판과 밀대를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었고 삼남매 몰래 회한에 찬 얼굴로 하늘을 한참 바라봤던 거 같기도 하다.

언젠가 엄마를 모시고 누른 국수로 유명한 맛집엘 들른 적이 있었다. 모름지기 국수는 당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 끓여먹는 것이라 여기던 엄마로만 생각했는데, 후루룩후루룩 어찌나 잘도 넘기시던지 보는 내내 마음이 흐뭇했었다.

"엄마, 맛있재? 엄마가 한 것보다는 좀 덜해도, 그쟈?"
"아이고 뭐라 하노, 국수는 넘(남)이 끼리(끓여) 주는 기 젤로 맛있다."


이른 시간인데도 누른 국수 맛집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로 줄이 제법 길다. 내가 기억하는, 그리고 이 지역 사람들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엄마의 손맛이 제대로 담긴 집이라 그런가 싶다. 알싸한 양념장과 매일 버무려지는 겉절이 김치를 생각하니 가을이면 항상 집을 나가곤 하는 내 입맛도 돌아올 것만 같다. 

더불어 아직은 이렇게 음식으로 개인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맛집이 남아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비록 엄마는 이제 내 곁에 계시지 않지만 다시 돌아온 가을은 늘 그윽하고, 바야흐로 누른 국수는 제철이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태그:#누른국수, #대구10미, #시절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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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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